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진실게임(1)
캐서린이 씁쓸한 표정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말하는 뉘앙스나 표정이 왠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알 만한 사람이라는 걸 암시하듯.
그러자 지태의 머릿속에 번쩍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태의 눈빛을 읽은 듯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시켜 주었다.
“예, 맞아요. 미스터 한이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에요, 둠부캉!”
허, 이건 또 뭐냐.
잘 나가다가 다시 또 미로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캐서린 대신 맥 브라운을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하지 못했던 여러 속사정 중 하납니다, 그게.”
자꾸 헛웃음만 새나온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다.
거짓말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이 상황,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 일을 도모해도 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지태는 기가 차기만 했다.
“하, 정말 상대해선 안 될 사람들이군.”
지태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영어로 중얼거렸으니 너희들도 알아들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난 여기서 그만 손을 떼겠소. 이제 당신들이 나를 어떤 달콤한 말로 유혹해도 더 이상 믿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지태가 허탈함과 분노를 섞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맥 브라운이 바삐 일어나며 지태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미안합니다, 한! 하지만 우리의 사정도 좀 이해해주세요.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이 왔다 갔다 할 판국인데 모든 걸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소. 그래서 미스터 한에겐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이란 표현을 빌려 썼던 것이고.”
“난 이제 당신들과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니까…….”
“도와주세요, 미스터! 난 다이아몬드에 그다지 큰 욕심이 없어요. 다만!”
지태가 다시 한번 맥 브라운의 손을 냉정히 뿌리치려 할 때 캐서린이 급히 나섰다.
“……돈이 좀 필요할 뿐이에요. 그 돈으로 내 꿈을 완성시키고 싶어서 그래요. 이 나라에선 다이아를 돈으로 바꿀 수가 없으니까 밖에 나가서 팔아오려는 거예요. 그래서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을 평생 돌보며 살고 싶어요. 그게 내, 내 소망… 흑흑!”
급기야 캐서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다.
여자의 눈물 앞에서는 천하장사라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태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럼에도 제 할 말은 기어이 해야겠다는 듯 흐느끼는 캐서린을 대신해 맥 브라운을 바라보았다.
“캐서린의 뜻은 잘 알 거 같습니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숭고한 박애정신도 높게 사 드리고 싶고.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내가 원해서 뛰어든 일도 아니고, 더구나 난 장사꾼이오. 내게 돌아올 아무런 이문도 없는 일에 하나뿐인 목숨을 걸만큼 우둔하지도 않단 말입니다.”
“약속은 지킵니다. 벤자민을 통해 제시했던 그 제안, 꼭 지킬 거란 말이오, 한!”
“도대체 내가 당신들의 어떤 점을 믿고?”
그때 흐느끼고 있던 캐서린이 순간 지태의 말을 급하게 끊었다.
“그럼 드릴게요, 지금!”
그녀는 물기가 촉촉한 두 눈으로 지태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예? 지금 뭐라고 했습…….”
“드리겠다고요, 지금 당장!”
일단 지태의 마음을 붙드는 것에 성공했다 싶었는지 캐서린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몸을 돌리더니 방을 나갔다.
서둘러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캐서린은 원탁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놓더니 그 안에서 부드러운 붉은 융단에 싸인 다이아몬드 원석을 꺼냈다.
벤자민이 지태에게 보여 주며 그의 몫으로 약속했던 바로 그 50캐럿짜리 원석이었다.
“지금 넣어 두세요. 어차피 미스터 한에게 드릴 몫인데 보상을 굳이 미룰 필요가 없으니까요.”
“홧김에 어깃장 놓는 건 아니죠? 만일 내가 이것만 갖고 몰래 튄다면…?”
“그래도 원망 같은 거 안 할게요. 하지만 난 당신의 양심을 믿고 싶어요. 한눈에도 신사처럼 보이니까.”
캐서린은 자신이 언제 흐느꼈었냐는 듯 밝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를 언제 봤다고 젠틀씩이나!’
그래도 이쯤 되니 더는 할 말이 없어진 지태였다.
어차피 이들과는 처음부터 의리로 똘똘 뭉쳐진 관계도 아니고 서로가 필요에 의해 맺어졌을 뿐이다.
약속된 보수를 선불로 받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이제 이들이 거짓으로 일관하든, 또 다른 어떤 속임수를 쓰든 크게 신경 쓸 일이 안 되었다.
꼼수를 쓰거나 완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아가지만 않는다면 이 원석은 이제 자신의 몫이 될 테니까.
지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받기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은 무효화된 시점이니 이제는 편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할 차례였다.
지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두 사람과의 대화에 임했다.
* * *
밤이 깊어지자 지태는 맥 브라운이 지정해준 방에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
두 평 남짓한 방이다.
원래는 하얀색 수성 페인트를 발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벽은 담배 니코틴 때문인지 노리끼리했고, 게다가 벌건 녹물까지 군데군데 얼룩져 있어서 더욱 흉물스러워 보였다.
간간이 새끼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방 한쪽으로 철제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워낙 오래되고 낡아빠져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기분 나쁜 쇳소리를 냈다.
지태는 허리춤에서 베레타를 빼내 머리맡 쿠션 밑에 넣어두었다.
“어렵군요, 어르신!”
지태는 한숨처럼 최봉준을 불렀다.
실제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혼자만의 상상인지는 몰라도 곧바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후후. 내가 보기엔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뭘!
“꼭 뭐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렇죠. 마치 제가 어르신을 처음 뵌 날처럼 말입니다.”
- 어렵게 생각할 거 하나 없네. 자네, 국제적인 장사꾼이 되겠다고 나선 길이 아닌가. 모로 가도 한양 땅에만 도착하면 되는 거야. 장사꾼이 돈만 벌면 되는 거지, 이러저러한 과정 따위가 뭐가 중요해.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요.”
- 쉿! 누가 다가오는군 그래.
최봉준은 그 말을 끝으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누가 오고 있다고?”
지태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뇌고 있는데, 그 순간 닫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 누구?”
- 캐서린이에요. 안 주무시면 나 좀 들어가도 될까요?
‘뭐지?’
지태가 철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세요, 캐서린.”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면서 비로소 캐서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에는 큼지막한 와인 병과 머그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가구며 집기라고는 낡은 철제 침대 하나뿐이어서 지태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캐서린을 앉게 했다.
“보다시피 형식이나 격식을 갖출 여건이 안 돼서…….”
크리스털 와인 잔 대신 머그컵을 들고 온 것이 민망했던 모양이다.
분위기 잡을 일도 없는데 격식이며 잔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괜찮습니다.”
혼자 마시다온 듯했다.
와인 병은 이미 개봉인 된 상태였다.
캐서린이 머그컵 하나에 와인을 반쯤 채운 다음 지태에게 내밀었다.
컵을 받아 들고 입만 살짝 적시던 지태가 문득 물었다.
“집안이 조용하네요? 다들 어디 갔습니까?”
“마당에서 경비를 서는 두 사람을 빼곤 현재 이 집안엔 우리 둘뿐이에요.”
그 소리가 왠지 유혹처럼 들린다.
‘뭐냐, 이 분위기는?’
지태가 멋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캐서린이 괜히 입을 막고 과장되게 웃었다.
“맥도 어디 나갔습니까?”
“벤자민을 만나러! 중간 정산을 해 달라는 요구가 와서요. 물론 아까 우리들이 새로 짰던 수정된 계획들을 전달도 해줄 겸.”
이들이 고용한 하수인이니 벤자민 입장에서 중간 정산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는 건 당연지사.
지금 흘러가는 상황으로만 놓고 보자면 벤자민도 내일이 불투명하고 불안할 테니까 계산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캐서린이 머그컵을 부딪쳐 왔다.
건배를 마친 와인을 마시면서도 지태는 힐끔 캐서린을 살폈다.
그동안 하도 속은 게 많으니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다.
이 시간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 방의 문턱을 넘었을까 하고.
지태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캐서린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 이 방에 찾아왔을까, 그거 지금 무지 궁금하죠? 미스터 한이 경계하는 게 느껴져!”
제 말끝에 캐서린은 까르르 웃었다.
지태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쓴맛을 다시자 캐서린의 웃음은 곧 시들해졌다.
“그냥 온 거예요. 긴장하지 마요. 단지 난 미스터 한과 술 한 잔 같이하고 싶어서 온 것뿐이니까. 그동안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거든요.”
캐서린은 금세 울적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와인을 벌컥 마셨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뭔가 의심스러워요? 그래요, 그럼. 내 말이 정 의심스럽다면 원초적 순수함을 간직한 내 몸은 믿어 줄라나? 몽땅 다 벗어 보일까요?”
“워, 워. 노우, 노! 진정하세요.”
지태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던 모양이다.
캐서린이 다시금 까르르 웃었다.
‘젠장, 나를 완전히 들었다 놨다 제 맘대로 갖고 노네.’
지태가 속으로 투덜거린 다음 캐서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색함을 털어내는 동시에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을 떠도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저기, 하나만 물어봅시다. 아까 둠부캉과 직할 보안대가 동시에 캐서린의 뒤를 쫓는다고 했는데, 둠부캉은 다이아몬드의 냄새를 먼저 맡아서 그렇다 치더라도 D.S.U 애들은 왜, 어떻게 알고 뒤쫓는 겁니까?”
지태의 질문 끝에서 캐서린은 쓰게 웃었다.
“한은 둠부캉이란 사람을 얼마나 믿고 있어요?”
“얼마나 믿는다기보다는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됐으니 적어도 나한테는 악하게 굴지 않을 거란 정도?”
“한의 믿음은 틀렸어요. 둠부캉은 아주 교활한 사람이에요! 직할 보안대에서 어떻게 알게 됐냐고 물었죠? 그게 다 둠부캉 때문이에요.”
“그 사람이 캐서린의 정보를 알려줬을까요?”
“앙숙지간인 정보부와 D.S.U가 공조를 한다고요? 천만에요!”
캐서린은 조소를 흘렸다.
그럼 뭐란 말인가.
퍼뜩 대답하지 않고 스무고개 놀이하듯 말장난을 하는 캐서린의 태도에 지태는 약간 짜증이 났다.
“당시 D.S.U는 둠부캉의 뒤를 밟고 있었어요. 지난여름 그가 한 짓 때문에.”
“지난여름에 한 짓이라니……요?”
“폭우 때문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고 초토화가 된 건 미스터 한도 알고 있죠? 그때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구호물품들이 이 나라로 날아들었어요. 그 물품의 일부를 나라 밖으로 빼돌려 팔아먹은 거예요, 둠부캉이!”
“그건 정보부 차원이 아니라 D.S.U 쪽에서 해 먹었다고 들었는데…?”
“후후.”
캐서린은 곧바로 코웃음을 쳤지만, 그건 지태를 비웃는 게 아니었다.
“둠부캉이 한에게도 거짓말을 했군요. 그 자신이 스스로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허, 이런 니미!”
이건 한국말이다.
아무리 의연하려 해도 또다시 속은 기분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언어는 몰라도 그 사람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었다.
캐서린은 지태를 보며 어깨를 살짝 으쓱해보였다.
“무지 바빴겠군요.”
지태의 뜬금없는 말에 캐서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말고 쳐다보았다.
“내가 이 나라에 온다는 걸 둠부캉의 전화를 감청해서 알아냈을 때부터 말이오.”
“아하!”
캐서린이 큭 하고 웃었다.
“웃은 거 미안해요. 근데 사실 그걸 듣는 순간 뭔가 출구가 보인다는 생각을 했어요. 양쪽의 감시망을 뚫고 어떻게 이 나라를 빠져나갈까 무지 고민이었거든요. 엄청 두렵기도 했었고.”
캐서린은 제 말끝에 양팔로 자신의 가슴을 꼭 감싸며 잔뜩 움츠리는 시늉을 했다.
“출구라…? 내가 국제적으로 호구가 되는 순간이었네.”
다시 한국말로 중얼거리자 캐서린이 ‘What?’하고 물었다.
지태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영어로 번역해주자 캐서린은 금세 미안한 얼굴로 변해 갔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조금 데면데면해졌다.
별다른 대화 없이 한동안 그저 술잔만 비웠다.
750ml짜리 스탠다드 와인 한 병이 거의 다 비워질 때까지 지태는 머그컵으로 반잔씩 두 잔을 마셨을 뿐이지만, 그 나머지는 캐서린 혼자 다 마셨다.
이제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캐서린의 눈빛이 많이 흔들려 보였다.
그런 캐서린의 입에서 문득 오글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외로워.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이 외로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