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마지막 고비(4)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던 바카르가 입을 열었다.
“자전거 한 대를 얻어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거 별로 좋은 방법 같진 않아 보입니다. 국경을 넘기 위해선 강 하나를 더 건너야 하는데…….”
“압니다. 그렛 스카시스 강 말이죠?”
바카르는 지태가 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것에 놀라며 짐짓 의외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잘 아시는군요. 그렇다면 설마 자전거를 타고 당당하게 건너갈 건가요?”
그렛 스카시스 강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바카르는 그 다리를 자전거로 건너갈 것이냐고 새삼스럽게 묻고 있다.
고개를 갸웃하던 지태는 뒤늦게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자신이 순간 깜빡 놓친 게 있었다.
지태가 쓰게 웃었다.
“그렇군요. 다리는 군인들이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목진지라 여겨서 경계를 최고수준으로 하고 있을 텐데 잠깐 망각했어요.”
바카르의 말마따나 자전거로 이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강을 건널 다른 수단을 생각해봐야한다는 건데…….
“부탁을 수정해야겠군요. 자전거 대신 배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헛.”
바카르는 난감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켰다.
그러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곧 정색했다.
“나는 몰라도 도움을 줄만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친… 구라고요?”
“예. 나처럼 이 지역 자경단 소속인데 그 친구가 이 근방에선 발이 아주 넓습니다. 그 친구라면 만족스러운 방법을 찾아낼 것도 같습니다만…….”
이번에는 지태가 난색을 표했다.
되도록 소리 소문 없이 국경을 넘고 싶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또 소개시키겠다니 선뜻 내키질 않는다.
위험을 감수하기엔 바카르는 아직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고…….
지태가 입술을 꾹 다문 채 깊은 콧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바카르가 약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다는 눈빛.
“내 지인을 부르는 게 부담스럽다면 그냥 헤엄쳐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강폭이 가장 좁은 곳은 약 80미터 정도밖엔 안 되니까요.”
지태가 흘깃 바카르를 쳐다보았다.
왠지 냉소가 섞여 있는 뉘앙스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솔직히 혼자의 몸이라면 그 방법도 나쁘지는 않았다.
UDT시절에도 전투수영으로 꽤나 날리던 몸이었으니까.
지금도 5km 정도는 거뜬히 바다를 헤엄쳐 갈 수가 있다.
문제는 혼자가 아니라 캐서린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지태가 입술에 쓴 미소를 문 채 말했다.
“바카르가 몰라서 하는 말 같은데 내가 대한민국 해군특수전전단 출신이오. 웬만한 수영선수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지. 그렛 스카시스 강폭 정도는 열 번이라도 왕복할 수가 있소. 하지만…….”
지태는 말꼬리를 흐리며 캐서린을 돌아보았다.
바카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식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딱 봐도 지태는 단단해보였다.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지인을 부르지 말라고 한다면 이제 어쩔 셈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하아, 그러게 말이다.
고민스럽다.
지태는 딴청 피우듯 바카르의 시선을 잠시 외면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곧 마음을 정했다.
하는 수 없다, 모험을 해볼 수밖에.
“바카르!”
“예.”
“그 지인이라는 사람은 신뢰할 수가 있습니까?”
“미스터 한이 생각할 때 난 어떻습니까? 믿을 수 있습니까?”
바카르가 오히려 되물었다.
“서운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반반이오. 이건 바카르가 내 입장이 됐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믿는다고 단언하는 것보단 훨씬 정직한 대답이군요. 우선은 그 반만 믿고 내 말대로 하세요. 나머지 반은 미스터 한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채우도록 하시고.”
지태는 현명한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신 말이오, 만에 하나 바카르가 다른 맘을 품는 게 보인다면 난 다시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땐 미스터 한이 그렇게 나와도 나로선 할 말이 없지요.”
바카르가 사람 좋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잠시 얼굴을 들여다보던 지태는 이쯤에서 그에게 당근을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아무래도 더욱 더 진심을 담아 적극적으로 도와줄 테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지도 않을 것이고.
“바카르!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는 건 아니지만, 나도 성의 표시를 하고 싶군요. 우리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준다면 내가 감사의 뜻으로 천 달러를 드리겠소. 물론 도움을 청할 그 지인에게도 똑같은 보상을 약속하지요.”
“어허, 사례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을!”
바카르는 그런 걸 바라고 돕는 것이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입가에 걸린 웃음은 그 손짓과는 사뭇 달랐다.
보상에 대한 기대심리가 입가에 잔뜩 묻어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도와줄 친구를 부르러 갈 텐데, 어쩌시겠습니까?”
자신을 따라 마을에 함께 가겠느냐고 묻고 있다.
지태는 흘깃 캐서린을 돌아보고는 다시 바카르를 쳐다보았다.
“혹시 이 시간에 여길 찾아올 사람은 없는 거죠?”
“벌써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데… 당연히 없습니다.”
확인을 받은 지태가 캐서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캐서린,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혼자는 무서운데…….”
그럼 어쩌라고?
지태가 고민스럽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은 떼를 쓸 때가 아냐, 캐서린.
그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데려가고 싶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요. 그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요, 캐서린.”
캐서린은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포기하는 눈치였다.
“대신 빨리 와야 해요. 약속할 수 있죠?”
“예, 최대한 빨리!”
지태는 캐서린을 겨우 다독여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카르가 앞장섰고, 지태는 다시 베레타를 빼어든 채 수색대 병사처럼 주변을 살피며 그 뒤를 따랐다.
다행히 폭우의 기세는 이제 완전히 꺾여 있었다.
우동 면발처럼 굵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어느새 보슬비로 변해 있어서 마치 자욱한 밤안개를 연상케 했다.
바르카는 지름길을 골라 최대한 거리를 단축하며 지태를 안내했다.
조심스럽게 약 10분쯤 더 걸었을 때였다.
바카르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한! 저기가 우리 집입니다. 내 친구 집은 저쪽이고요.”
그가 가리킨 곳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바카르는 자신의 집을 기점으로 우측에 있는 골목길을 타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다가,
“자, 잠깐만!”
정신없이 내달리던 바카르가 돌연 손을 들어 지태로 하여금 제자리에 서게 했다.
“어서, 이쪽으로!”
다급한 목소리에 지태는 이유를 묻지 않고 바카르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제야 골목을 밟아 오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왔다.
저쪽 건너편에서 자동소총을 불량스럽게 어깨에 들쳐 메고 건들건들 지나가는 병사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바카르가 다시 손짓을 했다.
어지럽게 골목과 골목 사이로만 지태를 이끌던 바카르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춘 곳은 모스크가 저 멀리 정면으로 보이는 어느 2층 벽돌담 집이었다.
“저기 2층이 룬카야의 집입니다.”
“……?”
“내 친구의 이름입니다, 룬카야.”
이름 따위가 중요한 건 아니다.
지태가 건성으로 끄덕이자 바카르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잠들었을지도 모르는데 불쑥 찾아가면 시끄러울 수도 있겠네요. 내가 먼저 들어가서 이 상황을 설명하고 미스터 한을 집안으로 불렀으면 하는데…….”
순간 지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웬 수작이지?’
이 녀석이 지금 무슨 꼼수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에 지태는 바카르를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의심스럽습니까, 한?”
바카르가 실망했다는 듯 금세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이 나라에 온 뒤로 한두 번 속아 봤어야 믿음이라는 게 생기지, 인마.’
지태는 속으로 구시렁대는 한편 눈으로는 계속 바카르를 살폈다.
“입장을 바꿔 바카르가 내 처지라도 이러지 않겠습니까?”
그게 옳은 소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바카르가 싸늘하게 변해가던 표정에 다시금 온기를 불어넣으며 얕게 웃었다.
그러고는 지태의 손등을 가만히 쥐었다가 놓았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미스터 한이 현재 믿을 구석이라고는 나밖엔 없잖습니까.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믿어보세요.”
여전히 바카르에게 시선을 맞춰둔 채 지태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카르. 미안합니다. 어서 가 봐요. 친구 분을 최대한 잘 설득시키시고!”
바카르도 눈을 떼지 않고 고개를 한번 굳건하게 끄덕여준 다음 활짝 열려있는 대문 너머로 뛰어갔다.
지태는 주변을 꼼꼼하게 훑은 뒤 담벼락에 세워져 있던 낡은 승합차 뒤편으로 몸을 감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초조함이 극에 달해갈 즈음 2층집 마당에서 마침내 인기척이 들려왔다.
바카르가 지인이라는 룬카야를 잘 설득한 모양이다.
눈앞에 보이는 그림자는 둘이었다.
“한! 내가 말한 룬카얍니다.”
바르카의 소개에 마음이 급한 지태는 그와 바쁘게 악수를 나눴다.
“한이라고 합니다. 감사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지태는 자신이 왔던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혼자 남아 잔뜩 불안해하고 있을 캐서린이 염려되었다.
룬카야가 믿음을 주겠다는 의지를 담아 애써 포근하게 웃었다.
“미스터 한! 갈 땐 이걸로 이동하지요.”
그는 지금껏 지태가 몸을 숨기고 있던 낡은 승합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쳐보였다.
룬카야의 소유였나 보다.
승합차에 올라타자 룬카야는 거적처럼 생긴 포장 천막을 가리켰다.
그 안에 숨어있으라는 것 같았다.
포장천막을 들춰 보니 농기구와 기타 잡다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다.
룬카야가 서두르라는 듯 고개를 빠르게 까닥거렸다.
지태가 천막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승합차는 힘겹게 숨 토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경운기처럼 털털거리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농원에 도착한 다음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태는 캐서린부터 찾았다.
한데 그녀는 오두막에 없었다.
지태가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오두막 뒷문 쪽에서 그제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을 위해 숨어 있었던 듯했다.
캐서린은 반가운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며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한! 나 혼자 있는 동안 너무 무서웠어요.”
달려와 안기는 그녀의 등을 달래듯 다독이다가 지태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날렸다.
“마음 같아선 뜨거운 재회의 시간을 잠시 내드리고 싶지만, 때가 때이니 만큼…….”
바르카가 키득키득 웃었다.
지태는 캐서린을 떼어 내고 두 사람과 머리를 맞댔다.
룬카야는 강 근처 마그베티라는 마을에 가면 물고기를 잡을 때 이용하는 카누가 있다고 했다.
그것을 절친한 지인에게 잠시 빌리면 된다고 했다.
이제 따지고 말 것도 없었다.
지태는 두 사람의 뜻대로 하라며 모든 것을 일임했다.
“감사합니다, 두 분!”
“그 인사는 나중에 강을 건너기 전 받아도 됩니다.”
바르카가 주름 가득한 얼굴로 히죽 웃었다.
지태는 따라 웃어 주다가 문득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래도 나는 감사를 먼저 표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바르카에게 먼저 백 달러짜리 지폐 열 장을 건넸다.
룬카야가 그다음에 돈을 받아 제 주머니에 넣고는 엄지 척을 해보였다.
1인당 GNP가 800달러를 넘기지 못하는 이 나라에서 1천 달러라면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살림에 큰 보탬이 될 거 같습니다. 잘 쓸게요. 자, 그럼!”
룬카야가 만족스럽게 웃고는 어서 가자고 서둘렀다.
차에 오른 지태가 다시 또 캐서린과 더불어 포장 천막을 뒤집어쓰려고 하자 룬카야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