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79화 (79/272)

079화. 마침내 국경!(2)

“자, 캐서린, 이쪽으로!”

지태는 재빨리 캐서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무 아래로 몸을 급히 피하는 순간 대낮처럼 환히 밝힌 서치라이트 불빛이 그들의 옆쪽을 빗질하듯 훑고 지나갔다.

보슬보슬 내리던 비마저 이제는 다 그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아직도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는 것처럼 온통 땀으로 뒤덮여있었다.

깊은 밤중이라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일 환한 대낮이었더라면 아마도 추격하는 군인들에게 벌써 붙잡혔거나 사살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숲을 거슬러 올라오는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빨라져서 이제는 엎드리면 코 닿을 곳까지 접근해있는 상태다.

지체할 틈이 없었다.

지태는 캐서린의 손목을 다시금 꼭 쥐었다.

“갑시다, 캐서린.”

“국경까지 얼마나 남았을까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약 2킬로 정도 남았을 거요.”

“하아, 2킬로…….”

캐서린은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막막함을 신음성으로 대신 내뱉었다.

일상에서의 가벼운 산책길이라면 모르되 쫓기는 입장에서의 2킬로미터는 천릿길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때까지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캐서린은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지태와 되도록 보조를 맞추려고 애썼다.

어느새 국경 근처까지 날아갔던 헬기가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지태가 본능적으로 캐서린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곁에 바싹 붙이려할 때였다.

돌멩이에 그만 그녀의 발이 걸린 모양이었다.

“아얏!”

캐서린이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바삐 일으켜 세우려는데 스쳐 지나갔던 헬기가 선회하기 시작했다.

끝내 들키고 말았다.

강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두 사람의 몸을 연신 핥아댔다.

동시에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진동했다.

투타타타타탕.

피융, 피융.

파파파팟.

헬기에서 쏟아진 총탄들이 물기 먹은 땅바닥을 깊게 도려내며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직접 겨냥하지 않고 그들의 옆을 때려대는 걸 보면 아무래도 경고사격 같았다.

역시나,

“거기 두 사람! 지금 즉시 우리가 잘 볼 수 있도록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나와라. 두 번 경고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나와라.”

지태는 땅바닥에서 일으킨 캐서린을 꼭 끌어안고 나무 뒤로 숨었다.

서치라이트 불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속없이 길게 늘어졌지만 만일 총격을 가해온다 하더라도 우선은 나무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다.

“지금부터 딱 셋만 세겠다. 그다음엔 벌집이 돼서 나자빠져도 나를 원망할 생각일랑 마라!”

곧이어 숫자를 세어가는 팀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지태의 가슴은 덩달아 쿵쾅쿵쾅 뛰었다.

이제 어째야 하나.

마지막 숫자가 불리는 순간 그때부터는 무자비하게 총알이 날아들 것이다.

설상가상 캐서린은 발목까지 접질린 상황.

미친 척 목숨을 걸고 뛸 수도 없는 아주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셋!”

마침내 숫자 셋이 다 끝났다.

동시에 기관총의 총구에서 무지막지하게 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투타타타타탕.

두두두두두두.

총알을 분무기처럼 쏟아대고 있는 터라 아름드리나무이긴 해도 날카롭게 튕겨 나오는 파편들까지 다 막아주진 못했다.

지태는 일단 소나기를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캐서린을 포옹하듯 앞으로 꼭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파파팟!

“어머! 으아!”

캐서린은 총알이 나무에 박혀 파편을 튕겨낼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장전된 총알을 몽땅 다 쏟아 부은 모양이다.

총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러나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은 더더욱 없는 거고.

헬기가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군인들의 그림자가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저들까지 합세를 한다면 그야말로 도망칠 가능성은 제로.

지태는 나무 그늘에 가려져 있는 어둠 저편에 눈을 돌렸다.

실탄을 재장전하기 전에 일단 그쪽으로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잠깐, 실례!”

지태는 다짜고짜 캐서린을 자신의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 캐리어를 손에 쥔 채 죽을힘을 다해 나무 그늘 속으로 뛰어갔다.

타앙, 탕, 탕.

기관총의 실탄을 아직 장전하기 전이라 마음이 급했던 팀장은 급기야 권총을 날려 왔다.

하지만 유효사거리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저런 것쯤은 유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

“하악, 하악, 핡, 핡.”

이윽고 반대편의 짙은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선 지태는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그렇다고 쉴 수는 없었다.

어깨에서 살짝 흘러내린 듯한 캐서린을 반동을 이용해 재수습한 다음 숲이 더욱 울창한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보로 뒤쫓아 오는 군인들의 랜턴 불빛이 지태가 있는 곳까진 아직 닿지 않았지만, 언뜻 어른거리는 이쪽의 그림자는 놈들이 발견한 듯했다.

그들은 대충 짐작하고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타타타타탕.

투투투퉁.

투타타타탕.

그들이 쏜 총알들은 대부분 엉뚱한 곳들을 때렸지만, 그중 몇 발은 달려가는 지태의 길목 앞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두두두두두.

헬기가 다시 쫓아오고 있었다.

숲에 가려 두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자 헬기에서도 대충 짐작만으로 총격을 가해왔다.

이럴 땐 제정신인 게 오히려 방해가 된다.

제정신을 갖고 어찌 저 빗발치는 총알의 소나기를 피하며 달려 나갈 엄두가 나겠는가.

이쯤에서 잠시 미친 척 정신을 내려놓아도 괜찮다.

그렇게 작심하고 지태가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 자네, 이제부턴 내 말을 따르게. 여기에서 열 걸음을 곧장 내달은 다음 좌측으로 방향을 틀게 되면 큰 바위 언덕이 하나 보일 것이네. 잠시 총탄을 피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게야. 어서 가, 어서!

마침내 최봉준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이 양반 어디 갔다가 이제야 나타나신 거야.’

지태는 뒤늦게 나타나 조언을 던져주는 최봉준이 살짝 야속하긴 했지만, 사실 그 목소리는 지옥의 문턱에서 손을 내밀어준 천사의 손길만 같았다.

피융, 피융.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 총알 세례를 무릅쓰고 지태는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하며 최봉준이 일러준 대로 열 걸음을 정신없이 뛰었다.

그리고 좌측으로 방향을 틀자 진짜로 바위로 된 언덕이 떡하니 나타났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캐서린을 어깨에 들쳐 메고 캐리어까지 한손으로 끌고 뜀박질을 해대는 터라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다.

지금 같아선 유치원생이 살짝만 밀어도 픽 쓰러질 것처럼 온 다리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저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자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었나?

고갈된 체력을 비웃는 것인지 최봉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어르신, 진짜로 죽을 지경입니다. 도와주지 않으시려거든 힘 빼는 소리는 제발 그만 두세요.’

지태가 속으로 작은 원망과 불만을 쏟아냈다.

- 할 수 없구먼, 그래. 인정머리 없는 영감탱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뭔가 시늉이라도 해야겠는걸!

최봉준이 겉으론 구시렁대면서도 뭔가 희망적인 말을 내뱉는 것을 보니 도와줄 생각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기대를 갖고 있는 찰나 돌연 머릿속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지태는 저도 모르게 ‘앗!’ 하는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고통은 잠시뿐이었다.

곧 피로 회복제를 한꺼번에 백여 병은 입에 털어 넣은 것처럼 온몸이 가뿐해졌다.

시야도 야간 투시경을 장착한 듯 훤히 뚫린 기분이었다.

‘이 양반 이런 신통력도 가지고 계셨네!’

지태가 신기 방통한 듯 마음속으로 감탄하자 최봉준이 다시금 따끔하게 혼냈다.

- 지금 감탄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자네가 여유로운 처진가? 이 효력은 1각 정도밖에 지속이 안 된다네. 서둘러야 할게야.

1각이면 약 15분 정도.

헐,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은 살고 볼 일이다.

‘어르신! 감탄과 감사인사는 나중에 따로 드리겠습니다!’

지태는 느닷없이 불끈 치솟은 체력을 앞세워 바위 언덕을 손쉽게 넘기 시작했다.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가던 캐서린이 그 순간 화들짝 놀란 듯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내심 그에게 업혀 오는 동안 제 발등을 찧고 싶을 정도로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조금 전보다 더욱 기운차게, 마치 사이보그로 변한 것처럼 지태가 펄펄 날고 있으니 왜 아니겠는가.

“한! 어떻게 된 거예요?”

“말 시키지 마요. 기운 떨어져. 대답해줄 시간도 없고!”

끄응.

캐서린은 다시 지태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다.

지금으로서는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게 그나마 도와주는 거다.

바위 언덕을 넘어 군인들의 시야에서는 좀 벗어났나 싶었지만, 헬기의 사정권에선 아직 벗어나질 못했다.

서치라이트로 지태를 포위망에 가둬둔 채 다시 또 기총 사격이 가해졌다.

투타타타타탕.

피욧, 피욧.

튀웅, 튀웅, 튀웅.

바위를 때린 유탄이 사방팔방으로 불꽃을 피우며 날아다녔다.

그러나 지태는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다.

기왕 도와주기로 한 것 최봉준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 지태를 살리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내비게이션처럼 ‘좌측! 우측! 멈춰! 달려!’ 등등을 외치며 지태가 가야할 방향을 속속들이 찍어주고 있었다.

길은 다시 숲으로 이어졌는데 지금껏 지나온 숲보다 나무가 좀 더 굵고 우람했다.

서치라이트의 강한 빛살도 풍성한 나무 잎사귀를 뚫고 들어오질 못했다.

지태는 야간 투시경을 쓴 것처럼 한껏 맑아진 두 눈을 앞세워 최봉준이 이끄는 대로 죽기 살기로 뛰었다.

그렇게 얼마쯤 더 달렸을까.

최봉준이 경고했던 1각이 어느새 지났나 보다.

눈앞이 다시 까매지며 온몸의 힘도 덩달아 소멸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어깨에 둘러맨 캐서린의 체중이 또다시 무겁게 다가왔다.

진을 다 빼버린 후유증이 두 다리로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후들거린다.

털썩.

지태는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어깨에 매달려 넋을 놓고 있던 캐서린이 땅바닥에서 두어 바퀴를 굴렀다.

“젠장! 이젠 때려죽인다 해도 더는 못 가.”

지태는 가쁜 숨이 몰아쳐 나오는 입술을 크게 벌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몸을 일으켜 다가온 캐서린이 고생했다는 듯 지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대단해요, 한. 이제는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거예요. 한은 최선을 다했어요.”

바로 그때였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곳보다 조금 더 북쪽에서부터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하늘 높이 불꽃을 피워 내며 뭔가 훅 떠올랐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조명탄이었다.

‘뭐지, 또?’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지태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국경을 넘어와 있던 거다.

조명탄은 국경을 넘어온 헬기에 대한 기니 군의 경고였던 거다.

헬기에서 내뿜던 요란한 로터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한?”

캐서린이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지태는 대답 대신 ‘흐흐’ 하고 바보처럼 웃음을 흘렸다.

곧 킥킥하는 웃음소리로 변하더니 어느 순간엔 발동 걸린 경운기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렇다고 크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아니었다.

음소거가 된 것처럼 입만 크게 벌린 채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

캐서린이 영문을 몰라 하며 입을 떡 벌린 채 지태를 쳐다보았다.

그런 캐서린에게 자신이 웃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캐서린! 우린 성공한 거요. 이미 국경을 넘어왔단 말이야. 여긴 기니예요, 기니 국경!”

“그럼 저 총소리는?”

“아마도 기니의 국경 수비대일 겁니다.”

순간 캐서린이 미친 듯이 지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지태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그의 얼굴 곳곳에 대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때만큼은 지태도 거부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축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뜨겁게 감아 오는 캐서린의 입술을 지태는 순순히 달콤하게 받아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