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마지막 고비(5)
“그거 안 뒤집어써도 됩니다. 군인들이 자주 매복하는 지점을 내가 알고 있거든요. 거길 피해 조금만 돌아가면 됩니다. 차로 10분쯤 가면 되니까 잠시 몸만 낮추고 있으세요.”
다행이었다.
지태는 조금 전 오두막으로 복귀할 때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포장천막을 뒤집어쓰고 있는 동안 하마터면 욕지기를 할 뻔했었다.
거름이나 가축들의 분뇨를 치우던 농기구가 그 안에 놓여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냄새가 가히 장난이 아니었었다.
자신은 간신히 욕지기를 참고 왔지만, 캐서린은 그걸 뒤집어쓰는 순간 참지 못하고 곧바로 먹은 것을 죄다 토하고 말 것이다.
운전대를 잡은 룬카야는 스몰라이트만 켠 채 천천히 어둠을 밟아 갔다.
숲으로 우거진 길이었지만 그는 눈 익은 길인 듯 용케 차를 잘 몰아갔다.
바르카는 조금 전 10분 정도면 닿을 거리라고 했는데 그 10분이 이 나라에선 두 배쯤 더 긴 시간인 모양이다.
지태의 생각으로는 여기까지 오는 데 20분도 더 걸린 것 같았다.
마침내 룬카야가 차를 세웠다.
엔진을 끄고 스몰라이트마저 꺼버리자 사위는 금세 칠흑 같은 어둠속에 잠겨 버렸다.
사방 몇 리 안으로는 빛을 발산하는 그 어떤 물체도 보이지 않는 곳, 그야말로 먹물 속 같은 세상이었다.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세차게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려왔다.
폭우로 물이 불어나 그 소리는 마치 폭포수가 낙하하는 것처럼 요란했다.
어둡고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에서 불안감을 느낀 캐서린이 지태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안기다시피 했다.
“두 분은 여기에서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내가 바르카와 함께 카누를 가지고 있는 지인의 집엘 다녀오겠습니다.”
룬카야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카누가 강 근처에 있는 거 아닙니까? 굳이 허락받을 것 없이 조용히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안 될까요?”
지태가 의문을 담은 목소리로 묻자 바르카가 대신 답을 던져왔다.
“카누 주인이 워낙 지독한 놈이라서 항시 그것을 집 창고에다가 보관합니다. 그래서 다만 몇 푼이라도 쥐어주고 빌려 와야 해서요.”
“그걸 빌리는 데 얼마쯤 쥐어줘야 합니까?”
“100달러만 쥐어줘도 그놈은 좋아서 환장할 겁니다.”
이 새끼들 봐라?
이젠 노골적으로 삥을 뜯으려고 하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더러워도 당장 아쉬운 입장은 자신인 것을.
지태는 놈의 하는 짓이 매우 얄밉기는 했지만 별다른 군말 없이 100달러 지폐 한 장을 쏙 빼서 내밀었다.
바르카가 얼른 돈을 받아 챙기며 바람처럼 다녀오겠다고 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오시오.”
바르카와 룬카야는 곧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더욱 오싹한 기분이 드는 듯 캐서린은 매혹적이고 풍성한 자신의 가슴을 지태에게 더욱 바싹 밀착해 왔다.
* * *
어둠을 밟아 가는 바르카와 룬카야의 발걸음은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신나보였다.
비단 사례비로 받은 1천 달러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목소리를 잔뜩 죽인 채 두런두런 속삭이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자못 수상했다.
“너도 아까 100달러짜리 지폐로 두둑한 지갑 봤지?”
바르카가 툭 던지자 룬카야가 바로 말을 받았다.
“우리한테 사례금으로 준 2천 달러를 빼고도 최하 7~8천은 더 들어 있겠던데?”
“그것 말고도 난 두 연놈이 가지고 있는 가방 속이 더 궁금해. 뭔가 귀중품 같은 것을 감춰두고 있다는 쪽에 내 이름을 건다.”
“네까짓 놈 이름을 걸어서 뭐하게?”
“인마, 룬카야! 너도 내 촉이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잖아!”
“알지! 네놈이 예전 같았음 부족의 주술사를 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촉이 좋다는 건 우리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하지.”
두 사람은 곧 낄낄 웃었다.
그러다가 룬카야가 먼저 웃음을 지웠다.
정색하는 폼으로 바르카를 슬쩍 돌아보았다.
“바르카! 괜히 우리 애들을 불렀나? 겨우 한 놈뿐인데 우리 둘이서 그냥 간단히 해치워버릴걸!”
룬카야는 거사 후에 몫을 나누어 가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그 돈이 아까웠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바르카가 숨도 안 쉬고는 그를 비웃었다.
“야, 네놈이 그 한국 노란원숭이가 하는 짓이나 눈빛을 못 봐서 그래. 체격만 봐도 운동깨나 한 것 같은데다가 아까는 한국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자랑까지 하더라. 더구나 권총도 가지고 있고. 그런 놈을 우리 둘이서 상대한다고? 야,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오히려 우리가 당하고 말걸!”
“바르카, 권총은 나도 있어, 인마!”
룬카야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허리춤에 꽂아둔 권총을 빼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을 부른 건 잘한 거야. 만에 하나라는 것도 생각해야지. 괜히 더 큰 욕심을 부리다간 먹기도 전에 탈만 난다.”
“젠장!”
“애들한테 단단히 무장하고 오라고 그랬지?”
“우리가 어디 강도짓을 한두 번 벌이냐. 킥킥… 케엑!”
별 걱정을 다한다는 투로 룬카야가 낄낄 웃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돌연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뒤로 쿵 나자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르카가 무슨 일인가 돌아보는 찰나였다.
휘익.
어둠 속에서 돌멩이 하나가 또 다시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르카의 미간과 콧대 사이에 정확히 꽂혔다.
아니다. 그것은 돌덩이처럼 단단한 주먹이었다.
“어쿠!”
바르카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잘려 나간 나뭇등걸에 걸려 땅바닥에 그대로 뒤통수를 박았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대략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 시발 새끼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나뒹구는 두 놈의 머리 위에서 낯선 한국말이 내뱉어졌다.
두 놈을 습격한 것은 다름 아닌 지태였다.
지태는 두 번째로 쓰러진 바르카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러고는 대뜸 관자놀이를 후려 아예 잠재워놓았다.
“넌 나중에 따로 심판할 테니까 잠깐만 자고 있어.”
역시 한국말로 내뱉으며 이번에는 룬카야에게 다가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날아든 손날에 목젖을 세게 얻어맞은 룬카야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했지만 말귀를 못 알아들어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주둥이 닥쳐, 이 새끼야! 계속 엄살 부려댔다간 목구멍을 확 뚫어버릴 테니까. 알아들었어?”
지태가 가슴팍에 올라탄 채 낮게 으르렁거리자 놈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묻는 말에 헛소리를 지껄여도 목을 따버릴 거야. 알겠어?”
두려움이 온몸에서 찔러왔다.
룬카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모자라 예스, 예스를 연발했다.
“자, 묻겠다. 첫째, 이 근처에 카누가 있긴 있냐?”
“있습니다. 그, 그건 사실입니다.”
“어디에?”
“아까 차를 세워 놓은 곳에서 3시 방향으로 스무 걸음만 걸어가면 큰 야자수에 매어져 있는 게 보일 겁니다.”
“좋아, 두 번째! 네놈이 불렀다는 놈들은 지금 어디에 짱 박혀 있어?”
“마, 마그베티 마을에……. 이 길로 100미터 정도만 더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 전 폐가가 하나 보이는데 지금 거기에 다들 모여 있을 겁니다.”
“네놈 말이 전부 거짓이면?”
“그땐 주, 죽여도 좋습니다.”
“그래, 믿어 주지. 성실하게 대답을 잘해줬으니까 나도 약속을 지킬 거고.”
순간 지태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웃음기를 지워내더니,
빡, 빠악!
룬카야의 관자놀이를 중지를 곧추세워 빠르고도 세차게 쿡쿡 찍어버렸다.
놈은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었다.
맞는 순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무 세게 때렸나? 여하튼 난 약속은 지켰다. 적어도 네놈의 목구멍을 뚫진 않았으니까!”
지태는 땅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놈의 몸뚱이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동정할 가치도 없는 놈이다.
조금 전 저네들끼리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놈들은 강도짓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총기까지 사용해 강도짓을 할 정도면 놈들이 비단 돈과 재물만 빼앗는데 그치진 않았을 거다.
자신들의 소행과 흔적을 지우기 위해 피해자의 생명까지 앗아갔을 게 분명했다.
암튼 운이 좋아 살아난다면 놈에겐 천운일 것이고 그게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는 놈이니까.
이제는 바르카의 처리만 남았다.
지태가 몸을 돌려 놈에게 다가서려할 때였다.
“한!”
뒤에서 잔뜩 톤을 낮춘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지태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그새를 못 참고!’
지태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털며 돌아보았다.
빠르게 다가온 캐서린이 지태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한의 느낌이 맞았던 거예요?”
자신을 혼자 남겨두고 두 놈의 뒤를 밟기 전에 지태는 놈들의 수상함을 지적했었다.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했다.
“동료들을 불러 우리한테 강도짓을 하려고 했어요, 이 새끼들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가만히 멍 때리고 있었다면 우린 이 근처 어딘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혔겠지……. 근데 여긴 왜 온 거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깐.”
“너무 무서웠어요.”
“그건 됐고, 가만히 있어 봐요. 또 한 놈을 마저 처리해야 하니까.”
“죽일 건가요?”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만, 여의치 않다면 어쩔 수 없겠지.”
살려두면 후환이 생길 거다.
앙심을 품고 이대로 군인들한테 달려가 모든 것을 다 불어버릴 수 있다.
지태는 바르카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놈은 벌써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는데 하는 짓을 보니 아직 기절한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었다.
지태가 녀석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 의식이 없을 때 목을 따는 게 너도 좋을 거야. 고통 없이 뒈질 테니까. 안 그래, 바르카?”
순간 놈은 언제 기절했었냐는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용서를 빌었다.
“자, 잘못했어요, 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제발!”
“그러게 왜 죽을 짓을 했어?”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한데 룬카야가 어찌나 꼬셔 대던지…….”
“황천길로 떠난 놈한테 독박을 씌우시겠다?”
“저, 정말입니다, 한!”
“처음부터 네놈 눈빛이 별로 맘에 안 들었어. 이 나라에 온 순간부터 나를 속이고 또 속였던 어떤 새끼하고 눈빛이 아주 많이 닮아 있었거든.”
지태는 둠부캉의 눈빛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내가 어디서 결정적으로 네놈들을 의심했는지 아냐?”
“……?”
“아까 카누를 빌리려 간다고 할 때 네놈이 먼저 설쳤어. 카누 주인 놈이 워낙 독한 놈이라 집에만 보관을 한다느니, 돈 몇 푼을 쥐어줘야 한다느니! 네놈이 농장 오두막에서 안 그랬어? 카누를 가지고 있다는 놈은 룬카야 놈이 잘 아는 지인이라고. 근데 네놈이 먼저 설레발치는 게 아주 수상했거든! 근데…….”
지태는 말꼬리를 잠시 흐리며 돌연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놈의 턱 아래 부위를 강하게 죄였다.
소위 독고(獨古)라 부르는 급소.
그러고는 지태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데 말이지. 몰래 뒤따라오면서 네놈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까 아주 가관도 아니더구먼, 이 상놈의 새끼!”
바르카가 입을 반쯤 떡 벌린 채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이제 솔직히 말해! 카누가 확실히 있긴 있는 거지?”
“케, 켁! 아까 차 세워 둔 곳 그, 근처에 있습니다. 사, 살려…….”
“혀 내밀어!”
“옛?”
“혀 내밀라고, 이 새꺄!”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눈을 독하게 뜨고 부라리니 일단 따를 수밖에.
바르카가 혀를 길게 내미는 순간이었다.
따악!
지태가 놈의 아래턱을 세차게 가격했다.
혓바닥이 단번에 톡 잘려나갔는지 바르카는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태는 아까 룬카야에게 그랬듯 바르카에게도 똑같은 방식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빡, 빠악!
관자놀이를 두어 대 얻어맞은 바르카는 이내 잠잠해졌다.
“주, 죽었나요?”
캐서린이 놀란 듯 물어 왔다.
지태는 ‘아마도!’라고 하듯 어깨를 잠깐 으쓱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