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굴러올 복! 아니, 다이아몬드(1)
“먼저 하나만 묻죠.”
지태가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며 입을 뗐다.
“예, 그러세요.”
“맥 당신이 미국의 CIA 신분인 건 확실합니까?”
“그 말도 거짓 같습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속였으니까요.”
“이미 들통이 난 마당에 뭘 속이겠습니까. 예, 아프리카 담당이 맞습니다.”
맥 브라운은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니까 이번 한 번만 더 속아드리지. 대신 지금 하려는 이 질문만큼은 절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뭐든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니미, 이름을 걸기는 뭘 걸어!
속으로 한껏 비웃은 지태가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며 입을 열었다.
“벤자민과는 어떻게 엮인 겁니까? CIA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겁니까?”
뭐든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고 했으니 지태는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맥 브라운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셔 입술을 축이더니 무겁게 콧김을 내쉬었다.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입니다. CIA 본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 개인적인 문제.”
“사적인 일이라니요?”
“오늘은 딱 여기까지만 하십시다. 어차피 일을 진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될 겁니다.”
맥 브라운은 지태가 던져온 질문에서 요지는 슬쩍 피해가려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목숨이 걸린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사적 영역이라는 게 금전적인 일입니까?”
한마디로 다이아몬드를 국외로 빼돌리는데 일조를 하면 그에게도 적지 않은 떡고물이 떨어지느냐고 묻는 말이었다.
“그걸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비단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뭔데요. 다른 이유라는 게?”
맥 브라운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표정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슬쩍 피해 가려 했는데 끝내 제 코를 꿰이고 말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이것까지만 말씀드리죠. 사실 이번 일에는 내 사촌이 관련돼 있습니다. 어차피 일을 진행하다 보면 좀 더 두터운 신뢰가 쌓일 것이고, 그러면 그때 인간적으로 전부 다 말해주려고 했어요. 아닙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지금은 안 되겠네요. 내가 나중에 다 말씀드리지.”
지태는 이 대목에서 조금 더 자세한 내막이나 속사정이 터져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맥 브라운은 그대로 입을 닫고 말았다.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라는 말로 입을 틀어막는 데야 강제로 그의 입을 다시 열게 할 방법은 없었다.
지태는 쓴맛을 다셨다.
그리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지태는 맥 브라운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 기민성에게 대금을 모두 입금했으니 최대한 빨리 물품을 보내 달라는 전화를 넣었다.
이어 조현민에게 간단히 안부만 전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지태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 뭐야. 이러면 되긔, 안 되긔?
지은은 통화가 연결되자 대뜸 타박해왔다.
이틀 연속 전화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너무 그러지 마. 이곳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랬어.”
- 많이 바빴던 거야?
심각함을 느꼈는지 지은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지며 진지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오더를 받았거든.”
- 우와! 그럼 잘 된 거잖아.
지은은 자기 일처럼 반기다가 문득 불안한 음성을 띠었다.
- 그러면 귀국 일정이 조금 연기되겠네?
“아무래도 좀…….”
- 아이, 참! 그건 좀 싫다. 대체 얼마나 늦어지는 건데?
“예정된 일정에서 최하 2주, 아니면 3주 정도?”
- 그건 너무 길어. 지태 씨!
“응?”
-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가 거기 시에라리온으로 넘어갈까?
“떽!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꺼내지도 마. 여기가 어디라고 와.”
- 하핫.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뭘 그렇게까지 질색을 하고 그래. 난 그냥 그 정도로 지태 씨가 보고 싶다는 말이었어.
지은은 짐짓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말의 끝 부분에선 음성마저 촉촉하게 느껴져서 지태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독여할 시간.
“알겠어. 내가 최대한 일정을 앞당겨 볼게. 나도 흰쌀밥에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그리워서라도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 뭐어? 내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밥상이 그리워서라고?
말을 던지고 보니 좀 그렇다.
지태가 계면쩍은 웃음을 날렸다.
“그게 내 어설픈 핑계라는 거 이미 눈치챘잖아. 안 그래?”
- 그래도 난 싫어. 노골적으로 말해주는 게 좋단 말이야.
“그래. 사실 지은이가 보고 싶어서 빨리 돌아가려는 거야. 이제 됐지?”
- 암튼 싱거운 사람이야, 지태 씨는!
“내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지은이가 이해해. 그리고 이만 끊자. 내가 지금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있어서 그래.”
- 알겠어요. 대신 하루라도 빼먹지 말고 매일 전화하기!
지태는 꼭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남겨두고서 전화를 끊었다.
* * *
점심을 건너뛴 바람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돌아온 지태가 막 객실 문을 열었을 때 내선전화기가 울었다.
지태는 서둘러 달려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곧 둠부캉의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뭐 하고 있었습니까?
“방금 저녁 먹고 올라오는 길입니다만…….”
- 아, 그래요? 식사를 마쳤다니 차라리 잘됐구먼.
뭐가 잘되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목소리가 달뜬 걸 보면 분명 좋은 일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오늘은 기분이 몹시 좋아 보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 좋아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미스터 한입니다.
“내가요?”
- 일단 내려와 봐요. 지금 나하고 당장 그 사기꾼 놈을 잡으러 가십시다.
아마도 아바스 카마라에 대한 단서를 찾은 듯했다.
지태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외출 채비를 서둘렀다.
로비로 내려가자 둠부캉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어떻게, 놈에 대한 단서를 찾아냈습니까?”
“아, 찾았죠! 어디 단서뿐이겠습니까. 놈이 은신하고 있는 아지트까지 알아냈습니다.”
둠부캉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에 걸맞은 반응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지태는 엄지 척을 해보였다.
“대단하십니다, 둠부캉! 시에라리온 정보부의 실력도 만만찮군요.”
“뭐든 마음먹고 달려들기만 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죠. 우리 정보부 애들의 능력이 의외로 출중하기도 하고.”
좀 띄워 주니 금세 자화자찬이다.
피식 웃어 보인 지태가 물었다.
“어딥니까, 놈이 숨어 있는 데가? 시냅니까?”
둠부캉이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시내는 아닌 모양이다.
“시내 외곽입니다. 자세한 건 일단 가면서!”
둠부캉은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참, 거기 글러브 박스를 한번 열어 보시오.”
운전대를 잡은 채 속도를 높여가던 둠부캉이 보조석에 앉아있는 지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태가 대시보드의 글러브 박스를 열자 노란 봉투 하나가 보였다.
한번 열어 보라는 것은 이 봉투 안의 내용물을 직접 확인해 보라는 뜻.
지태는 망설임 없이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두어 장쯤 되는 문서를 꺼냈다.
두 장 중 하나는 증명사진 같은 것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는데 30대 후반 정도 돼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었다.
지태가 퍼뜩 돌아보았다.
“이놈입니까?”
“예, 맞아요. 바로 그놈입니다. 설마 한국에서 돈 몇 푼 받아내러 이곳까지 날아오겠나 싶었던지 이름까지 사기를 치지는 않았더군요. 본명이 아바스 카마라가 맞습디다.”
“딱 사기꾼처럼 생겼군요, 이 새끼!”
“거기에 색골처럼 생겼고! 코가 뭉툭하면서 번들거리는 게 딱 봐도 여자를 밝히는 새끼들이에요.”
그게 근거가 있는 말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목에서는 동조해주는 것도 상관이 없을 듯싶었다.
고생한 둠부캉을 격려하기 위한 차원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이 새끼가 사기도 사기지만 예전엔 주먹도 좀 썼던 놈 같습디다. 폭력 전과가 몇 개 되더군요.”
사진 뒷장을 펼쳐 보니 대체로 그런 내용의 범죄 이력이 죽 나열돼 있었다.
지태가 털털하게 웃었다.
“어차피 손은 봐줘야 할 놈이었군요.”
“잘됐습니다. 가뜩이나 요즘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화풀이 대상이 좀 필요했는데.”
둠부캉이 흘깃 돌아보며 씩 웃었다.
지태가 짓궂은 미소로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착각이 심한 거 아닙니까? 이놈은 어디까지나 내 몫입니다.”
“헐!”
둠부캉이 운전대를 양손에 쥔 채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SUV는 프리타운 남쪽 해변으로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갔다.
사기꾼 아바스 카마라는 남쪽 해변 도로가 끝나가는 지점에 위치한 켄트라는 마을에 은신해 있다고 했다.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둠부캉이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지태가 흘깃 돌아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
“미스터 한!”
정색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지태가 약간 긴장하며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돌아보았다.
“예. 말씀해 보세요.”
“내가 말이오. 사실 미스터 한이 요즘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소.”
흠칫.
지태는 긴장함을 넘어서 순간 얼음이 되었다.
“누, 누굴 만나고 다니다니, 그게 무슨…?”
“나를 속일 생각입니까?”
둠부캉이 다 알고 있다는 듯 비릿하게 웃었다.
갑자기 낯선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태의 눈에는 그것이 아주 싸늘하게 내비쳤다.
어설프게 대꾸를 했다간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그렇다고 먼저 모든 것을 먼저 까발린다는 것도 안 될 일이다.
둠부캉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까지 자백해버릴 염려가 있는 까닭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대충 그런 식으로 지태는 일단 간을 보았다.
둠부캉의 입에서 다시금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흘 전에 벤자민을 은밀히 만났죠?”
헐, 정확히 이름까지 꿰뚫고 있다.
그토록 조심한다고 노력했음에도 결국은 들키고 만 것인가?
“나를 미행했습니까?”
“미행이라…….”
둠부캉이 예의 비릿한 웃음으로 되뇌자 지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거 상당히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정색하고 물으면 당신도 진지하게 대답을 해보시오. 비웃음 같은 것으로 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이럴 땐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게 정답이라는 듯 지태가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러자 둠부캉의 입가에 걸려 있던 비릿한 웃음마저 사라졌다.
그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금세 굳은 얼굴로 지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빛이 이제는 아주 매서웠다.
“내가 미행을 한 것이 아닙니다, 미스터 한!”
둠부캉은 스스로도 너무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싶었는지 굳은 표정을 조금은 풀면서 말해 준다.
그러나 엉겁결에 덩달아 굳어있던 지태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식빵처럼 건조하고도 단단한 눈빛으로 둠부캉을 쏘아보았다.
그럼 네 부하가 한 짓이냐?
지태의 눈빛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직할대에서 한 짓입니다. 난 그것을 우연히 주워들었을 뿐이고.”
“D.S.U에서 나를 따로 감시하고 있다는 말이오?”
“놈들이 나와 만나는 것을 몇 번 지켜봤을 테니 분명 미스터 한에게도 미행을 붙였을 것이라는 예상은 조금 하고 있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요. 내가 오퍼상이라는 건 둠부캉도 잘 알죠? 내가 벤자민을 만난 것은 단지 오더를 주겠다면서 먼저 접촉을 해왔기 때문이오.”
지태의 임기응변은 빨랐다.
사실 벤자민을 지금 즉시 잡아다가 족친다 해도 분명 그리 말할 것이 확실했으므로 무리한 변명은 아닐 것이다.
“압니다. 밀가루의 수입을 대행해 주기로 했다지요?”
“그렇습니다. 벤자민의 말로는 빈민가에 뿌려 줄 생각이라더군요. 그 생각이 하도 기특해서 큰 이문이 남는 것은 아니지만 선뜻 맡아서 해주기로 했던 거고요.”
“알아요, 알아! 직할 보안대에서도 그렇게 파악을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무리하게 미스터 한을 잡아들이거나 거기에 대한 뒷조사는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한 모양입니다.”
“난 사실 둠부캉의 지금 그 태도가 맘에 안 듭니다. 마치 날 취조하듯 하지 않았습니까!”
지태가 따지듯 다그치자 둠부캉이 멋쩍은 표정으로 쓰게 웃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태도는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