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굴러올 복! 아니, 다이아몬드(5)
조금 뒤 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똑똑.
지태는 문 앞에 서서 깊은 호흡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다스렸다.
그리고 곧 베레타를 등 뒤로 숨긴 다음 문을 벌컥 열었다.
사실 이번에도 쪽지만 던져 놓고 사람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흡!’
순간 지태는 잔뜩 응축된 긴장감을 밖으로 표출하며 재빨리 베레타를 앞으로 겨눴다.
노크를 한 사내인 듯싶은 흑인이 양 손바닥을 가슴께 정도에 펼쳐 보이며 자신은 무기를 지닌 게 없으며 악의 또한 없음을 내비쳤다.
지태는 고개를 내밀어 복도 양쪽을 빠르게 살폈다.
그의 말대로 복도엔 사내뿐이었다.
“누구요, 당신?”
“벤자민 씨, 아니 그보다는 맥 브라운 씨가 더 신뢰감이 있으시려나? 암튼 나는 그쪽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맥 브라운?”
저 혼자 살겠다고 소리도 없이 잠수를 타더니 이제 와서 무슨 개수작인가 싶다.
지태가 미심쩍은 시선을 거둬가지 않자 사내가 쪽지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스마트폰은 감청 위험이 있다고 대신 쪽지를 전해달라더군요. 일단 살펴보시죠.”
맥 브라운이 보내온 거였다.
[미안합니다, 미스터 한! 미리 귀띔을 해줄 틈도 없게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는지라 우선은 내가 먼저 피했습니다. 이 쪽지를 보거든 심부름을 간 그 친구를 따라서 이쪽으로 오도록 하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기로 하고. 되도록 빨리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쪽지를 읽은 지태는 금세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있다가 둠부캉이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다.
지태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사내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둠부캉을 기다리는 거지요?”
어라, 이놈이 벌써 그것을 알고 있다.
“그걸 어떻게?”
“그 사람도 궁지에 몰려 있기는 마찬가집니다. 만약 둠부캉을 따라 나섰다간 미스터 한께서 어쩌면 큰 낭패를 보게 될지 모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둠부캉입니까, 맥 브라운 씨입니까?”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라는 투였다.
잠시 사내의 표정을 살피며 간을 보던 지태가 이윽고 마음을 굳혔다.
“좋습니다. 일단 당신들의 말을 한번 믿어보는 쪽으로 하지.”
지태는 침대 위에 놓아둔 손가방을 챙겼고 이내 사내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이용하면서도 앞장선 사내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온 신경을 바짝 세워 집중하는 듯했다.
이윽고 1층에 거의 다다르자 두 명의 사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태를 데리러 왔던 사내가 별로 놀라지 않는 것으로 봐서 같은 팀원인 듯했다.
그들은 청소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각종 청소도구를 담은 카트를 옆에 세워 두고 있었다.
“미스터! 우선은 이걸로 갈아입으시지요. 이것도 함께 쓰시고.”
지태가 청소부로 변한 사내들을 바라보고 서있자 함께 내려온 사내가 카트에서 청소부용 의복과 모자를 꺼내 내밀었다.
“일단 호텔 밖으로 나갈 때까지만 걸치고 계시면 됩니다. 보안 카메라만 피하고 보자는 조치의 일환이니까.”
지태는 이들의 철저한 준비성에 만족해하며 순순히 사내의 말을 따랐다.
바지를 대충 꿰차고 겉옷에 모자까지 눌러쓰자 누가 봐도 호텔에 소속된 청소원이었다.
지태는 청소 카트에서 대걸레를 뽑아 어깨에 건들건들 멘 채 사내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사내들은 호텔 내 보안카메라의 위치를 미리 파악해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후문으로 나와 보안 카메라의 사각지대만을 골라 빠르게 이동했다.
호텔 건물에서 벗어나자 어두운 길가 한쪽에 주차된 차가 보였다.
미제 SUV이었는데 연식이 오래된 듯했고 폐차해야 할 고물에 가까워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듯했다.
객실에서부터 안내하고 내려왔던 사내가 사내들의 대가리였던 모양이다.
그의 지시에 따라 사내들은 운전석과 조수석에 서둘러 올라탔다.
그러자 리더 격인 사내가 지태에게 차량의 뒷좌석을 가리킨다.
“오르시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SUV는 언덕을 넘어 시내 쪽으로 달려갔다.
차 안의 사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내를 관통한 SUV는 돌연 울퉁불퉁한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급격하게 쏠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지태는 밖을 내다보았다.
예전 한국의 달동네처럼 생긴 지역의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왠지 수상한 느낌이 들어 지태는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며 리더에게 물었다.
여차 하면 베레타를 뽑을 생각이었다.
“놈들의 허를 찌르는 겁니다. 이쪽은 프리타운 내에서도 빈민가로 소문난 곳이라 우리가 설마 이곳에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거든요.”
하기는 딱 봐도 음침해 보이는 곳이다.
보통의 일반 시민들 같으면 대낮에도 감히 올라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한눈에도 거칠고 험해 보이는 동네였다.
꾸불꾸불 이어진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 SUV가 마침내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자 대가리는 사내들을 다시 밑으로 내려 보내고 그 자신만 남아 지태를 이끌었다.
“여기서부턴 조금 걸어야 합니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이라서…….”
“상관없습니다.”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즉각 반응할 수 있게 허리춤 가까이 손을 가져가며 주위를 훑었다.
손을 살짝만 가져다대도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벽돌로 대충 지어올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불빛 하나 없어 오리무중 같은 어둠속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골목을 얼마쯤 거슬러 올라갔을까.
문득 대가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여깁니다, 미스터!”
오래되어 삐거덕 소리를 내는 나무문짝을 열고 대가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가니 미리 연락을 받은 듯 맥 브라운이 서너 평쯤 되는 마당에 나와 지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미스터 한!”
그는 반갑게 악수를 청했지만, 지태는 손길을 회피하며 자못 심드렁하게 굴었다.
“단단히 삐치셨군. 일단 들어가십시다.”
맥 브라운은 내밀었던 손을 머쓱하게 거두어가며 집 안을 가리켰다.
대략 5평쯤 되는 거실 겸 주방을 지나 조도 낮은 전등이 켜진 큰방으로 들어서던 지태가 순간 흠칫 놀랐다.
뜻하지 않은 낯선 여인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맥 브라운이 피식 웃는 낯꽃으로 그녀를 소개했다.
“아, 내가 전에 말했던 사촌이오.”
언젠가 맥 브라운은 사적으로 이번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었고, 사적 이유가 뭐냐고 묻는 지태에게 사촌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사촌은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였다니.
지태는 의외라는 듯 여인을 다시 한번 흘깃 쳐다보았다.
나이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밝은 금발에다가 시선을 확 끌어당길 만큼 미인이었다.
“한지탭니다.”
지태가 먼저 인사를 던지자 여인은 애교 섞인 눈인사로 화답했다.
“캐서린 스펜서예요. 그냥 캐서린이라 불러 주세요.”
애교마저 도발적으로 보이는 캐서린의 눈인사에 지태는 정신이 다 아찔했다.
캐서린의 눈웃음에서 언젠가 보았던 영화 속 여배우의 모습이 그려진 까닭이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할리퀸으로 열연했던 호주 출신의 여배우 마고로비.
자칫 똘끼 충만한 여자로만 내비쳐졌을 배역을 섹시하면서도 몽환적으로 소화해 냈던 바로 그녀…….
“자, 일단 앉으십시다.”
지금껏 지태를 안내했던 사내를 밖으로 내보낸 다음 맥 브라운은 방 안에 놓인 원탁 테이블을 가리켰다.
지태는 속으로 쓰게 입맛을 다셨다.
원치 않게 이들이 파 놓은 늪에 발을 내디뎠고, 이제는 영문도 모른 채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 속담에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뭡니까, 이 복잡한 상황들은?”
“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단지 D.S.U 애들의 움직임이 우리의 예상에서 살짝 빗나갔을 뿐이오. 우리보다 놈들이 한 발 더 빨리 움직였다고나 할까? 암튼 우리도 거기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니까 그 또한 염려할 건 없다고 봅니다.”
“그럼 이제 말해 봐요.”
“말을 하라니, 무엇을 말이오?”
“아, 저번에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은 그것 말이오, 깊은 속사정이라는 거!”
지태가 약간 신경질을 담아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맥 브라운은 멋쩍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캐서린을 힐끗 돌아보았다.
캐서린은 맥 브라운과 눈이 마주치자 예의 애교스러운 윙크를 날리며 끄덕였다.
이제 다 털어놓으라는 사인 같았다.
“두 사람 사촌 맞아요? 누가 보면 오래된 연인인 줄 알겠네.”
지태가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헛웃음을 켰다.
“그거 지금 질투?”
“질투는 무슨! 난 한눈팔 시간도 없는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여친이 있어서.”
방금 엉겁결에 튀어나온 이 말, 진심인가?
지태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곧 수긍했다.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면 임기응변으로라도 지은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하시지.”
지태가 계면쩍음을 털어내려는 듯 툴툴거렸다.
잠시 미소를 그렸던 맥 브라운은 이내 정색했다.
“사실 다이아 원석의 주인은 벤자민이 아니오. 그는 우리가 고용한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나도 이미 속으론 그런 줄 알고 있었어요. 딱 봐도 사업가라기보다는 건달 같다는 냄새가 풍겼으니까. 그렇다면 그 주인은…?”
지태는 캐서린을 돌아보았다.
이제 진지한 화제로 돌아선 만큼 캐서린 또한 어느새 장난스러운 표정을 얼굴에서 싹 다 지워낸 상태였다.
“맞아요. 그 다이아몬드 원석의 주인은 나예요.”
순간 지태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진실을 듣고 나니 이제는 누구를 얼마나 믿어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까닭이었다.
말을 내뱉는 사람마다 입장이 전부 다르고, 제 입맛에 맞도록 이야기 자체를 각색해 버리는 통에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예전에 벤자민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이란 이야기인데…….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국가가 관리하는 광산에서 다이아몬드를 빼돌렸다는 것 자체부터도 말이 안 되었다.
이것들이 나를 알기를 완전히 호구로 아나.
“내가 알기로 덩치 큰 다이아몬드 광산들은 대개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그 원석을 빼돌리기 무지 힘들었을 텐데, 어찌된 겁니까, 캐서린?”
“믿기지 않겠지만, 난 사회사업가예요. 동부 주 코노 인근에서 지난 5년 동안 부모 없는 아이들을 보살폈고요.”
캐서린은 동문서답하듯 말문을 열었다.
지태는 잠자코 들었다.
이것은 본론으로 진입하기에 앞서 길을 닦는 과정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캐서린이 어렵게 입을 연 내용들을 대충 요약하면 이런 거였다.
재력가인 부모를 둔 덕분에 자신의 어릴 적 꿈이었던 사회사업가의 활동을 이 나라에서 걱정 없이 펼칠 수 있었다.
언젠가 여행을 왔다가 열악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을 보고는 귀국한 내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부모님을 설득해 얼마간의 자금을 가지고 다시 날아온 캐서린은 동부 주 코노 지역에 보육원을 세웠다.
그렇게 5년이 다 되어 가던 어느 날, 보육원 인근 냇가에서 놀던 아이들 중 하나가 반짝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왔는데 그게 바로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다는 거다.
깜짝 놀란 캐서린은 그 후로 오랜 시간을 아이가 원석을 주워 왔다는 인근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아하! 원래 다이아몬드라는 게 그렇듯 땅바닥에서 막 굴러다니는 거였군요.”
“……?”
“아, 비웃으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게 된 상황이 너무도 황당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지태가 돌연 말을 끊으며 나오자 캐서린이 살짝 인상을 구기며 쳐다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말이 행여 조소로 내비쳤을까봐 지태는 얼른 변명을 한 것이고.
“괜찮아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팩트예요. 지난여름 시에라리온에 닥친 엄청난 폭우로 산과 들이 한바탕 뒤집혔거든요. 그래서 새 광산이 발견된 거고요.”
“계속해 보세요, 캐서린!”
지태가 소리 없이 웃으며 권하자 캐서린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여하튼 그 과정에서 벤자민이 말했던 500캐럿짜리 블루다이아몬드 원석도 발견했다고 했다.
캐서린은 이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보육원의 시설확장 뿐만 아니라 전국 각처로 보육원의 숫자를 늘려야겠다는 기대감과 설렘 때문에 여러 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버렸다.
코노 지역으로 폭우의 피해 상황을 조사차 나왔던 정보부 요원 중 하나가 보육원 아이로부터 문제의 다이아몬드 원석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만 것이다.
“미스터 한! 그 문제의 정보부 요원이 누군 줄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