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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75화 (75/272)

075화. 마지막 고비(3)

어쨌든 캐서린을 안전하게 데리고 이 나라를 벗어나는 일은 온전히 지태의 몫이다.

지태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베레타를 빼드는 사이 캐서린은 지금껏 들고 있던 양산을 땅에 버렸다.

비를 좀 맞는다고 당장 얼어 죽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자신이 현재 지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가 거추장스럽다고 느끼지 않도록 보조를 맞춰 주는 것뿐이다.

흘깃 돌아보며 캐서린의 의지를 확인한 지태가 순간 피식 웃긴 했지만, 속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태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 잡아요, 캐서린.”

“고마워요, 한!”

캐서린이 감사의 표시로 옅은 미소를 그려주었다.

지태는 군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제는 도로 갓길을 벗어나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을 택해 북쪽으로 걸어갔다.

그렇다고 도로에서 완전히 멀어지진 않았다.

자칫 이 낯선 오지에서 길을 잃을까봐 도로를 이정표 삼아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쯤 그렇게 또 걸었을까.

폭우로 인해 더욱 짙은 어둠을 뿜어내는 저 너머로 군락을 이룬 조그만 소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한국으로 치면 시골의 읍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곳이다.

소읍의 불빛을 보며 지태는 잠시 망설였다.

도보로만 국경에 다다르기에는 그 길이 너무도 멀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이다.

이미 비상령까지 발동되어 군에서 수색에 나선 판국.

강화된 저들의 경계선을 뚫고 신속히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이대로는 안 되었다.

더구나 이미 지쳐 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캐서린과 함께였다.

뭔가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캐서린! 마을에 가서 뭔가 타고 갈 것을 구해 봅시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단 시도라도 해보죠. 마을에 군인들이 너무 많다 싶으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고.”

“차를 구하게요?”

캐서린의 물음에 지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토바이나 자동차처럼 소리 요란한 탈 것은 안 돼요. 자전거였음 딱 좋겠는데, 굴러갈 정도만 되더라도…….”

지태는 희망사항을 읊조리며 다시 길을 잡아 나갔다.

마을 쪽으로 접근할수록 지태는 더욱 긴장했다.

군인들이 어느 곳에 매복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최대한 낮춘 뒤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아직 이 근처까진 군인들을 배치하지 않은 것 같…….”

군인들이 보이지 않자 조금은 안심한 캐서린이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지태가 돌연 그녀의 입을 막았다.

“쉿!”

캐서린이 깜짝 놀라 입을 닫은 채 지태의 옆으로 몸을 가까이 붙여 왔다.

그러자 지태가 어느 한 곳을 검지로 가리켰다.

빗소리에 인기척을 못 들었는데 다행히 군인들이 피워대는 담뱃불 때문에 매복 지점이 드러났다.

경계의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망각한 놈들이지만, 두 사람에겐 그저 고맙고 천만다행이라 여길 판이었다.

소도시 주변으로 몇 군데의 매복지가 있을지는 차마 가늠하기가 어렵다.

지태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무래도 탈 것을 구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여기서 포기해야만 할 듯싶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니까.

지태는 다시 암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그건 분명 나뭇가지가 뭔가에 밟혀서 내는 소리였다.

동물인가, 사람인가.

지태가 본능적으로 뒤돌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잽싸게 베레타를 겨눴다.

그리고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물었다.

물론 영어로 내뱉은 말이었다.

“누, 누구야?”

“지, 진정하시오. 난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이윽고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이미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공격 의사라든가 악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 같았다.

“신두구에 사는 주민이오. 저기 보이는 마을…….”

사내 역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지태의 등 뒤로 보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지태는 손짓으로 캐서린에게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내놓고 천천히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베레타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은 언제든 당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난 농사를 짓는 사람입니다, 망고농사!”

“근데 여긴 무슨 일로 나온 거요?”

지태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나지막이 물었다.

“밤비가 너무 많이 와서 농원에 물길을 내주러 나온 겁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사내는 나무 뒤에 세워둔 자신의 삽과 곡괭이를 가리켰다.

지태는 일단 이 사내가 군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심이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 사람을 어찌 처리해야 하나 싶은 고민.

이대로 보내준다면 분명 마을에 들어가는 즉시 신고를 할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답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딱 하나.

어쩔 수 없다, 죽여서라도 입을 막을 수밖에.

지태는 소리 없이 깊은 숨을 내뱉고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태의 분위기에서 어떤 아찔한 생각을 읽은 것일까.

흑인 사내가 일순 딱딱하게 굳어갔다.

“시, 신고 안 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 순간 지태가 입술을 비틀었다.

역시나 자신들이 쫓기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다.

지금껏 농원에서 물길을 터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면 이즈음 발동된 비상령을 어찌 알았으며 군인들이 매복을 서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찌 알았겠는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네?”

“우리가 쫓기는 처지라는 거 말이야.”

“그, 그건…….”

철컥.

지태는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켰다.

그렇다고 총을 발사할 생각은 없었다.

만일 그랬다간 인근에 있는 모든 군인들을 전부 불러들이는 악수를 두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처리하더라도 맨손으로 할 것이지만, 우선은 사내를 옴짝달싹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권총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럴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마, 말하겠습니다. 실은 내가 마을 자경단의 멤버입니다. 예전부터 이 지역은 워낙 강도가 자주 출몰할 뿐더러 치안 상태도 좋지 않은 곳이라서 우리끼리라도 서로 지키자는 의미로 조직한 겁니다.”

“그런데?”

“그래서 마을 밖으로 나갈 땐 언제나 이걸 가지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사내는 귀에 끼고 있던 무전기의 리시버를 빼어 보여주었다.

그걸로 마을 안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자경단 동료로부터 들었다는 거다.

하, 말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보내선 안 되지.

지태가 말없이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자 사내가 움찔하며 뒤로 그만큼 물러났다.

그러고는 재빨리 말했다.

“우선 피할 곳이 있습니다. 내가 그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참으로 영악한 사내였다.

지태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사내가 귀에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피할 곳이라니?”

“우리 망고 농원은 안전합니다. 거기엔 일하다가 잠시 햇볕을 피하기 위한 오두막도 갖춰져 있고요.”

사내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독한 마음을 품고 있던 지태의 결심이 흔들렸다.

“그곳이 멉니까?”

“여기서 약 500미터쯤 가면 됩니다.”

“좋아요. 일단 그쪽으로 가봅시다.”

지태는 사내의 한쪽 팔을 붙들어 몸에 바싹 붙인 다음 캐서린을 손짓으로 불렀다.

현 지점에서 서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숲을 헤치고 어느 정도 걸어가자 사내의 말대로 제법 넓게 조성된 농원이 나왔다.

만일 혼자 짓는 과수농사라면 그 규모가 대단하다고 할 만큼이었다.

“엄청 부자로군요. 이 넓은 농원을 소유할 정도면.”

지태가 사내의 경계심을 풀어 주기 위해 짐짓 감탄사를 섞어 말했다.

“허헛. 이게 전부 내 것이라면 당연히 부자소리를 듣겠지만 사실은 협동농장입니다. 일곱 명이 함께 가꾸어가는!”

“아하!”

지태가 약간은 머쓱한 표정으로 끄덕이자 사내가 따라오라고 말했다.

“자, 이쪽으로!”

사내가 말하길 햇빛이나 피하는 정도의 오두막이라고 했지만, 규모는 그 이상이었다.

간단한 음식쯤은 즉석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나름 주방도 갖춰져 있었고, 야전 침대도 두 개씩이나 놓여 있었다.

일을 하다가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갖다 놓은 것 같았다.

“우선 숙녀 분의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다지 안 좋아 보이는데 자칫 큰일 납니다.”

다른 옷가지들은 몰라도 당장 갈아입을 속옷 한 벌과 티 두 개는 작은 캐리어에 옮겨 담아온 상태였다.

사내의 배려에 캐서린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저, 그런데… 성함이?”

“예, 바카르 타라왈리라고 합니다. 편하게 바카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바카르! 난 캐서린이에요.”

“아, 미스 캐서린!”

“그냥 캐서린이라 불러 주세요. 참, 신세를 지는 김에 마실 물도 좀 부탁할까요?”

캐서린의 애교 어린 목소리에 바카르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바카르는 곧 바람처럼 주방으로 달려가 작은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한가득 떠왔다.

캐서린이 받아서 마시려다 말고 흘깃 지태를 돌아보았다.

물바가지를 살짝 들어 보인다.

난 괜찮으니 먼저 마시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캐서린은 이내 벌컥벌컥 마셔댔다.

목마름 때문이라기보다는 긴장감 때문에 꽤나 목이 탔던 모양이다.

캐서린은 양껏 마신 물바가지를 지태에게 넘겨주고 오두막 한쪽에 칸막이로 가려진 곳으로 갈아입을 옷을 들고서 걸어갔다.

그곳은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 같았다.

“잘 마셨습니다.”

지태는 바카르에게 바가지를 건네주며 그제야 새삼스런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간 살아왔던 삶이 고단했던 듯 바카르의 얼굴은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름이 쪼글쪼글한 것으로 보아 최하 60대 초반은 되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 내가 좀 늙어 보이죠? 사실은 아직 많이 젊습니다. 올해로 꼭 마흔이 됐습니다.”

헐!

지태는 차마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놀랐다.

저 얼굴이 겨우 마흔밖엔 안 된 얼굴이라니.

“아, 참! 나도 인사가 늦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한지태라고 합니다. 한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아, 한!”

이름을 되뇌는 바카르를 보면서 지태가 옅게 웃었다.

그때 바카르가 물었다.

“참, 식사는 하셨습니까?”

사실 피자와 햄버거로 대충 저녁을 때우긴 했지만, 극도의 긴장감 때문인지 이미 칼로리를 다 소모해버린 터였다.

지태는 마침 출출하던 차에 잘 됐다는 듯 바카르의 의중에 부합하는 주문을 했다.

“요기할 게 있다면 좀 부탁합니다.”

“딱딱하게 굳긴 했지만 먹고 남은 빵이 몇 조각 있을 겁니다. 망고는 얼마든지 있고요.”

지금 상황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지태가 반갑게 끄덕이자 바카르는 다시 달려가 낡은 나무쟁반에 빵과 망고를 몇 개 담아 왔다.

“어머, 망고!”

어느새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캐서린이 망고 하나를 집어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가 과도를 들어 망고 껍질을 깎아 나가는 사이 바카르가 지태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을 묻는 게 실례가 될까요?”

“왜 쫓기느냐, 그거 말입니까?”

선수를 치며 나오는 지태를 보며 속내를 들킨 듯 바카르가 히죽 웃었다.

불빛이 새어 나갈까 봐 전등 대신 촛불 하나만 켜둔 탓에 바카르의 피부색은 더욱 검어 보였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치아가 그래서 더욱 더 희뜩하게 번질거렸다.

“우리가 누명을 좀 썼어요. 안 좋은 일에 휘말려서. 오해가 벗겨질 때까지 좀 피해 있으려고 도망쳐 나온 길입니다.”

“혹시 치정과 관련된 그런 오해인가요?”

그러면서 바카르는 힐끔 캐서린을 돌아보았는데, 그녀가 미인인 까닭에 삼각관계에서 파생된 막장드라마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이렇다 저렇다 깊게 설명하기가 싫어서 지태는 멋쩍게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바카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사례는 충분히 할 테니까 자전거를 한 대 빌렸음 합니다.”

“자전거를 말입니까? 어디까지 가시려고요?”

“실은 국경을 넘을 생각입니다.”

“국경, 그럼 혹시 기니로…?”

지태는 눈을 깊게 마주친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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