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62화 (62/272)

062화. 수상한 접촉자(1)

이제는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아직 잠이 올 기미는 없었지만 내일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해보긴 해야 한다.

침대에 드러눕던 지태의 머릿속에 문득 지은이 떠올랐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속은 괜찮은가?’

사실 지은이 조금 염려스럽긴 했다.

이곳 시간으로 오후 4시경에 통화를 했으니 벌써 8시간이나 흘렀다.

한국은 지금쯤 오전 9시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 전화 한 통만 하고 자는 게 낫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지태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 하이!

그런데 지태의 우려와는 달리 지은의 목소리는 한층 밝았다.

풀잎 위를 굴러가는 아침 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목소리.

“속은 괜찮은 모양이네?”

- 난 아무래도 타고난 술꾼 체질인가 봐. 아무렇지도 않아. 말짱해.

“그래도 너무 무리하게 많이 마시진 마.”

- 그렇담 지태 씨가 나를 덜 외롭게 해줘. 그러면 되잖아.

“하, 핑계도 차암!”

지태는 무심한 듯 털털하게 내뱉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좋았다.

감정이란 재채기처럼 아무리 참으려 해도 절대 참아지지가 않는다.

결코 감출 수가 없는 거다.

그때 지은이 픽 웃는 음성으로 물었다.

- 이 시간이면 거긴 지금쯤 자정 아니야?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지.

“그래. 목소리 들었으니까 이제 슬슬 잠자리에 누울게.

- 내 꿈꿔야 해!

지은은 쑥스럽게 웃고는 그 말을 끝으로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서 엷은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쿠션에 머리를 뉘었다.

* * *

둠부캉은 다음 날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약속이 깨지고 말았다.

정보부의 업무 차 급히 동부 지역엘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모르긴 해도 다이아몬드 광산을 사이에 두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반란의 조짐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직접 달려갈 정도라면 발등에 엄청 급한 불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지태는 사실 둠부캉과의 식사에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와 맥 브라운 사이에 자신이 원치 않게 낀 것만 같아 부담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았는데 약속이 깨지니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심정이었다.

지태는 뜨거운 햇볕이 지상을 달구어대는 오후의 열기를 밟으며 호텔을 나왔다.

오늘은 프리타운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다.

여기저기 훑고 다니다가 운 좋게 탐정 사무소라든가 한국의 흥신소 같은 곳을 발견한다면 사기꾼 아바스 카마라에 대한 정보를 구할 요량으로 말이다.

놈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낼 수만 있다면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할 생각이었다.

어느 나라건 돈이 되는 일이라면, 설령 그곳이 불속이라 해도 부나비처럼 뛰어들 친구들은 수없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심부름센터 정도 되는 규모를 가진 사무실이 두어 군데 보이긴 했지만, 주로 해결사 노릇이나 해먹고 사는 건달 부류 같았다.

심부름센터가 자리한 허름한 3층 건물을 이제 막 빠져나온 지태는 길 잃은 아이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실망감을 안고 이대로 호텔로 복귀해야 하나 싶어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타다다다다.

저만치에서 낡은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일부러 부딪치려 하는 게 아닌가.

지태는 잽싸게 몸을 틀었다.

툭.

그와 부딪친 충격 때문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과정에서 지태는 손에 들고 있던 노란 서류봉투를 바닥에 흘렸다.

그런데 지태보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사내의 동작이 한발 더 빨랐다.

야구 모자는 바닥에 몸을 한껏 구부린 다음 노란 서류봉투를 주워 지태에게 공손하게 넘겨주었다.

많이 미안하다는 제스처와 함께.

그러나 지태는 아직 의심을 풀지 않은 눈길로 지갑이 들어 있는 바지주머니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갔다.

소매치기는 아닌 듯했다.

지갑은 바지주머니 안에 그대로 있었다.

‘뭐지, 저거?’

벌써 저만치 멀어져가는 야구 모자 사내를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던 지태는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사내가 일부러 떨구고 간 듯한 쪽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태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한번 훑어보고는 구두끈을 묶는 것처럼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쪽지를 손에 쥐었다.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거나 감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쪽지를 주머니에 넣어 두고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정보부인지, 대통령 직할 보안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중 어느 한쪽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까부터 최봉준은 머릿속에서 계속 주지시켜주고 있었다.

지태는 쪽지를 몰래 읽어보기 위한 장소를 찾기 위해 도로 건너편에 시선을 던졌다.

꽤 시설이 괜찮아 보이는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지태는 다소 느긋한 걸음으로 도로를 건넜다.

그러고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내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지태는 비로소 아까 사내가 떨구고 간 쪽지를 꺼내 펼쳤다.

[맥의 친굽니다. 미스터 한이 오퍼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하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부득이하게 이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미스터 한이 결코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면 오늘밤 8시를 전후해서 객실 안의 전등을 세 번 껐다 켜기를 반복해주십시오. 기타 자세한 것은 추후에…….]

‘헐! 뭐냐, 이거?’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시에라리온에 넘어오자마자 워낙 놀라운 일을 많이 겪은 탓에 이쯤은 별로 놀라운 축에 끼지도 못했다.

“좋은 조건? 손해를 볼 일이 없다고?”

지태는 입을 살짝 벌린 채 헛바람을 켰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오퍼상임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거래를 제안했다면 그건 분명 돈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은밀한 만남을 요청해올 정도라면 합법적인 상황은 백퍼센트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위험부담에 따른 보수가 꽤 쏠쏠할 수도 있겠다.

“뭐, 그렇다면야…….”

지태는 이 수상쩍은 제안 속에서 왠지 돈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을 느꼈다.

“그래. 돈만 된다면야 까짓 꺼 일단 부딪쳐보지, 뭐.”

카페 안으로 돌아와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갖다 놓은 커피를 마시며 지태는 통유리창 너머를 자연스럽게 훑어갔다.

이제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시선들이 쪽지를 던지고 간 사내까지 포함해 셋 이상은 될 것이다.

지태는 쓰게 웃으며 커피를 여유 있게 마신 다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호텔로 복귀했다.

* * *

호텔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 둠부캉이나 맥 브라운에게서 날아든 메시지는 없었다.

동부지역으로 출장을 간 둠부캉은 그렇다 치더라도 맥 브라운까지 호텔 내에서 얼굴 한번 스치지 못했다는 것은 좀 이상했다.

쪽지를 던지고 간 사내는 분명히 맥의 친구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후에 뭔가 간을 보기 위해서라도 접촉을 시도해 올 줄 알았다.

한데 무소식이다.

지태는 생각을 정리하듯 눈알을 뱅뱅 굴리다가 이내 고개를 털었다.

무슨 연유로 쪽지를 던졌으며 어떤 거래를 하려는 것인지는 일단 만나 보면 될 일이다.

지태는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무겁게 숨을 토해내는 것으로 단단하게 결심을 마친 지태는 벽에 꽂힌 방 열쇠 쪽으로 다가갔다.

키홀더에 꽂힌 열쇠를 빼면 이 객실 안의 전등이란 전등은 모두 다 소등이 될 것이다.

지태는 야구 모자 사내의 요청대로 열쇠를 키홀더에 넣었다 빼기를 세 번 연속 반복했다.

그리고 30분 뒤에 다시 한번 사인을 넣었다.

하지만 딱히 날아드는 연락이 없었다.

농락당한 것처럼 깜깜무소식이었다.

두 번째 사인을 보낸 이후로 대략 2시간 정도가 흐를 때까지 의문의 사내에게서는 그 어떤 메시지도 없었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지태는 조금은 짜증스럽게 입바람을 허공으로 훅 불었다.

벌써 10시 30분이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눈 먼 돈을 좀 만져보나 싶어서 나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던 터라 김이 푹 빠진 상태로 포기하려는 찰나였다.

똑똑.

그때 문득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태가 빠르게 다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 …….

두 번 연속 물었지만 대꾸가 없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지태는 문을 벌컥 열었다.

여차하면 주먹을 한 방 날려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바닥에 쪽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고 비상계단을 통해 로비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후문을 통해 좌측으로 50미터만 걸어오십시오.]

순간 지태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냐, 이 클리셰는? 스파이 영화를 찍자는 거냐?”

다시 한번 헛웃음을 삼킨 지태는 객실 문을 걸어 잠근 다음 객실 밖으로 나왔다.

사내가 시키는 대로 8층에서부터 비상계단을 걸어 내려와 후문을 통해 50미터쯤 걸어 나왔을 때 뒤에서 두 명의 사내가 불쑥 나타나 양쪽에서 지태의 팔뚝을 꼭 붙들었다.

지태는 매섭고도 단단한 눈빛으로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여차하면 반격을 가할 태세였다.

지태의 반응을 눈치챈 오른편의 사내가 팔뚝을 잡은 손을 얼른 놓아주었다.

“미안합니다. 사과는 나중에 드리기로 하고 일단은 이 자리부터 뜨시죠.”

사내를 돌아본 지태는 잠시 표정을 살피다가 이내 끄덕였다.

그들의 행동에서 그다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절박함이 엿보인 까닭이었다.

지태는 사내들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 한쪽에 외로이 주차되어 있던 차에 오르자 그들은 지태에게 다시 양해를 구한 다음 검은 안대를 씌웠다.

그래서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차를 몰아가는 내내 사내들은 강력 접착제로 입을 붙여 놓은 것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려가는 것은 아닌 듯했다.

다만 도로의 보수공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툭 하면 차가 거칠게 출렁거리긴 했다.

승차감이 지극히 좋지 않은 길을 따라 약 30분가량을 불편하게 달린 것 같았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꼬불꼬불한 골목이라도 지나는 듯 SUV 차량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약 1~2분가량 더 달렸을 즈음 마침내 SUV가 멈춰 섰다.

그제야 지태는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리시죠.”

호텔에서 지태의 오른쪽 팔뚝을 붙잡았던 사내가 정중하게 요청했다.

차에서 내린 지태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짙은 어둠 너머로 야자수 등이 꽤나 촘촘하게 박혀 있는 널따란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건너편으로는 불이 희미하게 밝혀진 2층짜리 건물이 우뚝 서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서 간간이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곳인 듯했다.

한눈에도 이곳은 주택이라기보다는 휴식을 즐기기 위한 별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쪽으로!”

사내가 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앞장선 사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중년사내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태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한! 나는 벤자민 마가이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벤자민이라고 불러주세요.”

지태는 손을 맞잡기에 앞서 자신을 벤자민 마가이라고 소개한 중년 사내를 빠르게 훑었다.

제법 훤칠한 신장에 세련된 외모, 그리고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적어도 겉으로 언뜻 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조금 뜯어 놓고 보면 아니다.

일부러 꾸미고 연출했구나, 하는 느낌이 퍼뜩 달려들었다.

이러한 첫인상을 보이는 경우엔 보통 두 가지 부류 중 하나였다.

첫째는 사업가, 둘째가 갱단의 보스급이다.

하지만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으니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 한다.

지태는 그제야 벤자민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맥 브라운 씨와는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지태는 자리에 앉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급하시기도 하시지. 우선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벤자민이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로 웃었지만, 지태는 입술을 꾹 닫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묻는 말에 어서 대답이나 해보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벤자민이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털털하게 웃었다.

“사업상 알게 된 친굽니다. 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맥 브라운은 기자가 아닙니다.”

“……?”

지태는 속으로 약간 놀랐다.

물론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기자가 아니라뇨?”

“사실 맥 브라운은 미국 CIA 아프리카지역 담당입니다.”

이제는 적당히 놀라는 척을 해줘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털어놓는 이유를 살피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인 거고.

“이런! 그럼 벤자민 씨도 정보부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지태의 물음에 벤자민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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