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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73화 (73/272)

073화. 마지막 고비(1)

지태는 시에라리온의 전국지도에 빨간 펜으로 선을 그어놓은 길을 따라 차를 몰아갔다.

아직까지 누군가 따라붙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지금쯤 맥 브라운은 어찌 되었을까.

궁금증과 염려스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후우~”

“하아!”

지태는 문득 차 바닥이 꺼질 듯 한숨을 크게 털어냈다.

전염된 듯 캐서린 역시 그를 따라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태는 무거움을 떨쳐내기 위해 지도를 든 캐서린에게 자신들이 현재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위치를 물었다.

왕복 2차선의 고속도로를 최대한 속도를 내서 1시간가량 달린 후였다.

“바이 버 로드에서 마시아카 요니바나 하이웨이로 갈아탄 후 20분 정도를 더 왔으니까 아마도 로밧 근처일 거예요.”

“그럼 마시아카가 멀지 않았군. 마시아카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첫 번째 로켈 강의 다리가 나올 겁니다. 이제 인간 내비게이션 없이도 나 혼자 잘 찾아갈 수 있으니까 피곤하면 잠시 눈 좀 붙여요.”

말은 그리 했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가 잠을 잘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지태는 흘깃 캐서린을 돌아보고는 다시 전방에 시선을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또르르르륵, 또르르르륵.

느닷없이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캐서린이 들고 있는 클러치백에서 나는 소리였다.

도둑질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캐서린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깜빡했네요. 꺼둔다는 것이!”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그녀는 기쁜 듯이 소리쳤다.

“맥이에요, 맥!”

캐서린은 곧 통화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반갑게 외쳤다.

“맥! 지금 어디야? 괜찮은 거야?”

그가 처한 상황이 우선이었으므로 캐서린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맥 브라운의 상태부터 물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뜻밖에도 다른 사람이었다.

기분 나쁜 웃음부터 흘려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둠부캉.

캐서린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현재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지태도 이 상황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통화 모드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 이쯤 되면 어떤 상황인지 파악됐겠지, 캐서린?

“매, 맥은 어찌 됐어? 설마…?”

- 걱정 마! 총을 두어 발 맞긴 했지만 금방 뒈질 정도는 아냐. 하지만 캐서린의 선택 여하에 따라 이놈의 생사는 급변할 수도 있지.

둠부캉은 다시 한번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 바로 옆에 미스터 한 있지? 바꿔 봐!

“그냥 말해. 스피커폰으로 전환해놔서 미스터 한도 이미 다 들었으니까.”

캐서린이 매몰찬 목소리로 응수했다.

- 한! 자네가 지금 나에게 얼마나 빅 엿을 먹였는지 알고 있나?

둠부캉의 말에 지태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태는 냉소를 잔뜩 흘리며 말했다.

“그렇게 따진다면 처음부터 엿을 먹인 게 누군데 그래? 자네 아닌가?”

- 말이 그렇게 되나? 하핫! 그렇담 지금까지는 피장파장이니까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다 묻어 두기로 하지. 하지만 지금부터는 무조건 내 말에 따라야 돼. 그게 네놈의 신상에도 좋을 테니까. 어서 차를 돌려. 그리고 당장 이쪽으로 넘어와!

순간 지태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봐, 둠부캉! 내가 아주 재미있는 한국말 하나 가르쳐 줄까? 딱 이런 경우에 내뱉는 말인데.”

- ……?

“잘 들어, 둠부캉!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읊을 테니까…. 조오까!”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진 못해도 분위기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확실히 머릿속에 박힐 만큼 강렬했다.

- 너 경고했는데도 내 말을 무시하겠다? 내 호의를 무시한 대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혹시 상상해 봤나, 한?

“시끄럽고! 호의건 강아지 똥구멍이건 간에 뭔가 순서가 틀린 거 아냐? 먼저 맥이 살아 있다는 증거부터 보여 줘야지, 이 사람아!”

지태는 절망감에 휩싸인 캐서린을 돌아보며 스마트폰 가까이 대고 말했다.

- 내가 그 정도까지 자네한테 신뢰받지 못한 사람이었나?

“내뱉는 말마다 허풍에다가 거짓이었는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지태의 투덜거림에 둠부캉도 양심은 있는지 낄낄 웃었다.

- 신뢰를 회복하는 차원에서라도 당장 확인시켜줘야겠군. 기다려 봐!

스마트폰 너머로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끄응! 하고 앓는 듯한 맥 브라운의 신음성이 들려왔다.

“맥, 맥! 괜찮아?”

캐서린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제야 맥 브라운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캐서린. 괜찮아, 난! 여하튼 잘 가고 있는 거지?

“어떡해야 좋은 거야. 나 이거 다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까?”

- 그건 안 돼. 그럼 캐서린의 오랜 꿈도 함께 사라지잖아.

“그렇다 해도 맥을 잃으면서까지 내 꿈을 이루긴 싫어. 그럼 맥이 죽게 되잖아.”

- 나, CIA 요원이야. 미국의 보복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얘들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순 없어.

- (조까!)

둠부캉의 목소리가 방해전파처럼 맥 브라운의 음성 사이로 희미하지만 야멸차게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

빠악!

- 으윽!

스마트폰 너머로 맥 브라운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맥!”

캐서린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위로 마지막 힘을 다해 쥐어짜는 듯한 맥 브라운의 한마디가 던져졌다.

그건 캐서린이 아니라 지태에게 외치는 소리였다.

- 한! 그대로 쭉 달려가! 절대 이쪽으로 오면 안 돼, 윽!

다시 또 짧은 비명이 이어졌고 그것으로 맥 브라운의 목소리는 끝이었다.

대신 둠부캉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 이 새끼가 이렇게 개기는 걸 보면 아직 팔팔하다는 걸 알 수 있겠지? 그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이제는 내 말대로 따라. 알아들었나?

둠부캉이 끌끌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지태는 독하게 이를 악물었다.

“싱거운 게임은 난 별로야. 어차피 들통이 나서 도망치기도 쉽진 않을 테니까 어떠냐, 둠부캉? 우리 재밌게 숨바꼭질이나 한번 해볼까?”

- 까불지 마, 이 새끼야! 맥이 벌써 다 불었어. 지금 룽기 쪽으로 가고 있다는 거 다 알아. 좋은 말로 할 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차나 돌려, 이 새끼야!

“그럼 어디 열심히 쫓아와 보던가!”

둠부캉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과 캐서린이 현재 룽기 쪽으로 이동해 쾌속정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맥 브라운이 그런 식으로 거짓 자백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딱 봐도 정황상 그게 확실했다.

지태는 캐서린을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동시에 쳐다보았는데, 이를 어쩌면 좋겠냐고 지태의 뜻을 묻고 있는 눈치였다.

“캐서린! 내 생각엔 당장 떠오르는 해답이 없다면 맥의 말대로 일단은 따라 주는 게 낫다고 봐요.”

“그러다 맥이 잘못되면요.”

“맥의 말마따나 CIA 요원을 함부로 죽이진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돌아간다면 물건만 빼앗기는 게 아니라 입막음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릴 전부 다 죽일 겁니다. 지금으로선 캐서린의 가방 안에 든 그 다이아 원석들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보험이라는 얘기요.”

“하아!”

캐서린이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깊은 갈등에 빠지고 있는 사이 SUV는 마시아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대로 직진을 하면 동부 주 산악 지대로 빠지는 길이고, 여기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야 북부 주 쪽으로 가게 된다.

언제까지 캐서린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태는 제 맘대로 핸들의 방향을 좌측으로 틀었다.

회전 교차로에서 북부 주로 향하는 포트 로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보면서도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캐서린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지태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포트 로코로 뻗은 편도 1차선 마시아카 룬저 하이웨이 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왠지 차창 밖이 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상 한바탕 소낙비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기세였다.

지태는 전방에 시선을 둔 채 다시 한번 한숨을 소리 없이 길게 내쉬었다.

* * *

밤 11시.

이윽고 밤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프리타운 항구를 떠난 선라이징호는 북쪽으로 선수를 돌려 항해하고 있었다.

선장실 유리창 너머로 빗줄기에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항구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던 성동해 선장은 벌써 세 번째 시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밀항하기로 한 인원들이 승선하는 즉시 덮치기로 D.S.U 요원과 약속이 돼 있었다.

한데 D.S.U 요원들은 아직까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뭐냐, 이 자식들!”

우비를 뒤집어쓰고 선장실 밖으로 나온 선동해 선장은 담배 한 개비 빼물었다.

바람에 섞여 날아드는 빗줄기에 담뱃불을 붙이기가 무지 힘들었다.

서너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불이 붙었다.

성동해 선장은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후우 하고 내뿜었다.

“차라리 잘됐지, 뭐. 이대로 아무 일 없이 공해상으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야 고마운 일이지.”

성동해 선장은 속으로 만족한 듯 웃었다.

지태가 약속했던 사례비 18만 달러는 이미 현금으로 받았다.

같은 동포끼리 돈은 돈대로 받고 뒷구멍으론 배신을 하려니 마음 한구석이 내내 찜찜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지나가주니 마음의 짐을 확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거센 빗속에서 연달아 담배 두 개비를 피웠을 무렵 프리타운 항구의 불빛은 이제 강한 빗줄기와 짙은 어둠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았다.

흐뭇한 마음을 안고 선장실로 다시 되돌아가려 몸을 틀 때였다.

선동해 선장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두두두두두.

화물선 뱃전을 때리는 빗소리와 파도 소리 사이로 작은 북을 연신 두들겨대는 것 같은 헬기의 로터 소리가 들려온 거다.

순간 성동해 선장은 인상을 확 긁었다.

“씨발! 어쩐지 쉽게 가나 싶었다!”

이제 로터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고 저 멀리 헬기에서 쏘아대는 서치라이트에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성동해 선장은 손을 들어 눈부신 불빛을 가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느새 빠르게 다가온 헬기가 화물선 위에서 두어 바퀴를 선회하더니 곧장 아래로 착륙을 시도했다.

화물이 별로 선적되지 않은 관계로 선상에는 빈 공간이 많아 착륙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헬기가 바닥에 닿은 후 로터가 멈추기도 전에 판초우의를 걸친 D.S.U 요원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성동해 선장은 맨 나중에 헬기에서 내린 사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태가 자신에게 붙여준 시에라리온의 콜걸과 모처럼 객고를 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호텔 방에 난입해 그로 하여금 오줌을 지리게 만들었던 D.S.U의 팀장.

그가 대뜸 물었다.

“캡틴! 놈들은?”

팀장은 예의 따위는 깡통 차듯이 걷어찬 듯한 어투로 다짜고짜 물어 왔다.

“선창 아래 비밀 아지트에 얌전히 짱 박혀 있습니다.”

“가지!”

팀장은 어서 앞장서라는 듯 턱짓을 해보였다.

성동해 선장은 일진들에게 삥 뜯기는 고삐리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배의 선창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 *

역시나 지태의 짐작대로 메인지 부근 리틀 스카시스 강의 다리를 막 지날 무렵부터 강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높은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동부에 비해 북부 쪽 도로 사정이 좋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왕복 2차선의 협소한 고속도로이긴 하지만 아스콘 포장이 돼 있으니까.

거기에 반해 산악 지대가 대부분인 동부 지역은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그쪽을 이용해 라이베리아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더라면 지금쯤 빗속에 갇혀 오도 가도 못했을 것이다.

물기 먹은 아스팔트길은 조명을 흡수해 버려 전조등을 상향으로 밝혔어도 20미터 앞을 내다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비단 그런 이유 때문인 것만은 아닌 듯했다.

눈앞의 계기판 배터리 표시등이 깜빡깜빡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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