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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80화 (80/272)

080화. 속임수의 끝(1)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로 들어온 것은 국경을 넘은 지 딱 이틀만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숲길을 따라 몇 개의 산과 언덕을 넘고 계곡과 냇가를 건넜는지 모른다.

헬기가 월경해서 총까지 쏴대는 통에 한바탕 소란을 겪은 다음이라 기니 당국은 잔뜩 긴장하며 국경 일대에 비상을 걸어두었다.

만약 이런 비상시국에 국경 수비대라든가 지원을 나온 무장 경찰 등에게 붙잡히게 된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크나큰 곤욕을 치렀을 거다.

아니, 어쩌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치안이 불안하고 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이 산간오지에선 더더욱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

산간지대에서 내륙으로 내려오는 동안 군인들이나 산적 같은 무리들을 만나지 않은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만일 그 산속 깊은 곳에서 그들과 조우라도 했다면 캐서린이 지니고 있던 다이아몬드 원석은 당연히 그들의 차지가 되었을 테니까.

또한 두 사람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었을 게 분명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 후 이 오지 산골에 그대로 내버려져 짐승의 밥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요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국경을 빠져 나와 정신을 바싹 차린 채 꼬박 하루를 걸었을 때 비로소 민가 하나를 발견했었다.

그제야 지태와 캐서린은 ‘이제는 진짜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여서 두 눈만 깜빡이며 바라보는 원주민에게 손짓 발짓을 동원해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얻었다.

허기진 뱃속에 먹을 것이 들어가니 아닌 게 아니라 이제는 정말 살 것만 같았다.

하늘이 똑바로 보이고 숨소리가 한결 맑아진 기분이었다.

바짝 굶주린 허기를 채우고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정신에 잠시 휴식을 준 다음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서야 이윽고 제법 큰 도시 하나를 발견했다.

기니 서부에 위치한 포레카리아라는 도시.

지태가 이곳에서 차를 구해 일단 코나크리로 넘어가자고 했지만, 캐서린이 고개부터 내저었다.

“이제 안심해도 되는데 굳이 서둘 필요 없어요. 더구나 한의 상처가 덧나고 있잖아요. 치료부터 받고 하루쯤 푹 쉬었다가 내일 떠나기로 해요.”

캐서린은 총상을 입은 지태의 팔뚝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총알이 스쳐 갔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고 비를 맞으면서 방치한 탓에 상처 부위가 겉으로 보기에도 꽤나 심각했다.

지태는 캐서린의 권유를 받아들여 포레카리아에서 하루를 묵으며 대충 응급처치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차를 빌려 타고 코나크리로 나왔다.

이게 과연 시동이나 걸릴까 싶을 만큼 낡은 승합차 한 대를 빌리는데 무려 1천 달러를 썼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은 원하는 목적지까지 다다르는 것이 목적인 까닭에 돈이 아까운 줄도 몰랐다.

코나크리에 도착한 직후 지태는 가장 먼저 국제공항부터 들르자고 했다.

캐서린을 비행기에 안전하게 태워 영국으로 내보내는 것까지가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야만 그들과 맺은 오더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캐서린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혼자 갈 수는 없어요. 맥의 생사도 확인 못했는데 나만 떠날 수는 없다고요, 한!”

그러면 나더러 어쩌라고?

이보다 뭘 어떻게 더 해주길 바라는 거야?

지태는 묻고 싶었다.

아니, 캐서린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간절하게 매달리는 캐서린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차마 그런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지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빠져 나온 그곳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은 아닐 테고, 무슨 방법이 있기나 한 겁니까?”

캐서린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요. 당장은 없는데 함께 고민하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헐!

지태가 약간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캐서린이 작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좀 쉬고 싶어요. 우리 둘 다 너무 지쳤잖아요, 몸도 마음도! 몸이 가벼워야 생각도 가벼워지는 법이에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를 버리고 도망칠 생각이 아니라면 일단은 캐서린의 말대로 따라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몸도 마음도 전부 지치기도 했고.

그때 캐서린이 말했다.

“우리 코나리크에서 제일 좋은 호텔로 잡아요.”

허, 점점…….

얘가 도대체 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지금 놀러온 줄 아나, 이 여자.

지태가 입을 떡 벌린 채 헛웃음을 켜자 캐서린이 흘깃 돌아보았다.

“내가 뭘 또 잘못한 거예요?”

“둠부캉이 정보부 요원이라는 거 잊었습니까? 그가 아니라도 D.S.U는 또 어떻고.”

“……?”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캐서린은 물음표 부호를 머리에 가득 띄운 채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각국 정보부끼리는 웬만한 것쯤은 정보를 서로 공유하거나 연계합니다. 어쩌면 벌써 둠부캉이 이 나라에 넘어와 있을 수도 있고. 그런 마당에 가장 좋은 호텔? 허, 이거 참!”

만약 시에라리온 정보부의 요청으로 기니 당국에서 조치를 취해온다면 가장 먼저 호텔 등 숙박업소부터 탐문할 것이다.

지태는 바로 그런 점들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럼 어쩌죠?”

“신원 확인이 필요 없을 곳으로 가야겠죠.”

“가령?”

“음… 아무래도 공안당국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을 민박집이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 그래, 그게 정답이겠네.”

곰곰이 생각하던 지태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캐서린의 눈을 보며 끄덕였다.

* * *

이제는 캐서린의 심신이 조금은 편해지긴 했는가 보다.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들으며 지태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여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이곳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둠부캉에 붙잡혀 있을 맥 브라운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으로 울상이더니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저리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철이 없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캐서린은 이곳 게스트하우스를 보자마자 통째로 빌리면 어쩌겠느냐는 제안도 해왔었다.

그건 정말이지 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약을 해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설령 많은 돈을 제시해 그들의 예약을 모두 취소한다 하더라도 겨우 둘이 묵을 거면서 통째로 게스트하우스를 빌린다고 하면 주인은 또 두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분명 수상한 눈길로 바라볼 게 뻔했다.

혹시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는 아닐까 하는 의심은 기본이요, 뒤가 구리다 여겨 행여 강도로 돌변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되도록 눈에 톡톡 튀는 행동은 삼가야 했다.

그러나 2인실은 너무 좁다고 우기는 통에 그 요청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널따란 4인실을 얻게 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이곳 게스트하우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객실을 꽉 채운 투숙객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들로 실내는 무지 시끄러웠다.

그러나 이 소음들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인조차 방치해두는 이 소음들이 깊은 밤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진다면 과연 잠이나 편하게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태는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저녁 7시가 넘어 있었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비로소 전원을 넣었다.

위치 추적을 당할까봐 계속 스마트폰을 꺼두었었는데 전원을 켜는 순간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들이 연달아 띠링 띠링 소리를 내며 떠올랐다.

그중 상당수는 조현민과 지은이었다.

그리고 케냐의 기민성도 문자를 포함 세 개나 찍혀 있었다.

한국은 지금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미안함에 지금 당장 전화를 넣는다면 조현민은 반갑게 받기보다는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놀라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그래, 형님껜 내일 일어나는 대로 연락하기로 하지, 뭐.”

그렇다면 지은은?

스스로에게 묻던 지태가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기왕 잔소리를 들을 거라면 내일 한꺼번에 듣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지태는 곧 케냐의 기민성에게 전화를 넣었다.

- 어! 무슨 일 있었어? 왜 전화기는 꺼놓은 건데?

“그럴 일이 조금 있었어. 잘 지냈냐?”

- 나야 뭐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세고. 참, 에릭이 어제 뜬금없이 네 안부를 묻더라.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사실 생길 뻔했는데 잘 넘어갔다. 이렇게 전화하는 걸 보면 모르겠어?”

- 하긴 그러네. 그래서 지금 어딘데?

“여기, 기니!”

- 하, 정말! 너 혹시 홍길동이냐? 뭐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야?

“말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국이니까 나중에 해줄게. 대신 부탁 하나만 하자.”

- 니미, 부탁은 무슨! 뭐든 그냥 편하게 말해, 인마!

기민성은 정겹게 투덜거렸다.

“그래. 그럼 편하게 말할게. 케냐에서 차보라이트를 구매해준 보석 회사 그라프 말이다. 거기하고 다시 연결 좀 하고 싶은데.”

- 그라프를? 아직 못 팔아먹은 차보라이트가 더 있는 거냐?

“미안! 사실 저번에 밀가루 구매 건으로 전화했을 때 내가 너한테 말하지 못한 부분이 좀 있었어.”

- 뭘… 안 했었는데?

지태가 미안하다는 말투로 힘없이 내뱉자 기민성이 대뜸 물어 왔다.

“사실은 다이아하고 관계된 복잡한 일에 내가 좀 휘말려 들었었어.”

- 다이아?

이래선 한없이 끝말잇기만 되풀이 될 듯했다.

지태는 한숨을 푹 내쉬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도록 짧게 차근차근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사례로 받은 원석을 처분을 하려고 하는데, 연결해줄 수 있지?”

-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해주지. 한데 내가 더는 걱정할 일 없는 거지? 아, 그니까 위험할 수 있는 건 이제 다 지나갔냐고!

기민성은 무엇보다 지태의 안위가 심히 걱정되는 모양이다.

시에라리온 하면 가장 먼저 블러드 다이아몬드부터 연상이 되는 탓도 컸으리라.

“잘 마무리 됐어. 기니까지 잘 넘어왔잖아. 그리고 이렇게 안부 전화를 하는 걸 보면 몰라?”

- 알았어. 일단 내일 담당자 만나서 다이아몬드에 대한 운을 좀 띄워 볼게.

기민성이 확실하게 약속했고, 지태는 몇 마디 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캐서린은 욕실에서 아예 오늘밤을 지새울 모양이다.

아직까지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태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생각난 김에 에릭에게도 전화를 걸어보려는 거다.

- 아, 미스터, 한! 신상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이 급하게 물어 왔다.

“무슨 일이라뇨?”

- 어제 둠부캉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미스터 한과 연락이 닿질 않는다고.

“아, 그렇습니까?”

지태는 일단 시치미를 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했다.

둠부캉에게 속고 나니 그를 소개해준 애꿎은 에릭까지도 아주 잠깐 의심스러워서였다.

한데 그 순간 퍼뜩 양심에 찔린다.

케냐에서 진심을 다해 자신을 대했던 그를 생각해보면 의심은 그야말로 억지이고 실례였다.

에릭은 현재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에게까지 속일 이유가 이제는 없다고 판단한 지태는 곧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지태에게서 예기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에릭은 깜짝 놀랐다.

- 그래서 지금은 기니에 있다는 말이죠?

“설명하자면 몹시 깁니다. 자세한 건 지금 다 말해줄 수 없고, 암튼 이거 한 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내가 지금 둠부캉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거.”

- 함정이라니? 그 친구가 미스터 한에게 어떤 해코지라도 했단 말입니까?

“결과적으론 그래요. 아주 복잡하게 얽힌 거 같습니다. 난 지금 둠부캉이나 대통령 직속 친위대에게 쫓겨 어렵사리 시에라리온을 탈출해 기니로 넘어온 겁니다.”

- 허, 이런!

에릭은 자신이 대단히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자초지종을 좀 더 상세히 듣길 원했다.

지태는 할 수 없이 기민성에게 해줬던 딱 그만큼만 압축해서 지금까지의 일들을 모두 설명해 줬다.

- 그래서 지금 캐서린이란 여성과 함께 있다는 말이지요?

“예, 어쨌든 내가 받은 의뢰니까 끝까지 책임을 져야겠죠. 보수를 미리 받았다고 무책임하게 버려둘 순 없습니다.”

- 내가 겪어 본 미스터 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여하튼 둠부캉과 통화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한이 부탁한 맥이라는 사람의 안위에 대해서도 물어볼 거고.

“고맙습니다, 에릭. 이 고마움을 어찌 다 갚아야 할지…….”

- 그런 말씀 마세요. 난 오히려 미스터 한에게 미안해서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에릭은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면서 바삐 전화를 끊었다.

되도록 빨리 둠부캉과 통화를 시도해 보려는 것일 거다.

지태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그제야 캐서린이 욕실에서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을 이용해 소라과자처럼 말아 올렸고, 대형 타월을 짧은 원피스처럼 몸에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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