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수상한 접촉자(3)
“하, 이거 참! 우리 두 사람의 경호는 신경 쓰지도 않아도 되겠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티 나게 뒤돌아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레스토랑 바깥쪽을 한번 보시오. 지금 D.S.U 놈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게 보일 겁니다.”
“D.S.U……요?”
지태의 물음에 둠부캉은 큭! 하고 웃고 말 뿐이었다.
그러더니 곧 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예전엔 그래도 몰래 감시하는 것 같더니 얼마 전부턴 아예 저렇듯 노골적으로 나옵니다, 저 개새끼들이!”
둠부캉은 으르렁거리듯 내뱉고는 이를 갈았다.
지태는 맥 브라운으로부터 D.S.U와 정보부 간의 갈등에 대해 언뜻 들은 말이 있어서 속으로는 이해가 됐지만, 둠부캉 앞에서는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되묻는 것으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주지시키려 했다.
“도대체 D.S.U라는 데가 뭘 하는 곳인데 감히 정보부의 뒤를 쫓는단 말입니까?”
“감히… 라고요?”
둠부캉은 씁쓸하면서도 조금은 퇴폐적으로 웃었다.
“우리 정보부보다도 힘이 월등하게 막강한 기관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시겠소?”
지태는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그게 이 상황에서는 차라리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잠시 후 둠부캉은 맥 브라운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D.S.U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 새끼들은 뿌리부터 아주 썩었어요. 최고 윗대가리가 대통령의 사촌이니 놈들의 힘이야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는 거고.”
지태는 짐짓 긴 신음 소리를 내는 것으로 둠부캉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동안 우리는 놈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어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힘의 차이가 거의 비등했었고. 한데 균형이 깨진 것은 지난여름 폭우로 인한 산사태 이후부터였소.”
지태가 약간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 조직 간 힘의 균형이 깨진 이유가 폭우로 인한 산사태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런 걸 미스터 한에게 알려 주는 것이 사실 누워서 침 뱉는 꼴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걸 설명하지 않고서는 나와 우리 정보부의 억울한 입장을 대변할 길이 없거든!”
둠부캉은 말을 이어 가려다 말고 무겁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난여름 이 나라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서 약 1천 명 넘는 국민이 몰살당한 일이 있었어요. 이 사실은 해외토픽으로 전 세계에 타전되었으니 미스터 한도 한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지태는 곧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아프리카의 소식치고는 제법 큰 뉴스로 언론에서 다루었으니까.
프리타운 인근 리센트라는 지역에서 폭우로 인한 대형 산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다는 보도였었다.
그때 국제식량농업기구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품과 수많은 양의 의약품들이 답지했다는 보도가 이어졌었다.
한국 정부에서도 인도적 차원에서 30만 달러에 이르는 물품을 지원해준 것으로 지태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새끼들은 인간 새끼들도 아녜요. 수재민들과 병든 자들을 보살피라고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그 구호품들을 아, 글쎄 몰래 빼돌려 전부 다 팔아먹은 거야. 씨발! 그게 어디 사람 새끼라고 하겠소?”
‘헐!’
지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팔아먹을 게 없어 그런 것들까지 내다팔아먹다니.
“그게 대통령의 직할보안대 사람들의 짓이란 말입니까?”
“그니까 씨발 새끼들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소. 그런 첩보를 접한 뒤로 우리 정보부에서 은밀히 놈들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개중 몇 놈을 잡아다가 좀 사납게 족쳤더니 술술 다 불더구먼.”
“!”
“증인도 확보했겠다, 거래했던 물증도 찾아냈겠다, 그래서 그 수사보고서를 들고 대통령께 직접 보고를 하려고 찾아갔어요. 근데 경호실장이 딱 막아 서! 자기가 직접 전달해 주겠대나 뭐래나.”
지태는 둠부캉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성난 얼굴과 말투를 보아 하니 의도했던 바가 틀어졌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우.”
둠부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호실장, 그 시발 놈이 그 보고서를 들고 곧장 보안대장한테 달려간 거야. 대통령의 사촌이라는 그 사람한테 말이오.”
둠부캉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열이 뻗친다는 듯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럼 구호 물품을 팔아먹은 최고 윗선은 보안대장입니까?”
“그것까진 아직 모르겠소. 그 사람을 직접 심문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한데 그날 이후로 우리 정보부가 대통령의 직할대에 완전히 밀리고 까인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끝은 아닐 것이라는 게 바로 내 생각입니다.”
“보안대장이 끝이 아니라면… 설마?”
어쩌면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하달했을 수도 있고,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암묵적인 방조 정도까지는 있었다고 봐야 옳은 상황이었다.
“부끄럽지만 이 나라는 썩어도 너무 썩었어. 최고 통수권자가 권좌에 오른 지 십 년이 넘어가니까 이제 슬슬 고인 물이 그대로 썩어 가고 있는 거란 말이오.”
결국 이날의 식사는 시에라리온의 현실에 대한 둠부캉의 자조 섞인 성토장이 되고 말았다.
성토하는 목청이 높아갈수록 둠부캉의 목으로 넘어가는 술잔의 양도 그만큼 늘었다.
낮부터 시작된 점심 식사를 겸한 술자리는 끝내 저녁까지 이어졌고, 지태는 둠부캉의 연락을 접한 그의 부하가 데리러 와서야 겨우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어서 둠부캉이 권하는 대로 연거푸 술잔을 받다 보니 그 횟수도 만만찮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하자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골치가 지끈거렸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오히려 맑아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지태는 침대에 누워 가슴속에 들어있는 묵직한 것들을 게워 내듯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에라리온에 온 첫날부터 매순간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치 빠르게 만들어지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마치 그 자신이 시에라리온에 넘어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촘촘하게 짜인 각본 속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 골치가 많이 아픈가?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혼미해질 무렵 지태의 상념 속으로 문득 최봉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은 그런 것 같군요, 어르신.”
- 어떤 점들이 그러한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 모두가 마치 제가 이 나라에 넘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거미줄처럼 서로 물리고 연결된 관계에 놓인 저마다의 사람들이 말입니다.”
- 그들이 자네를 이용하고 있다는 불쾌감인가, 아니면 불안감인가?
“아직은 확실한 게 없으니 그 두 가지 사항 모두 해당된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 호홍! 그런가? 둘 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저들이 자네를 이용하려 할 때는 뭔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떤 목적이나 이용할 가치도 없는데 접근해왔을 리는 만무할 테니까.
지태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최봉준이 바로 말을 이어 왔다.
- 그럼 자네도 저들을 이용하면 될 게 아닌가. 저들이 자네를 이용해 빼먹으려는 것 중 일부를 취하면 될 게 아니냐는 말일세. 즉, 저들이 자네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네가 오히려 저들을 이용하겠다는 마음자세 말이야.
발상의 전환.
최봉준은 지금 그것을 지태에게 조언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저는 지금껏 제가 저들에게 이용당하고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아서 불쾌감만 드러냈을 뿐이네요. 생각을 바꾸어 제가 저들을 이용해 이득을 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어르신.”
- …….
“어르신?”
대꾸가 없어 지태는 가만히 최봉준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벌써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는 듯 최봉준의 음성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일단은 그게 뭐든지 간에 전부 다 속아주는 척하지, 뭐.”
편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지태가 픽 웃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벤자민이 의뢰한 밀가루에 대한 오더부터 해결해야 한다.
입항한 화물선을 이용해 다이아몬드를 국외로 빼돌리는 계획은 그다음에 고민할 문제였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몇 차례의 발신음이 달려간 끝에 기민성의 투정 섞인 목소리가 곧 들려왔다.
- 케냐를 떠나더니 그새 애정이 식었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좀 바빴어.”
- 사기꾼 잡느라?
“그것도 그건데, 사실 작은 오더 하나를 따냈거든.”
- 오호! 가자마자 오더를? 얼마짜린데?
“작아, 쥐꼬리만큼! 100만 달러짜리.”
이어지는 환호가 없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오더의 규모가 작다는 것을 기민성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 품목이 뭔데?
“밀가루.”
- 밀가루?
“그래, 밀가루. 그래서 그걸 너한테 좀 부탁하려고.”
- 밀가루 단가, 아니면 수배?
“전부 다!”
되도록 빨리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에서 수입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 급한 거야?
“그렇다고 하네?”
지태는 마치 남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기가 막힌다는 듯 기민성이 잠시 웃고는 가볍게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이 밀가루 문제쯤은 자신이 바로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과 다름없어서 지태는 소리 없이 웃었다.
- 어제 퇴근 무렵에 에릭이 찾아와서 같이 술 한잔했다. 근데 너희 두 사람 사귀는 거냐? 벌써 네가 많이 보고 싶다더라.
“큭!”
- 그거 비웃음? 이거 그대로 에릭한테 전해 준다?
“비웃는 게 아니라 나도 사실 에릭이 보고 싶어서 그런다. 네놈 말대로 이러다가 우리가 진짜 사귀는 거 아니냐?”
둘은 결국 폰을 사이에 두고 유쾌하게 웃었다.
마음속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찜찜함을 털어낸 직후여서 그런지 지태의 웃음소리는 경쾌하고도 맑았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똑.
예의 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벤자민이 보낸 심부름꾼임에 틀림없다.
이 밤에 무슨 메시지를 던져주고 가려고 왔을까?
서둘러 기민성과의 통화를 마친 지태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지태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역시나 심부름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쪽지 한 장만 달랑 놓여 있었다.
[미스터 한! 진행사항을 알고 싶소. 눈속임용 화물은 언제쯤 들어올 예정이오? 전달할 말이 있거든 쪽지를 적어 7층 비상계단 소화전 속에 넣어두시오.]
쪽지를 다 읽고 난 지태가 쓰게 웃었다.
“하여간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사람이군.”
하지만 벤자민의 마음도 이해는 되었다.
마음이 급하니 조바심도 덩달아 치솟을 것은 분명하다.
지태는 메모지를 찾아들고 티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조금 전 기민성과 통화했던 내용을 토대로 밀가루 문제는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적었다.
그리고 메모 속에 부탁 하나를 추가로 적어 넣었다.
권총을 한 자루만 구해 달라는 것.
뭔가 복잡하면서도 은밀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니 그 과정에서 행여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적어도 내 한 몸은 내 스스로 지켜야만 할 테니까.
그렇다고 날아오는 총알을 맨손으로 막아 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지태는 쪽지를 접어 밖으로 나갔다.
비상계단을 내려가 7층의 소화전을 열고 그 안에 쪽지를 슬쩍 넣어 두었다.
* * *
기민성에게 전화를 넣은 지 3일이 지났다.
나이지리아 지사를 통해 밀가루는 쉽게 확보됐으니 이제 입금만 확인된다면 바로 작업할 수 있다는 연락이 날아왔다.
케냐에서 밀가루를 섭외해 보내는 것보다는 지리적으로 월등히 가까운 나이지리아를 선택했다고 했다.
덕분에 비용면에서도 훨씬 절감되었다.
신용장을 개설할 형편이 되지 않으니 기민성의 큐브 인터내셔널과는 T/T를 통한 신용 거래가 될 것이다.
어지간히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거래 조건이지만, 기민성이기에 200% 신뢰하고도 남아 물건을 받기도 전에 거래 금액을 먼저 보내줄 수 있었다.
벤자민에게서 밀가루 수입대금으로 받은 100만 달러를 시에라리온 중앙은행을 통해 기민성에게 입금하고 돌아온 지태는 로비에서 활짝 웃고 있는 맥 브라운과 마주쳤다.
그전과는 달리 왠지 데면데면한 느낌이 들었다.
맥 브라운 역시 벤자민을 통해 자신이 USA투데이 기자가 아니라 미 CIA 아프리카 담당이라는 신분을 지태가 알았을 것이라 믿어서인지 그를 대하는 것에 약간의 어색함이 엿보였다.
“차 한잔하겠소?”
“자신을 속이는 사람과는 함께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사양해도 괜찮죠?”
“허허. 본의 아니게 그리 됐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차를 한 잔 사드리겠습니다. 같이 하시죠.”
느물느물 웃어대는 맥 브라운이다.
지태가 쓰게 입맛을 다시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같은 배를 타야 할 사이였다.
맥 브라운을 기피해 봤자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는 처지라면 적당히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주문한 커피가 한 잔씩 앞에 놓이자 지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