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정보부 팀장, 둠부캉!(2)
당황한 맥 브라운이 얼른 변명을 해왔다.
“아, 오해 마시오. 아까 취재를 나가던 중에 둠부캉의 차를 타고 들어오는 미스터 한을 우연히 봤을 뿐이니까.”
“둠부캉을 아십니까?”
“적어도 민완 기자라면 이 나라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건 당연하니까.”
맥 브라운은 자칭 민완 기자라며 스스로를 추켜세웠지만, 지태는 그딴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장 궁금한 것은 그 주요 인물군(人物群)에 둠부캉이 들어가 있다는 식으로 말한 맥 브라운의 생각이었다.
그를 왜 이 나라의 주요인물 속에 포함시킨 걸까.
이쯤 되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지태는 맥브라운에게 로비 한쪽에 마련된 휴게공간의 소파를 가리켰다.
“잠시 이야기를 좀 더 나눌 수 있을까요?”
맥 브라운은 건성으로 시계를 내려다보는 척하더니 선뜩 고개를 끄덕였다.
“본사에 원고를 송고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군요. 20분 정도는 시간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파에 앉자마자 지태가 다시 물었다.
“아까 이 나라의 주요 인물들이라고 했는데, 둠부캉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는 말입니까? 정보부 팀장 정도가 주요 인물이라니…?”
조금은 집요하다 싶은 지태의 질문에 맥 브라운은 피식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난 지태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해줘야할 까닭이 있겠나 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맥 브라운은 이내 결심한 듯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천천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 * *
맥 브라운과 헤어진 직후 객실로 올라온 지태는 창가의 티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의외의 사실들을 듣고 난 이후라서 지태의 머릿속은 현재 몹시 복잡하기만 했다.
‘이거 자칫 골치 아픈 상황에 휘말리는 거 아닐까?’
맥 브라운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히 개인대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권력 내부의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사람들 간에 얽힌 복잡한 권력 투쟁이었다.
그런 판국에 거기에 관련된 인물과 접촉을 했다가 혹시라도 상대 세력의 감시망에라도 걸려든다면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일 염려가 있었다.
맥 브라운이 굳이 처음 보는 자신에게 이 나라의 그런 속 깊은 사정을 말해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했다.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래 싸움에 애먼 이방인의 새우 등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그걸 알면서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는 말도 덧붙여줬다.
둠부캉을 소개해준 에릭의 성의가 고마웠고 사기꾼 아바스 카마라를 잡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되긴 했지만, 딱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지태는 나중에 그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적당한 선에서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였다.
띵동.
객실의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십니까?”
- 한! 둠부캉이오.
순간 지태의 인상이 구겨졌다.
‘헐!’
그러나 다른 한편 잘됐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전화로 느닷없이 관계를 끊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얼굴을 맞대고 정중히 사절하는 것이 둠부캉과 그를 소개해준 에릭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지태는 문을 열어 주었다.
둠부캉이 손에 든 테이크아웃 커피를 흔들어 보이며 하얀 치아로 환하게 웃었다.
“식사한 지 얼마 안 된다고 해서 간식 대신 커피로 준비했습니다.”
뭐냐, 다들 나만 감시하는 건가?
로비에서 만난 맥 브라운에 이어 둠부캉까지 마치 보안카메라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만 같아서 지태는 기분이 영 찜찜했다.
“아, 데스크에서 직원이 살짝 귀띔을 해주더라고요.”
의아하게 여기는 지태의 시선을 느꼈는지 둠부캉은 바로 변명을 해왔다.
“일단 앉으시지요.”
지태가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참, 여기 오기 전에 에릭과 잠시 통화했습니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둠부캉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를 고민하던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태가 잠자코 쳐다보았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통화 내용을 말해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리라 마음먹고 있는 참이었다.
“에릭이 그러더군요. 우리나라에 온 이유가 사기꾼을 잡으러 왔다고!”
에릭 입장에서는 지태를 도우려고 입국의 목적을 알려주었던 것 같다.
지태는 부인하지 않았다.
“국내에 있는 영세기업들을 등쳐먹은 친굽니다. 케냐에 온 김에 그분들 억울함이라도 풀어줄까 하고 넘어온 겁니다.”
“어느 곳이나 나라 망신을 시키는 새끼들은 꼭 있기 마련이지. 그것들은 아주 개새끼들이요, 매국노들이고!”
둠부캉은 자신의 일처럼 분개했다.
그 바람에 지태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쳤다.
살짝 아쉬워하고 있는데 둠부캉이 지태의 갈등을 부추기는 물음을 던져 온다.
“놈의 신상 자료, 가지고 있죠?”
지태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예, 물론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그걸 나한테 좀 보여 주시오.”
지태는 순간 뭔가에 현혹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놓아둔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캐리어를 열어 출국 전 이동구 사장이 건네준 봉투를 가지고 돌아왔다.
둠부캉이 봉투를 받아서 열어 보았지만, 그 안에 든 문서를 보고는 금세 찌푸렸다.
죄다 한글로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거 몇 자 안 되는 것 같은데 영어로 번역해 줄 수 있겠소?”
“그거야, 뭐…….”
지태는 둠부캉이 찾아오기 전 가슴속에 단단히 옭아매두었던 자신의 결심이 무너짐을 느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를 어쩌나.
도움을 주겠다는데 미친 척하고 받아?
그래! 사기꾼 새끼만 잡아서 바로 처리하고 이 나라를 뜨면 되는 거 아냐.
그럼 둠부캉과 더는 엮일 일도 없고 말이지.
지태는 속으로 다시금 결심을 하고는 씩 웃었다.
“좋습니다. 금방 끝납니다. 그런데 내 생각엔 이거 별로 쓸모가 없을 겁니다.”
“……?”
“작심하고 사기를 치려했던 놈인데 자기 인적 사항을 사실대로 알려 줬겠습니까?”
“하긴 그러네.”
둠부캉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 나라가 사기꾼들의 천국은 아니잖습니까. 몇몇 전과자들 중심으로 뒤지다 보면 금방 꼬리를 잡을 수가 있을 겁니다.”
지태가 고즈넉한 미소로 화답했다.
분명 그 사기꾼 놈의 활동 무대는 대도시이면서 수도인 이곳 프리타운일 것이다.
정보부에서 마음먹고 찾으려고만 한다면 그쯤은 일도 아닐 터였다.
지태는 볼펜을 가져와 그 자리에서 사기꾼 아바스 카마라에 대한 자료들을 쓱쓱 번역해 나갔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내려다보던 둠부캉이 은근히 뭔가를 물었다.
번역에 몰두하느라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지태가 둠부캉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맥 브라운을 만났느냐고 물었소.”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지태가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이윱니까?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나를 감시하고 있던 겁니까?”
지태는 번역 중이던 종이를 구기듯 쓸어 담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둠부캉을 쏘아보았다.
눈싸움을 하듯 마주 쳐다보던 둠부캉이 먼저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는 적당히 식어 버린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시더니 곧 내려놓았다.
“은근히 뒤를 밟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사실 미스터 한을 감시하는 게 아니오.”
“나를 감시하는 게 아니었다면……?”
“맥 브라운!”
“이 나라는 외국 기자들도 감시합니까? 행여 나쁜 기사라도 나갈까 봐?”
지태가 조금은 짜증이 섞인 말투로 묻자 둠부캉은 씁쓸하게 웃었다.
“기자가 아니라서 뒤를 밟는 것이지요.”
“아니라뇨? 유에스에이 투데이 기자라던데. 명함 받아둔 게 있어요. 보시겠소?”
금방이라도 명함을 꺼내 보여줄 듯하자 둠부캉이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맥 브라운은 기자를 위장한 미국 CIA 아프리카 담당입니다. 우리 정보부에서도 최근에야 눈치를 챘을 만큼 위장에 능한 사람이죠.”
‘헐!’
지태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도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마치 눈을 빤히 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멍 때리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시에라리온으로 날아온 첫날부터 지태에게 덥석 안겨지는 것들이란 아주 황당무계한 것투성이였다.
둠부캉과 맥 브라운이 자신을 가운데 두고 혹시나 몰래카메라라도 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뭡니까, 지금?”
“아까 맥 브라운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몰라도 미스터 한이 지금 많이 당황스럽고 황당해 하리라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내가 해준 말은 100% 진실입니다.”
“설령 당신의 말이 맞는다고 쳐도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런 이야기를 들을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물론 없지요. 미스터 한은 사기꾼만 처리하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다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기왕 맥 브라운과 대화를 나눴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것만 알려 달라는 겁니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드리는 부탁이고요.”
“별로 나눈 이야기가 없었습니다만.”
지태가 그 부분은 언급하기 싫다는 내색으로 떨떠름하게 내뱉자 둠부캉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한다는 것인지, 믿어주는 척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말해주지 않겠다면 나도 억지로 듣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암튼 그 번역이나 계속 해주시지요.”
지태는 사기꾼에 대한 의뢰를 부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이것을 건네주는 순간 왠지 둠부캉은 자신에게 또 다른 이상한 부탁을 해올 것만 같았다.
그럴 경우 차마 그것을 거절하지 못할 외통수에 걸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고.
‘그래, 빨리 처리하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지태는 속으로 어느 정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나라에 오래 머물 것도 아니고, 또 둠부캉과 맥 브라운, 두 사람이 무슨 수 싸움을 벌이고 어떤 신경전을 벌여도 머무는 동안에 신경만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까짓 거 정확히 중립만 지키면 될 일.
지태는 서둘러 번역을 마치고 그것을 둠부캉에게 넘겨주었다.
“최대한 빨리 알아봐 드리죠. 참, 그리고 여기 계시는 동안 잘 지내봅시다. 에릭의 친구라면 미스터 한도 내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둠부캉이 악수를 청해 왔다.
“에릭 같은 편안한 친구로 다가오겠다면 나도 둠부캉을 마다할 이유가 없죠.”
지태가 미소로써 그의 손을 맞잡았다.
* * *
지태는 둠부캉을 보내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몸은 피곤한줄 모르겠는데, 정신만큼은 삼 일 밤낮을 꼬박 지새운 것처럼 피곤했다.
둠부캉은 객실 문을 나서면서 오늘 함께 하지 못한 식사는 내일 꼭 같이 했으면 싶다고 했다.
‘그래, 뭐 별일이야 있겠어?’
지태는 편하게 마음을 먹자고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그 마음이 흐트러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즈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객실의 내선전화기가 꽤 요란하게 울려 댔다.
‘누구지? 전화를 걸어올 사람이 없는데?’
지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어쩌면 둠부캉일 수도 있겠다 싶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아, 미스터 한! 맥 브라운입니다. 쉬고 계실 텐데 허락 없이 전활 드려서 미안합니다.
안내데스크의 직원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용케 객실의 호수를 알아낸 모양이다.
지태는 속으로는 찡그렸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곱게 받아 주었다.
“괜찮습니다. 근데 어쩐 일입니까?”
- 오늘 따라 객지에서 적적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그래서 술 한잔했으면 하고 말이죠. 아, 이건 내가 먼저 제안을 한 거니까 각자 계산하자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사도록 하죠.
누가 술을 사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술을 얻어 마실 만큼 주머니 사정이 궁하진 않으니까.
다만 둠부캉에게 들은 말도 있는 터라 되도록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입에서 나간 대답은 그런 속마음과는 사뭇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