086화. 간보러 온 거니?(1)
조현민이 외근에서 돌아왔다.
베트남에서 오더를 준 미디어 파사드 건에 대한 마무리 과정을 지켜보고 돌아오는 길이다.
“다녀왔어요?”
지태가 히죽 웃으며 반기자 조현민이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나야 LED에 대해 뭘 아나. 한빛 라이팅에서 차질 없게 잘 준비했다니까 대충 그런 줄 알아야지.”
말은 그리하지만, 일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다는 걸 지태는 잘 알고 있다.
저렇게 느긋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완벽하게 검수를 마치고 왔다는 증거였다.
“진행 과정은 계속해서 보내주기로 했죠?”
“응. 설치 들어가면 실시간으로 사진 찍어서 보내 준다고 했어.”
“수고 많았네요, 형님.”
“수고랄 게 뭐 있어. 난 사실 말이지, 우리 한스무역이 할 일이 없어서 노는 게 더 무섭다.”
“옳으신 말씀!”
둘은 마주보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태가 먼저 정색하며 조현민을 불렀다.
“형님.”
“어, 왜?”
“이참에 직원 몇 명 스카우트해 오죠.”
“뜬금없이 웬 스카우트?”
조현민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지태의 얼굴을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스카우트 이야기를 꺼낸 것 같진 않았다.
왠지 그의 표정에서 수상하고도 야릇한 고집이 느껴졌다.
말이 나온 김에 이 계획을 기어이 실행에 옮기고 말겠다는 그런 거 말이다.
“서서히 오더가 늘어나고 있잖아요. 언제까지 자잘한 업무 때문에 형님이 직접 현장을 뛰어야겠어요. 돈 주고도 못 구할 고급 인력께서 말이야.”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거기에 맞춰 사는 거지, 뭐.”
“여하튼 몇 명 더 확충해서 업무를 분담하고 세분화해야겠어요.”
하기는 그렇다.
지금 당장은 그렇다 쳐도 장차 한꺼번에 오더가 밀려들게 되면 세 사람의 인력만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것이다.
오더 받은 구매 물품을 섭외하는 일부터 검수하고 보내는 일까지의 전 과정에서 얼마나 할 일들이 많겠는가.
바빠서 허둥대다가 만에 하나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게 되는 날이면 그것은 곧 클레임을 넘어 자칫 신용 문제로까지 번지게 될 염려가 있다.
비즈니스 관계에서 신뢰와 신용도는 몇 백 번을 강조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터.
“신입들 선발해서 키우기엔 우리 같은 회사로선 너무 더뎌서 무리일 테고. 따로 생각해 둔 건 있어?”
“패자부활전에 뛰어들만한 사람들 위주로 한 번 찾아보죠, 형님.”
“……?”
“내가요, 선우를 나와서 한때 피시방에서 붙박이로 산 적이 있었어요. 경력사원 뽑는 데가 없나 하고 매일같이 뒤졌는데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아니, 기회를 잡기가 너무 힘들더군요. 제 어설픈 경력만으론 딱히 어느 한곳 명함 내밀 데도 없었고.”
“그래서 동변상련을 느꼈다?”
“한번 이상 상처를 입어본 사람들이 더욱더 지독하게 사는 겁니다. 실패였든 실수였든 한번 이상 나자빠져본 사람들은 그것을 거울삼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더 애쓰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그 사람들의 소중한 경험을 거저먹는 거고요.”
“그거 묘하게 설득력 있네.”
조현민이 마침내 끄덕였다.
“그래, 한번 뒤져 보지, 뭐. 괜찮은 사람들이 있으면 3배수 정도 찜해 놨다가 그중에서 선발하는 걸로!”
“나이, 성별, 학력, 죄다 상관없이요! 능력이 있고 열의만 넘친다면 누구든지 환영한다는 취지로!”
지태가 조현민의 제안에 자신의 생각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듣고 있던 조현민이 흐뭇하게 웃었다.
* * *
퇴근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뜻하지 않은 방문객이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섰다.
선우글로벌의 양태식 부장이었다.
“어머, 부장님!”
박수연이 먼저 발견하고 큰소리로 맞았다.
절대로 반가워서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아니었다.
다만 자기 업무에 정신이 팔려 누가 방문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지태와 조현민에게 그의 존재를 알리려는 속셈이었다.
“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태식 부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거 너무 서운하게 들리네. 지나가다가 커피 한잔 얻어먹으러 오지도 못하나? 더구나 우리 쪽 일을 맡아서 케냐에 갔다 왔잖나. 그 이후로 아무런 기별도 없고 해서 찾아온 건데.”
그니까 커피 한잔은 핑계일 뿐 사실은 케냐에서 있었던 일이 궁금해 왔다는 이야기였다.
답답한 놈이 우물을 판다고 연락오기를 기다리다 지쳐 제 발로 간을 보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케냐 쪽 일이라고요?”
지태가 입술 끝을 비틀며 약간의 조소를 섞었다.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하자 양태식 부장의 인상이 급하게 구겨졌다.
“실패를 했든, 뜻하지 않게 일이 틀어졌든, 일을 맡았음 우리 쪽에 결과보고를 해주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가타부타 뭔 말이 있어야지, 이 친구야!”
지태가 거듭 웃었다.
성질 같아선 주먹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이다.
“일단 좀 앉으시죠.”
지태가 휴게 공간의 소파를 가리켰다.
양태식 부장이 떨떠름하게 걸어가자 지태는 박수연을 돌아보았다.
“수연 씨, 우리들 차 한 잔만! 아니다, 내 건 관두고 양 부장님 드릴 것으로 딱 한 잔만.”
오래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딱 한 잔만 갖다 달라는 말에는 대충 몇 마디 주고받다가 양태식을 돌려보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자, 이제 뜸들이지 말고 시원하게 한번 털어놔 보게. 사무엘 은조로게란 놈을 어렵게 찾아냈고, 그래서 마침내 만났다면서? 그 후에 어찌 됐나?”
“선우의 정보력이 그렇게 뛰어났어요? 거기에서 지난 4년간을 근무했으면서도 나는 왜 그걸 몰랐을까?”
“아, 말 돌리지 말고!”
“말을 돌리다뇨! 내가 사무엘 그 새끼를 찾아낸 거랑 만났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누가 그 소식을 전해 줬는데요?”
지태가 눈을 부릅떴다.
마치 취조하는 독한 눈빛이어서 양태식 부장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그쯤은 이쪽저쪽 쑤시다보면 다 알 수 있는 거야. 우리가 머저리 핫바지도 아니고 말이지.”
“아, 그러셔요? 그렇게나 좋은 정보력을 가지고 왜 지금껏 그 사기꾼 새끼 하나를 추적하지 못하셨을까나?”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내 물음에 어서 대답이나 해 봐.”
양태식 부장은 적이 당황스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애써 큰소리를 냈다.
지태가 같잖아 죽겠다는 듯 다시금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요, 만났습니다. 그것도 졸라 어렵게! 근데 그놈이 케냐 정보부 애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뭔가 이상한 말을 내뱉던데 혹시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아십니까?”
“내,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그는 아까보다 더 많이 말을 더듬었다.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는 뜻이다.
“아, 모르시는구나. 그렇담 화끈하게 알려 드리죠. 놈이 말하길, 내가 케냐에 넘어온 정보를 고스란히 전해준 게 선우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친절하게 내 신상 정보까지 몽땅 다 탈탈 털어서.”
조용히 그곳에 묻어 달라고 사주하지 않았느냐는 말은 일부러 뺐다.
그것까지 말해 버리면 선우라든가 또 다른 의심의 정황이 있는 골드웰 측의 귀에 들어가 모든 증거를 인멸할 여지를 줄까 염려스러운 까닭에.
지태는 어떤 놈이 무슨 이유로 연거푸 자신을 해하려 하는지를 천천히 시간을 두고 추적해 나갈 생각이었다.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는 법.
일단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하나씩 차근차근 추적해 나갈 거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양태식 부장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우리 쪽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참으로 말이 안 되는 거죠, 당연히! 그런데 왜 그랬어요?”
“아, 그거야… 뭐? 하, 이거 참!”
양태식 부장은 일단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찬 다음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딴청을 피우며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의도 같다.
그런 양태식 부장의 뒤에서 갑자기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현민이었다.
“그거 혹시 허영만이 시킨 겁니까? 그 쪼잔한 새끼가 우리 한 대표한테 아직 원한을 품고 있어서?”
순간 양태식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식.
아니, 궁지에 몰렸는데 용케 빠져나갈 구실을 주어서 차라리 잘 됐다는 눈빛일까.
그는 얼굴까지 벌게진 채 조현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 자네! 말이면 단 줄 알아?”
조현민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엄연히 팩트만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없는 말을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뭐, 증거 있어?”
“증거요? 당연히 있지. 그건 한 대표가 말해줘 봐라.”
던지기는 자기가 던져놓고 답변은 슬그머니 지태에게 미루는 조현민이다.
지태와 눈이 마주치자 조현민은 양태식 부장 모르게 살짝 윙크를 했다.
차마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지태는 짓궂게 진저리를 쳐 보인 다음 양태식 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도 목숨을 걸었던 덕분에 케냐 정보부와 친분을 맺고 왔어요. 그쪽 팀장하고 아주 절친이 됐단 말입니다. 그 친구한테 정식으로 공문을 띄워 볼까요? 사무엘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직접 물어보실래요?”
양태식 부장은 지태의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때는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양태식 부장은 다시 또 궁지에 몰려 허둥지둥 변명하기에 바빴다.
“여, 여하튼 난 모르는 일이야. 나보다 윗선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내가 회사에 돌아가서 확인을 한번 해봐야겠구먼, 그래.”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면서 뭘 물어보나, 이 사람아.
설령 몰랐다 쳐도 양태식 저 인간의 성격상 감히 윗선에 대고 전후 사정을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거다.
지태가 양태식을 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리 내어 노골적으로 웃어 대는 것보다 심히 더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양태식 부장은 헛기침을 두어 번 민망하게 내뱉더니 몸을 홱 돌렸다.
“왜요, 벌써 가시게? 커피 내오면 천천히 한잔 하고 가시죠.”
“됐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회사에 들어가서 한번 따져봐야겠어. 내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는지 말이야.”
“정 그러하시다면야… 근데요, 나중에라도 우리가 혹시 잘못 알았던 게 있다면 연락 한번 따로 주세요.”
지태의 그 말엔 대꾸하지 않았다.
양태식은 근질거리는 뒤통수를 꽃잎 뿌리듯 흘려 가면서 바삐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세 사람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왠지 통쾌한데요.”
“박수연! 오늘은 밥 두 그릇을 먹어도 살찌지 않겠어. 거창하게 웃었으니 칼로리가 다 소모됐을 거야.”
“네, 전무님!”
“한 대표야! 그나저나 저 인간, 누구한테 뭘 따지러 간다는 거냐?”
“모두가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회사 화장실에 들어가서 혼자 거울 보면서 따지겠죠, 뭐. 나잇살이나 먹은 나를 왜 한스무역에 보내서 이런 개망신을 시키셨습니까, 상무님! 하면서 말이죠.”
지태가 능청스럽게 내뱉자 조현민이 배꼽이 빠져나갈 듯 낄낄거렸다.
상상만 해도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웃음기를 거둔 조현민이 문득 정색하며 지태를 바라보았다.
“저 쪼잔한 인간 때문에 한바탕 웃긴 했지만, 사주한 놈은 찾긴 찾아야겠지? 저번에 필리핀의 그 누구냐? 아, 후안이 경고한 것처럼 국내에서 사주한 놈이 있다면 앞으로도 안심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되니까 말이지.”
“글쎄요. 나를 없애는 건 한국보다는 외국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거듭 실패를 했으니까 뭔가 방법을 달리할지도 모르겠네요. 좀 더 기다리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입질이 오겠죠.”
“그렇다 해도 암튼 조심하고 또 조심해. 특히 밤길 다닐 땐 더더욱.”
“걱정 마셔요, 형님. 나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 24시간 늘 함께 하니까.”
“헐! 그게 어떤 신이냐? 진짜 그런 게 있다면 당장 나부터도 그 신을 믿어 볼 테니까.”
“형님은 말해드려도 모를 겁니다.”
지태는 픽 웃으면서 속으로는 최봉준의 모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