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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74화 (74/272)

074화. 마지막 고비(2)

사실 프리타운을 벗어나면서부터 배터리 표시등이 조금 불안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제 드러내 놓고 널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너레이터가 맛이 간 것 같았다.

“젠장!”

지태가 낭패감에 젖어 한국어를 내뱉자 캐서린이 돌아보았다.

표정만으로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어서 캐서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지태는 한숨을 내쉬며 한손으로 계기판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제너레이터가 맛이 간 모양이에요. 금방 차가 멈춰 설 것 같은데…….”

이제는 빗물을 열심히 훔쳐 내던 와이퍼마저 그 힘을 서서히 잃어 가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졸음에 겨워 억지로 부채질을 해대는 아이처럼 느릿느릿 휘저어지던 와이퍼가 어느 순간 딱 하고 멈춰 서버렸다.

그와 함께 SUV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충전되지 못한 배터리가 이제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머지않아 엔진이 멈춰 버릴 것이 자명했으므로 지태는 갓길 쪽에 바싹 다가간 다음 차를 세웠다.

푸시시시식.

그리고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시동은 자동으로 꺼지고 말았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라이트마저 꺼져 온통 다 암흑천지로 변해버린 차 안에서 지태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젠장, 젠장!”

“하늘도, 차도 우릴 전혀 도와주질 않는 거 같네요.”

캐서린도 금세 전염된 듯 한숨처럼 푸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이제 어쩌죠?”

그러게, 이제 어쩐다?

지태는 막연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캐서린의 모습은 짙은 어둠 속에서 실루엣만 간신히 시선에 잡혀 들어왔다.

“메인지를 지났으니 기니 국경까진 약 40킬로 정도 남았는데…….”

지태가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이 거센 폭우를 뚫고 밤새 걷는다 해도 날이 밝을 때까지 국경 근처에 다다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D.S.U나 둠부캉의 추격이 없다는 최선의 상황을 가정했을 경우에도 그러할진대 만약 또 다른 변수가 생긴다면 더더욱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더구나 혼자라면 모르되 캐서린까지 보살피며 힘겹게 가야할 길이었다.

이리저리 난감한 상황이었다.

“후우~”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과 함께 지태는 다시 캐서린을 돌아보았다.

“일단 걸어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지태가 묻자 캐서린이 어둠 속에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걷는 건 내가 좀 자신 있어요.”

“그래요, 그럼. 일단은 최대한 걷는 데까지라도 한번 걸어가 보십시다.”

지태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망치기에도 바쁜데 언제 퍼부어댈지 모를 폭우까지 대비했을 리가 없다.

차안에는 우의는커녕 우산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멍하니 굵은 비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원망하듯 쳐다보고 있는데 캐서린이 멋쩍은 음성으로 말했다.

“양산이 하나 있을 거예요.”

캐서린은 곧 차의 뒷문을 열고 자신의 캐리어를 뒤졌다.

그러더니 얼굴 하나를 겨우 가릴 것 같은 핑크빛 양산을 꺼내왔다.

“허헛, 참!”

지태는 그 와중에도 어이가 없는지라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캐서린!”

잠시 소리 없이 낮은 한숨을 내뱉은 다음 지태가 불렀다.

“네?”

지태는 턱짓으로 캐리어들을 가리켰다.

“그거 두 개를 다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물건만 따로 작은 캐리어에 옮겨 담도록 해요.”

지태를 망연히 바라보던 캐서린은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는다고 여겼던지 가장 중요한 다이아 원석들과 몇 가지 귀중품들을 챙겨 작은 캐리어로 옮겨 담기 시작했다.

“주세요.”

지태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거부감 없이 작은 캐리어를 내주었다.

“어서 갑시다, 캐서린.”

지태가 도로 갓길을 따라 먼저 앞장을 서자 캐서린이 뒤따랐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캐서린이 바짝 다가와 붙었다.

돌아보니 자기 혼자 쓰기에도 작디작은 양산을 지태 쪽으로 내밀었다.

지태가 쓰게 웃었다.

“난 괜찮으니까 캐서린의 머리라도 가려요.”

지태가 가만히 밀쳐내자 캐서린은 재차 권할 마음은 없는 듯 양산을 조용히 거두어 갔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용도여서 방수 기능은 전혀 없었다.

금세 물기를 먹은 양산에서 낙숫물 떨어지듯 빗물이 새어나왔다.

한참을 걷던 지태가 무심코 뒤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차라도 있으면 얻어 탈 생각이었는데, 야심한 밤이고 국경 부근이라 그런지 오가는 차량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쩝 소리가 나게 입맛을 다신 지태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터벅터벅 앞을 향해 걸어갔다.

암담한 너희들의 현실을 자각하라는 듯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빗방울이 두 사람의 눈을 자꾸만 찔러댔다.

* * *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너, 죽고 싶어?”

D.S.U 팀장이 우락부락한 두 눈을 퍼뜩 치켜떴다.

쾌속정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황당하기는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벤자민이 시선을 피해가며 얼른 고개를 떨궜다.

선라이징호에서 붙들려 나왔을 때 벤자민은 별 거부감 없이 제가 아는 선에서 모든 것을 다 솔직하게 털어놓았었다.

이만큼 시간을 끌어 줬으면 제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했던 벤자민이었다.

맥 브라운으로부터 약속된 보수를 이미 다 받아낸 마당에 굳이 제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의리를 지켜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플랜B의 내용을 D.S.U 팀장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맥 브라운이 룽기 항에서 쾌속정을 이용해 기니로 탈출을 꾀하려고 한다는 것까지도.

그들은 곧 헬기를 이용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니와 인접한 바다를 힘차게 달려 나가고 있던 쾌속정을 덮치는데 성공했다.

한데 쾌속정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쾌속정을 운전하던 녀석은 영문을 몰라 하며 오히려 왜 그러는 것이냐고 D.S.U 팀장에게 되물었다.

자신은 신분을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백인 사내에게 돈을 받고 그가 시키는 대로 기니 방향으로 배를 몰고 나왔을 뿐이라는 거였다.

기니까지 넘어갈 것도 없이 근처만 한 바퀴 돌다가 와주면 그만이라는 말에 이게 웬 횡재냐고 속으로 기뻐했다고도 했다.

그 직후 D.S.U 팀장은 이렇듯 화를 내고 있는 거다.

자신을 속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벤자민은 억울했다.

이 플랜B 말고는 더 이상 자신이 아는 것은 없었으니까.

그때 D.S.U 팀장이 권총의 노리쇠를 거칠게 후퇴 전진시키더니 벤자민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너 이 새끼, 당장 불어! 이번에도 장난쳤다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가리에 구멍을 내줄 테니까!”

“정말 여기까집니다. 나도 속았단 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어, 그래? 그럼 넌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거지? 그니까 뒈져도 별로 억울하진 않겠네?”

독하게 두 눈을 치켜뜬 팀장의 표정을 보는 순간 벤자민은 이제 진짜 죽겠구나 싶었다.

비에 홀딱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벤자민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잘 가라, 이 새끼야!”

팀장이 표독스럽게 내뱉었다.

그 순간 벤자민의 머릿속으로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알 것 같습니다.”

“뭘?”

“방금 생각났는데, 어쩌면 바닷길 말고 육로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날 미끼로 삼아 바다로 시선을 돌리게 한 다음 정작 그 새끼는 육로를 이용해 탈출하려고 한 것 같아요!”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 같았다.

팀장은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던 권총을 거두며 일단 벤자민의 숨통을 터주었다.

“다른 거 또 없어?”

“아, 있습니다, 있어요! 초저녁 무렵에 시간을 좀 끌어 달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제 생각해 보니까 그 시발 놈이 육지로 도망치려는 시간을 벌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벤자민은 그 자신도 속은 것이 분하고 억울하다는 듯 지금 제가 처한 상황도 망각한 채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맥 브라운, 이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개새끼!”

그 모습을 조소로 지켜보던 D.S.U 팀장이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팀원 한 명을 돌아보았다.

“야, 당장 무전 때려! 전군에 비상 발동하고, 특히 기니 쪽으로 향하는 길목이란 길목은 모두 다 막아 놓으라고 해. 당장!”

팀장이 거칠게 내뱉고는 이번에는 바다 쪽을 향해 침을 퉤 뱉었다.

* * *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굵게 쏟아지던 폭우는 아까보다 조금은 잦아졌어도 아직은 그 기세가 여전히 등등했다.

차를 길가에 버리고 걸어온 지 약 한 시간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걷는 것쯤은 자신 있다고 말했던 캐서린은 자꾸만 뒤처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지태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면서도 쓰나마나한 양산은 그래도 꼭 붙들고 있는 캐서린이었다.

양산을 뚫고 새어 들어온 빗물 때문에 어느덧 흠뻑 젖은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마며 뺨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어 더더욱 연민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한.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요.”

“그래요, 그럽시다.”

마땅히 앉아서 쉴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가 조금이라도 덜 떨어지는 곳이라면 그녀의 지친 다리를 잠시라도 쉬게 해주고 싶었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저만치에 우뚝 서있는 야자수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지태는 갓길 너머 야자수 아래로 캐서린을 이끌었다.

정신없이 지태의 뒤를 따르며 걸을 땐 몰랐는데 막상 야자수 아래에서 비를 피하다 보니 그제야 긴장감이 풀렸나 보다.

캐서린은 추위가 느껴지는 듯 양팔로 제 가슴께를 한껏 부여안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고 싶지만 작은 캐리어로 짐을 대충 옮기면서 옷가지는 거의 다 버려두고 온 상태였다.

마땅히 몸을 덥혀줄 만한 것이 없었다.

“못 견디겠어요?”

“괘, 괜찮아요. 겨, 견딜 만해요.”

말만 들어도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이대로 두면 자칫 저체온증으로 먼저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리 와요, 캐서린.”

지태가 한걸음 바짝 다가서며 자신의 양팔을 활짝 벌렸다.

캐서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지태의 품에 안겼다.

그대로 조금 있으려니 서로의 체온에서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이전보다는 훨씬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덥혀지자 이번엔 캐서린의 몸을 돌려 그녀의 등 뒤에서 꼭 안아 주었다.

“고마워요, 한! 당신은 가슴이 참으로 넓고 따뜻한 거 같아.”

“…….”

“참, 결혼했어요?”

“아직!”

“그럼 여친은?”

“…….”

대답을 미루자 캐서린이 고개를 돌렸다.

지태는 그녀의 머리를 원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있어요, 한국에! 지금쯤 언제 귀국을 하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분 예뻐요?”

“아마도 캐서린만큼!”

“어머, 그럼 엄청 예쁘다는 소리네?”

캐서린은 제 말 끝에 멋쩍은 듯 까르르 웃었다.

그러더니 곧 웃음기를 지우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한! 저기 좀 봐요. 자동차 라이트예요. 어쩜 지금껏 한 대도 안 보이다가 웬일이래? 연달아 몇 대가 오고 있는데요!”

지태는 캐서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여러 대의 차량이 줄지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우리 저 중에서 하나를 잡기로 해요. 히치하이킹은 내게 맡겨요. 이 섹시한 몸매로 유혹해 볼 테…….”

“쉿!”

지태는 재빠르게 캐서린의 입을 막았다.

순간 이상함을 깨달은 캐서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건 민간인 차량이 아닙니다.”

어느새 가까워진 차들의 행렬을 보며 지태가 가만히 속삭였다.

캐서린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난 차량들의 차종을 보고는 금세 오그라들었다.

위장한 픽업트럭과 닷지 트럭 등 정복군인들을 태운 차량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게 야간 훈련의 일환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군에 비상을 건 모양이오, 캐서린.”

“그럼 어쩌죠, 우리?”

캐서린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

지태가 대답 대신 말없이 한숨을 뱉어내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께를 감싸 안은 그의 손깍지를 풀어냈다.

뒤돌아서며 지태를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겠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일단은 국경 쪽에 병력이 더 집중되기 전에 움직입시다.”

굳이 불안감에 기름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지태는 긍정적인 답변을 주며 캐서린의 손목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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