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이윽고 귀국(2)
“형님! 이제 그만 딴청 피우셔.”
“헛험! 볼일 다 봤냐?”
“여기가 무슨 화장실인가? 볼일은 무슨…….”
조현민은 지태의 썰렁한 농담에 입을 떡 벌리는 시늉을 하더니 곧 히죽 웃었다.
“인마, 추워. 썰렁한 개그에 얼어 죽겠다.”
“알았어요, 알았어! 일단 회사부터 들리죠, 형님.”
“어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님부터 찾아뵙는 게 순서지.”
“나도 그냥 한번 해본 소립니다. 당연히 그 말이 나올 줄 알고…….”
지태가 짓궂게 웃었다.
그들은 곧바로 대합실 밖으로 나왔다.
나온 직후 지은과는 일단 작별 인사를 나눴다.
좀 더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지만, 본가로 어머니를 뵈러 간다는데 마냥 떼를 쓸 수는 없는 일.
대신 저녁 늦게라도 시간을 내달라는 약속을 지태에게서 기어이 받아내고서야 지은은 자신이 몰고 온 승용차를 타고 돌아갔다.
조현민의 승용차로 이동하는 동안 지태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간 너무 바빠 자주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며 용서를 빌자 어머니는 사업하는 사람은 집안일에 신경 쓰는 게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약 1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그새 푸짐한 밥상을 준비해 놓았다.
“어머니! 지태 덕분에 오늘 처음 뵙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다 호강을 합니다.”
조현민이 떡 벌어지게 차려 놓은 밥상 앞에서 너스레를 떨자 어머니는 고마운 미소로 반겼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지태에게서 하도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마치 구면인 것처럼 느껴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수저를 든 채 지태의 얼굴만 계속해서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지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엄마도 좀 들어요. 아들 얼굴 보는 걸로 배를 다 채우시겠네.”
“그래. 난 사실 네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배가 다 찼다. 근데 밖에 나가서 먹는 게 부실했니? 왜 이리 얼굴이 홀쭉해졌어?”
“그만큼 바빴다는 이야기죠, 엄마.”
“그래서 갔던 일은 잘 되었고?”
“그럼, 엄마! 이 아들이 수억, 아니 수백억을 벌어 왔어요.”
그러나 농담인 줄 아는 모양이다.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지만 지태의 밝은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듯 어머니는 끄덕였다.
“오늘은 이대로 집에서 쉴 거지?”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나도 그러고 싶은데 회사에 가서 형님하고 이것저것 처리할 것도 있고, 또…….”
그리고 저녁엔 약속한 대로 지은을 만나야 했지만, 이 사실을 차마 말할 수는 없어서 지태는 말꼬리를 흐렸다.
“암튼 오늘은 좀 바빠요. 대신 이번 주 일요일엔 엄마랑 하루 종일 놀아 드릴게.”
지태가 히죽 웃자 어머니가 밉지 않게 입을 삐죽였다.
“엄마가 애니? 놀아준다니, 얘도 차암~”
식사를 마치고 과일과 차 한 잔으로 후식까지 챙겨 먹은 다음 지태는 조현민과 함께 집을 나섰다.
“형님!”
“어.”
조현민이 당연하다는 듯 주차되어 있던 자신의 승용차 운전석으로 가려고 할 때 지태가 뜻하지 않은 요청을 해왔다.
“미안한데요. 형님은 택시를 타고 먼저 회사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의아한 표정으로 조현민이 바라보자 지태가 쓰게 웃었다.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 그래요.”
“어딜?”
“분당에 좀…….”
“분당?”
“아버지를 모신 곳 말이에요. 찾아뵙고 인사 좀 드리려고…….”
“아!”
조현민이 금세 깨우쳤다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다녀와야지. 암, 당연히!”
조수석에 조현민을 태우고 대로변으로 나온 지태는 택시가 잘 잡힐 만한 곳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아버지만 뵙고 곧장 들어갈게요.”
“그래.”
지태는 추모공원 인근에서 눈부신 소국 한 다발을 사들고 아버지를 모셔 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근엄함으로 무장한 사진 속 무뚝뚝한 아버지의 표정이 그새 변했을 리는 없겠지만, 가슴 뿌듯함을 안고 다시 찾아온 지태의 눈에는 전과는 새삼 달라 보였다.
“저 왔어요, 아버지.”
소국을 내려놓은 뒤 지태는 그 앞에 정중히 허리를 굽혀 절을 드렸다.
“아버지, 제가 이제 좀 철이 든 것처럼 보이세요?”
말을 던져 놓고 보니 조금은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행여 이런 모습을 누가 보았을 세라 지태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휙 돌아보고는 쓰게 웃었다.
“출장 잘 다녀왔어요. 아버지가 보셨다면 기절초풍할 만큼 엄청난 돈도 벌어 왔고요. 아, 물론 잘 알아요. 제가 죽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상상도 못할 많은 돈을 벌어 오게 된 것은 오로지 아버지가 저를 지켜주고 돌봐준 덕분이라는 것을…….”
어느새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더라면 아버지가 그런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불쑥 찾아든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와중에도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에서 이윽고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던 참이었다.
생각해 보니 최봉준을 빠뜨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도 머릿속 어느 한 구석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게 뻔한 그였다.
“어르신! 서운하셨어요? 어르신의 조언과 보살핌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예, 잘 알아요, 어르신.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 엎드려 절 받기는 나중에 따로 하세. 지금은 아버님을 뵈러 온 게 아니던가. 나는 신경 쓰지 말게. 앞으로도 고마워해야할 일들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테니까. 껄껄껄.
최봉준은 그 말을 끝으로 지태의 머릿속에서 퇴장했다.
하기야 지태는 최봉준이 일부러 선택한 사람이었다.
지태가 거대한 상인이 되어 누구나 우러러보는 자리에 우뚝 설 때까지 끊임없이 지켜보며 채찍과 격려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진짜 고맙다는 인사는 먼 훗날 머릿속에 새겨둔 뜻한 바를 다 이루었을 때 한꺼번에 치르기로 지태는 마음먹었다.
지태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 나갈 자신의 꿈과 포부를 마음속으로 밝히고 또 밝혔다.
‘두고 보세요, 아버지. 나중에 다시 만날 때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아들로 우뚝 서 있을 테니까요.’
추모공원을 나와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지태는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 * *
“대표님!”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수연이 반갑게 불렀다.
“잘 있었어, 수연 씨?”
“저야, 뭐……. 어머, 많이 야위셨네요.”
“군살이 빠져서 더 건강해 보이지 않아?”
지태가 능청스럽게 받아넘기자 박수연은 그를 요모조모 자세히 살폈다.
“그런… 가?”
“아, 됐어, 그만해! 자, 그리고 이거 수연 씨 선물!”
지태는 자꾸 훑어대는 박수연을 미소로 제지하며 준비해온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어머, 정말 저 주시는 거예요?”
“그럼 주지 말까?”
“에이,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후훗. 별로 안 비싼 거야. 차보라이트로 만든 목걸이하고 귀걸이 한 세트!”
“어머, 대박!”
박수연은 연신 물개박수를 쳐가며 감동했다.
“고마우면 형님하고 나한테 차 한 잔만!”
지태는 조현민의 자리 쪽으로 걸어가면서 박수연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금세 얼굴 가득 홍조를 그린 박수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넌 왜 수연이의 가녀린 가슴에 불을 지르고 난리냐!”
“불을 지르다뇨?”
“쟤 얼굴 좀 봐라. 붉게 물들었잖냐. 그 느끼한 윙크 한 방에!”
“참, 나!”
“그건 그렇고, 내 선물만 왜 쏙 빼먹어?”
“……?”
조현민이 많이 서운타 하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지태가 할 말을 잃은 듯 마주 쳐다보았다.
“왜, 왜? 뭐, 뭐?”
“선물을 미리 받아 놓고 안 그런 척 입을 싹 닦을 참입니까, 형님?”
“나한테 무슨 선물을 줬다고 그래.”
“아, 형수님한테 드리는 선물이 형님 선물이지요. 뭘 두 개씩이나 받으려고 그래. 하, 욕심도 참!”
“아까 그건 와이프 선물이고, 내 건 따로 또 줘야지.”
“아, 됐어요. 나중에 월급 받으면 직접 사서 셀프 선물을 하시든가.”
“어휴, 지독한 놈!”
조현민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농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한스무역의 대표였다.
조현민은 지태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루어진 영업 성과들에 대해 보고했다.
그간 오더를 받거나 오퍼를 던져 거래가 성사된 케이스들과 자신의 선에서 우선 처리했던 전결 사항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라성 같은 메이저급 무역회사들 입장에선 잔챙이 정도로 취급될 오더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것은 조현민의 피와 땀이 담긴 결실이었다.
머나먼 오지에 나가 고생하는 자신을 봐서라도 정말이지 굉장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듯했다.
짧은 시간 내에 이만한 성과를 내는 것은 베테랑 비즈니스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지태는 조현민을 향해 말없이 엄지를 들어보였다.
“아직은 다 자잘 자잘한 것들뿐인데, 뭘.”
조현민이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무슨 칭찬씩이나 하느냐는 표정으로 겸연쩍어 했다.
지태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잘하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우리 입장에선 이 정도면 엄청난 겁니다.”
“그렇게 봐 주면 고마운 거고.”
“참, 보니까 베트남 건은 기어이 따내셨네요?”
LED 전광판 오더를 말하는 거였다.
조현민이 따낸 한스무역의 첫 오더로, 그때 당시는 LED 전구를 팔았었다.
“우리가 독립한 이후 처음 텄던 거래가 맘에 쏙 들었나봐. 새로 지은 쇼핑몰의 외관을 꾸밀 미디어 파사드를 우리 측에 몽땅 다 넘겨주겠대.”
미디어 파사드란 건축물 외면의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를 가리키는 파사드(Facade)와 미디어(Media)를 결합한 말이었다.
건물 외벽의 전체나 일부를 LED 조명으로 꾸며 미디어 기능을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건물 미관의 시각적 아름다움과 각종 정보를 실시간으로 내보낼 수도 있어 홍보 수단으로 삼는 21세기 건축물의 새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기술이었다.
쇼핑몰이라면 그 규모면에서 꽤나 어마어마할 것이다.
“대략 어느 정도예요?”
“순수 국내산 LED 조명을 쓰는 조건으로 총 3백만 불에 쇼부쳤어.”
“햐, 우리도 우리지만 한빛 라이팅에서 좋아라고 하겠는데요.”
“사업 가뭄에 모처럼 노났다고 봐야지.”
조현민은 흐흐 웃었다.
한빛 라이팅은 한스무역과 거래하는 LED 전광판 제조업체였다.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문득 지태가 정색했다.
돌연 진지해진 지태의 태도에 조현민도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웠다.
“어, 말해봐.”
“혹시 선우 쪽에서 어떠한 거라도 연락 온 적 없었어요?”
“양태식 부장 말이지?”
“양 부장이든, 그 누구든.”
“양 부장은 아니고, 킁킁이한테선 한번 연락이 왔었어.”
“제 동기, 윤창민이요?”
“그래. 너 케냐 출장에서 돌아왔느냐고 지나가듯 묻더라니깐.”
지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보나마나 양 부장이 시켰겠군요.”
“내 생각도 그래. 자기는 그냥 네 안부를 묻는다는 차원이라는데 내가 볼 땐 딱 간을 보는 것 같더라니까.”
“개새끼들!”
지태의 입에서 급기야 욕설이 튀어나왔다.
사무엘 은조로게가 해 준 말이 생각나서였다.
놈은 어차피 광산 사무실에서 지태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모든 것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었다.
선우글로벌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던져준 것은 물론, 그곳에서 조용히 처리해 주길 주문했다고 했었다.
그 대가로 사무엘에게 투자했던 것은 모두 없었던 일로 돌려놓기로 합의를 했었다는 거였다.
사실 사무엘은 선우 측에 그 투자금을 돌려줄 생각조차 없긴 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깔끔하게 거래가 마무리되는 것이어서 꽤나 만족스러워하던 사무엘 은조로게의 얼굴이 지태의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지태가 이를 악무는 사이 조현민이 진지하게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