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속임수의 끝(2)
‘쟤는 또 뭐 하자는 수작이야?’
지태가 떫게 입맛을 다시며 캐서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녀가 이내 짓궂은 웃음을 피워 올렸다.
“안 씻을 거예요?”
“나중에. 그나저나 옷 좀 입읍시다. 출출한데 바로 저녁이나 먹으러 나가게.”
왠지 끈적끈적하게 다가서는 그녀의 분위기를 이쯤에서 얼른 끊어내는 게 현명하지 싶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야릇한 분위기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캐서린의 의도를 지태는 처음부터 그렇게 원천 차단해버렸다.
캐서린이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고는 지태가 보든 말든 대형 타월을 홀딱 벗어 던졌다.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어 본능적으로 흘깃 훔쳐보았는데 다행히 속옷은 입고 나온 상태였다.
캐서린은 지태에게 보란 듯 일부러 아주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바지부터 꿰차 입었다.
“피곤해서 나 먼저 잠자리에 듭니다.”
“어머, 벌써 자요? 아직 초저녁인데?”
“컨디션이 너무 안 좋네요. 많이 지치기도 했고. 자, 그럼…….”
게스트하우스 인근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지태는 샤워를 하고 나와 곧바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피곤하니 먼저 자겠다는 말로써 혹시라도 캐서린이 벌일지 모를 제2의 도발을 또다시 원천 차단해버렸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밤새 떠들 것 같았던 다른 방들의 소음도 이제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드르렁, 푸우!
드릉 드르릉, 푸우!
피곤에 한껏 절은 지태의 코골이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가운데 캐서린이 문득 건너편 침대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곤히 잠든 지태의 모습을 바짝 다가와 확인하더니 이내 자신의 스마트폰을 챙겨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이 왠지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객실 문이 조심스럽게 닫히자 고단한 것처럼 지금껏 심하게 코를 골던 지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캐서린이 방금 빠져나간 객실 문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 * *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걸어 나온 캐서린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누군가를 찾는 게 분명해 보이는 표정과 몸짓.
바로 그때였다.
게스트하우스의 낮은 담장 주변으로 기다랗게 조성해놓은 화단 너머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캐서린, 여기!”
“오, 허니! 마이 달링!”
그랬다.
놀랍게도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맥 브라운이었다.
그는 반갑게 안겨오는 캐서린을 양손을 벌려 꼭 끌어안았다.
“나 말이야, 기니로 넘어오는 동안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맥!”
캐서린은 이틀 전 국경을 넘어올 때가 떠오르는 듯 엄살과 투정을 부리며 짐짓 진저리까지 쳐댔다.
그런 그녀의 등을 맥 브라운이 사랑스럽게 쓸어주었다.
“미안해, 캐서린! 위험한 일을 시켜서 진짜 진짜 미안해.”
“이제 괜찮아. 여하튼 우린 성공했고,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있잖아.”
“이 사랑스러운 요정을 어찌 해야 하나.”
맥 브라운이 안고 있던 캐서린을 떼어 내며 가볍게 볼을 꼬집었다.
그러더니 그녀의 양 볼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는 이내 진하게 입을 맞췄다.
지금껏 나눈 대화도 기묘했지만, 황홀경에 빠져 서로가 간절하게 나누는 그들의 깊고도 달콤한 키스는 더더욱 수상한 풍경이었다.
단물을 모조리 흡입한 것 같은 표정으로 맥 브라운은 그제야 캐서린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사랑해, 맥!”
“거기에 열배 더한 것이 내 사랑이야, 캐서린!”
만족스러운 눈길로 다시 안기려는 캐서린을 맥 브라운이 양손으로 막았다.
“자, 일단 저쪽으로.”
맥 브라운은 캐서린의 손목을 잡더니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는 불빛이 미치지 않는 좀 더 으슥한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멍청한 그 한국 놈은?”
“코까지 드르렁 골면서 자는 걸 확인하고 나오는 참이야.”
“그 새끼가 자길 덮치진 않았고?”
“피이~ 몸으로 유혹해서 놈의 마음을 완전히 내 걸로 만들어 놓으랄 때는 언제고.”
캐서린이 밉지 않게 흘겼다.
“누가 진짜로 주라 그랬어? 줄 듯 말 듯 애간장만 태우라고 했지.”
“그래서 딱 그 정도만 했어. 근데 사실 건들 생각도 안 하더라고, 그 병신은!”
그게 아쉽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행이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소리였다.
캐서린의 냉소에 화답하듯 맥 브라운이 조소를 날렸다.
“요정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 고자새끼인가 보지, 뭐.”
“피이.”
둘은 다시 또 소리를 죽여 가며 킥킥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캐서린이 물었다.
“둠부캉은 지금 어딨어?”
“이 근처 호텔에다 숙소를 잡아 놨어. 걔 부하 놈들과 같이 있어.”
“근데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 거야?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서 우리 물건을 가지고 튀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런 대비도 안 해뒀을까 봐서 그래? 아까 낮에 코나크리 국립은행에 들러서 개인 금고에 잘 보관해 뒀어. 우리 둘 중 한 명이라도 보이지 않을 시에는 찾아갈 수 없게 만반의 조치도 다 해뒀고.”
“멋져, 자기! 이런 줄도 모르고 저 멍청한 한국 놈은 아직도 내 캐리어에 그 다이아 원석들이 들어있는 줄로만 알고 있어. 큭큭!”
캐서린이 게스트하우스 쪽을 쳐다보며 한껏 비웃었다.
그러니까 현재까지 이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태는 결국 이용만 당한 꼴이었다.
다이아 원석을 뒤쫓는 D.S.U의 시선을 지태 쪽으로 돌려놓은 사이 정작 물건은 둠부캉과 맥 브라운이 자연스럽게 들고 나온 것이고.
만일 지태가 이 대화내용을 들었다면 당장 모가지를 따겠다고 덤빌 일이었다.
단순히 이용만 당한 것이 아니라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한 지옥을 경험한 지태였으니 말이다.
“맥! 지금 덮치면 안 돼? 잠들어 있을 때 한 방 갈기고 놈에게 줬던 그 다이아 원석만 다시 빼내 오면 되잖아.”
캐서린이 돌연 재촉했다.
그러자 맥 브라운이 고개를 완강하게 내저었다.
“내가 듣기론 보통 놈이 아니라고 했어. 대한민국의 꽤 유명한 특수부대 출신이라더군. 걔네 특수부대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곳이야. 섣불리 덮쳤다가 만에 하나 일이 잘못돼서 시끄러워지면 아주 골치 아파져. 더구나 여긴 둠부캉도 힘을 못 쓰는 곳이잖아. 조금만 참아.”
“하아! 내일까지 저 한국 놈하고 함께 있기 정말 싫은데…….”
캐서린은 자못 몸을 꼬며 투정을 부렸는데 그것이 맥 브라운이 보기에는 아주 애교스러우면서도 요염해 보였다.
“하루라고는 하지만 이제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았잖아. 조금만 참아.”
“진짜야, 맥! 나 정말 들어가기 싫어. 오늘밤은 자기와 함께 있고 싶단 말이야. 그동안 못 나눈 우리의 사랑도 맘껏 나누고 싶고.”
“캐서린! 그건 내가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 나야말로 캐서린을 안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야. 하지만…….”
“그럼 해줘!”
“어, 뭐라고?”
“지금 해주란 말이야, 맥!”
“여기서?”
“뭐 어때. 나 지금 몸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이대로 그냥 돌려보낸다면 한국 놈을 깨워서 미친 듯이 덮칠지도 몰라.”
“허, 이런!”
맥은 혀를 차면서도 기분은 매우 좋아보였다.
캐서린의 끈적끈적한 유혹을 보고 있자니 이성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맥 브라운은 주변을 빠르게 훑더니 서둘러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 * *
“음…. 일이 그렇게 된 거로군요, 에릭!”
지태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통화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에다 라이터라도 갖다 댄다면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격정에 휩싸여 있지만, 애써 꾹 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초저녁에 지태와 통화를 끝낸 에릭은 곧바로 둠부캉과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스마트폰 전원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릭은 설마 문제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국외로 빼돌려 도망친 주범이 둠부캉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태에게 그런 사실을 들은 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릭은 둠부캉과 통화가 이루어지면 지태의 부탁대로 현재 감금상태라는 맥 브라운의 석방을 설득해보려던 참이었다.
한데 통화가 되질 않으니 참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큰맘 먹고 D.S.U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비록 그들과 친분관계에 놓여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의 분위기나 파악하려는 차원에서 어렵게 용기를 내본 거였다.
그러다가 마침 지태를 놓치고 돌아와 씩씩거리고 있던 D.S.U팀장과 어렵게 통화가 되었는데, 다이아몬드 원석에 얽힌 이야기의 전말은 지태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달라도 너무도 많이 달랐던 것이다.
- 후우!
폰 너머에서 깊게 뿜어내는 에릭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골치 아프죠, 에릭?”
지태가 쓰게 웃으며 물었다.
- 내가 골치 아플 게 뭐 있겠습니까. 골치야 미스터 한이 아프지. 이거 아무래도 미스터 한이 단단히 엮인 거 같습니다. 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한을 이용해 먹으려 한 거 같아요.
“나를 말랑말랑한 호구로 본 거겠죠. 하핫.”
- 하하핫. 놈들이 미스터 한의 진면목을 몰라서 그래요. 놈들은 자신들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자신의 말끝에 에릭은 다시 한번 폰 스피커가 망가져라 크게 웃었다.
케냐에서 광산업자 사무엘 은조로게를 어떻게 조져 놨는지 제 눈으로 직접 목도한 에릭이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지태가 놈들을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럼 캐서린의 진짜 정체는 뭐랍니까? 그리고 맥 브라운은 또 뭐고?”
- 그녀가 보육원을 운영했다는 건 완전 사깁니다. 실은 코노(Kono) 인근에서 보석 수집상을 했다더군요. 원석을 먼저 발견하고 채취한 원주민이 캐서린에게 접촉을 해왔고, 그걸 둠부캉에게 귀띔해준 것이 바로 그녀였답니다.
“그년이 왜 자꾸 사랑과 봉사정신을 벌거벗은 알몸으로만 실천하려고 그러나 싶더니만…….”
지태는 그간 캐서린이 자신에게 보여 왔던 은밀한 유혹의 순간들이 떠오르자 그 와중에도 쓴웃음이 픽 하고 새어나왔다.
자신의 평생 꿈이 어려운 지역에 수많은 보육원을 세워 그들을 돌보며 사는 거라고 했었다.
캐서린의 그 더럽고 뻔뻔한 거짓말이 생각할수록 가증스럽기만 했다.
지태가 다시 물었다.
“그럼 맥 브라운의 정체는요?”
- 그놈도 똑같은 사기꾼입니다. 미스터 한에게 기자라고 속인 것, 그리고 나중에는 CIA 요원이라고 다시 둘러댄 것 역시도 전부 거짓말입니다. 캐서린의 연인이면서 동업자였어요.
“햐, 이 시발 새끼들 좀 보소!”
한국말로 욕을 내뱉자 에릭이 ‘예?’ 하고 되물어왔다.
지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자 에릭은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픽 웃었다.
- 그 여자는 아직 들어올 기미가 없습니까?
“에릭의 말마따나 내가 깊은 잠에 빠진 줄 알고 느긋하게 맥 브라운 그 새끼를 만나고 있겠죠. 오늘은 그냥 최후의 만찬을 즐기게 모르는 척 내버려두죠, 뭐. 어차피 그리 명줄이 긴 연놈들도 아니고, 내일이면 둘 다 이 세상을 하직할 건데.”
- 그것도 좋겠군요. 그럼 내일 코나크리에서 보십시다. 첫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테니까 보고 싶더라도 조그만 참아요, 한! 하하핫.
에릭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왔다.
지태가 쩝 소리를 내며 쓴맛을 다셨다.
“그래요. 내일 만나면 우리 반갑게 포옹이라도 하십시다. 크큭! 참, 그 약속은 확실한 거지요?”
지태가 통화를 끝내기 전 깜빡했다는 듯 물었다.
- D.S.U 팀장한테 몇 번이고 확답을 받았어요. 놈들이 가지고 있는 것만 회수하면 끝이라고 했습니다. 한이 가지고 있는 50캐럿짜리 원석은 기꺼이 포기하겠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 정도면 목숨을 건 보상으로는 충분히 차고도 넘치니까.
지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캐서린은 여전히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요 며칠 못 나눴던 사랑을 한꺼번에 몰아서 푸는 모양이라고 지태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