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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59화 (59/272)

059화. 정보부 팀장, 둠부캉!(1)

“얘, 그만 마셔. 너 이미 많이 취했어!”

바(Bar)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연신 술잔을 비워대는 지은을 보면서 오도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날렸다.

“아니, 내가 마시는 건 술이 아니야, 사랑이지. 아니, 그리움이야. 그래서 이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질 않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고플 뿐이지.”

“어이구! 그동안 사랑을 그리도 많이 고파 하더니 우리 임지은이가 드디어 시인 데뷔하셨네, 아주 위대한 시인이 나셨어!”

걱정스러운 눈빛이던 오도희는 금세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변했다.

“얘! 아무리 그동안 사랑에 굶주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 이러는 거 너무 빠른 거 아니니? 진지하게 만난 건 고작 서너 번이라며?”

“누구하고 똑같은 소리만 해대시네. 남녀관계라는 게 어디 만남의 횟수가 중요하니? 사랑이란 건 순간이야. 보자마자 뇌리에 확 달려와서 꽂히는 필이라구, 이것아!”

“그래서 지태 씨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천하의 임지은이가 필이 확 꽂혔다는 거니? 어휴, 안 믿겨!”

“흐흐. 안 믿기지? 실은 나도 그런데 너는 오죽 하겠니.”

지은이 바보스러운 표정으로 히죽 웃자 오도희는 갈수록 태산이라는 듯 입을 헤 벌렸다.

“얘가 사람을 여러 번 놀래게 만드네. 이거 아무래도 병이다. 내일 당장 병원에 한번 가보자.”

“병이지. 아무래도 불치병이지 싶어, 상사병! 너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야.”

“어휴! 기막혀, 정말.”

오도희는 헛웃음을 털어내며 앞에 놓인 온더록스 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툭 말을 던졌다.

“그렇게 목마르면 네가 우물을 파면은 되잖아. 전화 한번 해봐. 네가 먼저 전화하면 그 사람이 어디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오도희의 그 말에 지은의 눈빛이 순간 초신성처럼 반짝였다.

마치 놀라운 사실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 맞다. 그러면 되지. 근데 지금 몇 시니?”

“벌써 새벽 1시가 넘었어. 그건 왜?”

지은은 벌써 열손가락을 펴고 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픽 웃었다.

“바보!”

이 시간에 시차를 염려할 쪽은 자신이 아니라 지태가 하는 게 맞다.

만약 지태가 전화를 걸어오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다.

시에라리온과는 9시간이란 시차가 있으니 현재 그곳은 오후 4시.

“도희야, 네 말대로 아무래도 내가 먼저 우물을 파야겠다. 당장 목마른 쪽은 당연히 나니까 말이야. 흐흐.”

지은은 다시 한번 바보스럽게 흐흐 웃었다.

* * *

바다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지태의 상념이 문득 깨졌다.

진동으로 놓아둔 스마트폰이 울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 나야, 허니!

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지은의 혀 꼬인 애교에 지태가 헛웃음을 켰다.

- 어머! 지금 비웃는 거야?

“비웃는 거 아냐. 귀여워서 그래. 근데 아직 안 잤어? 거긴 벌써 새벽 1시가 넘었을 건데.”

- 잠들 수가 없었어. 오늘 하루 내가 무지 아팠거든.

“아팠어? 어디가, 얼마나 아팠는데?”

- 그거 나 걱정해 주는 소리 맞지? 후훗. 이것도 나쁘진 않은데?

“어디가 아팠냐고 묻잖아. 병원엔 다녀왔고? 지금 술 마신 거 같은데 아픈 사람이 술 마셔도 돼?”

- 이건 술이 아니야. 약이지.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주는 진정제라고나 할까!

그제야 지태는 지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번처럼 우리가 그럴 사이냐, 아니냐 하는 것 따위의 김빠지는 소리는 내뱉지 않았다.

그것은 지은의 진심 어린 고백을 짓밟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역시도 속이는 위선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술에 의지하는 건 별론데. 지금은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을 그냥 차곡차곡 쌓아놓기로 해. 그리고 나중에 우리 함께 펼쳐 보자.”

- 유후! 이제 보니 지태 씨도 시인이었네? 어쩜 그렇게 멋진 멘트를 날릴 수가 있어?

“나 역시 그리움이 사무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시인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 그거 정말이지? 그리움이 사무친다는 말…….

“그럼 당연하지! 그니까 오늘은 그만 마셔. 참, 옆에 누구 있어?”

- 도희랑! 오늘은 내 아지트에서 같이 잘 거야.

“아지트?”

그녀에게서 처음 듣는 소리여서 지태는 곧바로 되물었다.

- 한남동 본가 말고 나만의 공간. 내가 혼자 있고 싶거나 가끔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면 들어가서 쉬는 곳이야. 나중에 지태 씨 귀국하면 가장 먼저 데려와서 라면 먹고 가! 라고 할 곳이기도 하고.

지은은 제 말끝에 킥킥 웃었다.

“그거 엄청 기대되는데?”

- 기대는 무슨! 진짜로 라면만 끓여 먹이곤 바로 쫓아낼 건데.

지은은 다시금 킥킥 웃었다.

그때 스마트폰 너머에서 ‘지랄들 하세요, 지랄들을!’이라는 오도희의 질투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태는 오도희를 잠깐만 바꿔 달라고 했다.

그 소리에 오도희가 지은의 스마트폰을 얼른 낚아채 간 듯싶었다.

씩씩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 저예요, 지태 씨!

“아, 예, 도희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죠?”

- 저야 잘 지내긴 하는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지태 씨?

“그게 무슨…?”

- 우리 지은이한테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거잖아요. 얘가 지금 울다가 웃다가 완전히 미쳤어요.

지태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중에 귀국하면 도희 씨한테 맛난 거 많이 대접해 드릴 테니까 오늘 지은 씨 잘 부탁합니다.”

- 하하핫. 걱정 말아요. 오피스텔까지 잘 데려다주고 지태 씨 대신 내가 꼭 껴안고 자줄 테니까.

오도희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지은을 바꿔 주겠다고 했다.

지태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술은 그만 마시고 들어가라는 당부를 했다.

지은은 웬일인지 수줍은 새색시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전화가 끊기고도 지태는 한동안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타국이라서 이런 느낌이 더더욱 진하게 파고드는 것일까.

갑자기 외로움을 빙자한 끈적끈적한 그리움이 온몸을 휘감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이건 분명 배가 고파서일 거야.’

지태는 스멀거리는 외로움의 파편들을 훌훌 털어내고는 앉은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식사 이후로 아직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다.

우선은 공복을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에 지태는 호텔 방을 나왔다.

1층 로비 저편으로 카페와 나란히 붙어 있는 레스토랑이 보였다.

‘시에라리온의 음식 맛은 어떤지 한번 볼까?’

지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때 안내데스크 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닌가 해서 돌아보았지만, 그것은 동료 여직원을 부르는 소리였다.

‘호텔리어가 매너 없이 시끄럽게 굴기는!’

쓴맛을 다신 지태가 다시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어? 어!”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누구인지 미처 확인을 하기도 전에 지태는 그와 어깨를 툭 부딪쳤다.

순간 지태의 몸이 빠르게 반응했다.

본능적이고도 감각적인 동작으로 사내의 손에서 떨어지고 있던 물건을 가까스로 낚아챘다.

그것은 한눈에 봐도 고가의 전문가용 카메라였다.

실수는 자신이 했다.

앞을 미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미안합니다, 미스터!”

지태가 영어로 사과를 하자 사내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신장이 180센티를 훌쩍 넘겼을 것 같은 백인 사내였다.

밝은 색의 금발에 평소 운동을 많이 한 듯 체격 또한 좋아 보였다.

금발의 사내는 지태의 사과를 받는 것보다 그의 놀라울 만큼 빠른 대처에 더욱 놀란 눈치였다.

“오우, 굉장합니다. 동작이 마치 비호같았어요.”

“예?”

지태가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사내는 조금 전 자신의 카메라를 낚아채는 그의 동작을 흉내 내며 맑게 웃었다.

그러곤 자신의 소개를 해왔다.

“맥 브라운이오. 유에스에이 투데이 기잡니다.”

“아, 한지탭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지태는 자신을 소개한 다음 손에 들고 있던 맥 브라운의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카메라를 건네받으며 맥 브라운이 물었다.

“나처럼 기자는 아닌 것 같고, 혹시 비즈니스맨?”

“맞습니다. 업무 차 오늘 프리타운에 왔어요.”

맥 브라운은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작스러운 제안을 던져왔다.

“이것도 인연인데,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다, 차보다는 식사가 어떻습니까? 취재를 나갔다가 내가 그만 식사시간을 놓쳤거든요.”

지태 역시 마침 레스토랑으로 가려던 발걸음이어서 흔쾌히 허락했다.

“실수를 사과하는 의미로 밥은 내가 사도록 하죠.”

그러자 맥 브라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더치 트리트(Dutch treat)!”

지태는 맥 브라운 편한 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각자의 입맛대로 식사를 주문하고 나니 잠시 데면데면한 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럴 즈음 맥 브라운이 문득 물었다.

“아, 참! 한국에서는 국민 소개령이 안 내려졌습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미 웬만큼은 시에라리온을 다 떠났는데…….”

“요즘 이곳이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지태가 되물었다.

맥 브라운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람을 봤나’하는 표정으로 쓰게 웃었다.

거기에 반발하듯 지태가 덧붙였다.

“새로운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다시 또 예전 같은 전운이 감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즈니스맨이 그 따위 위험을 겁내서야 되겠습니까?”

“그럼 이 나라의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찾아오신 거다?”

처음엔 그저 어처구니가 없다고 지어보였던 맥 브라운의 표정이 이제는 점점 흥미롭다는 쪽으로 뒤바뀌어갔다.

지태는 대답 대신 입술만으로 웃었다.

“나하고 비슷한 측면이 많군.”

맥 브라운은 냉수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시선이 느껴지자 맥 브라운이 피식 웃었다.

“나 또한 모험을 일부러 찾아 즐기는 편이라서 해본 말이었어요.”

“모험을 즐기신다? 혹시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 박사의 팬입니까? 해리슨 포드가 주연이었던?”

“아, 인디아나 존스! 하하핫. 그 사람처럼 모험을 즐기긴 하는데 난 보물 찾고 동굴 뒤지러 다니는 게 아니라 분쟁 지역만을 골라서 찾아다닙니다. 그래야 특종을 잡을 수가 있고 덩달아 이것 또한 쏠쏠하니까.”

맥 브라운은 속물처럼 지폐를 세는 시늉을 해보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 지태는 피식 웃어주었다.

그사이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스테이크를 썰며 맥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지난달까지 시리아에 있다가 이곳으로 날아왔습니다. 뭔가 재미있는 취재거리가 생길 것 같아서.”

“제2의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기대하겠죠, 당연히?”

지태는 턱짓으로 맥 브라운을 가리키며 ‘기자니까!’라는 뒷말을 덧붙였다.

맥 브라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스테이크 한 점을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근데 나는 그렇다 치고 미스터 한은 무슨 일로 이 나라에 온 거요? 아, 시시하게 비즈니스니 뭐니 그런 핑계 말고 진짜 이유.”

“하핫. 비즈니스는 비즈니습니다. 사기꾼을 잡으러 온 비즈니스.”

“아까는 상사맨이라더니 혹시 인터폴입니까?”

“그런 건 아니고 사적인 비즈니습니다. 오더라면 오더랄 수도 있고.”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소소한 잡담들을 계속 이어 갔다.

약 한 시간에 걸친 식사를 마친 후 계산은 맥 브라운의 요구대로 각자 계산했다.

“미스터 한은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무를 생각입니까?”

레스토랑을 나와 각자 헤어질 때가 되자 맥 브라운이 돌연 물어 왔다.

“글쎄요. 사기꾼을 얼마나 빨리 잡느냐에 달렸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군요. 다행히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어서.”

“도움 주는 사람이라…….”

맥 브라운이 은근한 눈빛으로 갑자기 묘한 웃음을 뱉어냈다.

그 웃음의 의미가 지태는 몹시 궁금했다.

“왜 웃죠?”

“혹시 도움을 준다는 사람이 이 나라의 정보부요원 아닙니까?”

지태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헐!’

이 사람 뭐지?

지태는 대충 그런 눈빛으로 맥 브라운을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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