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케냐여, 안녕!(3)
“예. 에릭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곳에다 페이퍼컴퍼니를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업상 필요한 비자금을 좀 쌓아 두려고요. 나중에 한스무역의 사세가 확장되면 이걸 요긴하게 쓰려고 말입니다.”
지태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에릭이 털털하게 웃었다.
“나를 믿습니까? 너무 거리낌이 없으니까 내가 오히려 당황스럽습니다.”
“믿죠, 친구니까! 그리고 나를 해치려고 할 것 같았으면 에릭이 지금껏 흉금을 털어놓고 내게 호의를 베풀었겠습니까?”
“하하. 이거 원! 우문현답이랄 수밖에 없네요.”
한껏 고조된 기분으로 에릭이 호탕하게 웃어대자 지태도 따라 웃었다.
뷔이익, 뷔이익.
그때 진동으로 놓아둔 지태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몸서리를 쳐댄다.
발신자는 기민성이었다.
“어, 기 대리!”
- 지금 객실에 있지?
“아니! 나 지금 친구와 식사하러 밖에 나와 있는데.”
- 친구라니?
“어제 말했잖아, 에릭!”
- 아, 정보부 팀장이라는 사람? 에이, 참! 그럼 미리 전화하고 올 걸 잘못했네.
“지금 어딘데?”
- 어디긴. 당연히 이 시간이면 객실에서 방콕하고 있을 줄 알았지.
“내가 묵는 호텔이야?”
- 그래!
기민성의 목소리엔 엇갈린 상황을 탓하는 약간의 짜증스러움이 묻어있었다.
“그럼 여기로 올ㄹ… 아니다, 잠깐만!”
에릭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기민성을 이곳으로 부른다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다.
한국말로 통화를 했던 터라 에릭은 통화 내용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지태는 현재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그러자 에릭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의 위치를 모르니 지태는 스마트폰을 에릭에게 넘겨 기민성에게 찾아오는 길의 설명을 부탁했다.
그사이 메인 요리인 송아지스테이크가 두 사람의 앞에 놓였다.
에릭은 기민성을 위해 미리 하나 더 추가를 해둔 다음 종업원을 돌려보냈다.
좀 잔인한 감은 없지 않지만, 어린 송아지를 베이스로 한 스테이크라 그런지 식감은 아주 부드러웠다.
맛도 기가 막히고 훌륭해서 지태의 머릿속에 살짝 감돌았던 송아지에 대한 연민이 어느 순간 요리의 기똥찬 맛에 묻혀 버렸다.
“보석들을 처리하고 페이퍼컴퍼니 일만 마무리 되면 드디어 귀국인가요?”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에릭이 문득 물었다.
지태는 냉수로 입을 가볍게 헹군 다음 씩 웃었다.
“좀 들를 데가 있습니다.”
“들를 데라뇨?”
“시에라리온.”
“시에라리온은 또 왜? 거기에서도 오더를 받은 게 있습니까?”
지태가 미소를 그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무엘에 비할 바는 아닌데 그곳에도 사기꾼이 하나 있어요.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등쳐먹은 새끼가.”
듣는 순간 에릭은 쓴맛을 다셨다.
지태가 혹시라도 아프리카대륙 사람들 전체를 사기꾼으로 생각할까봐 염려가 됐던 거다.
지태가 퍼뜩 눈치를 채고는 고개를 다시 한번 가볍게 내저었다.
“어떤 대륙,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집니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놈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사무엘 같은 개자식이 있으니 에릭처럼 정의롭고 호기로운 사람이 더욱 돋보이는 것처럼!”
에릭이 머쓱하게 웃었다.
“결국은 또 기승전, 엎드려 절 받기군요.”
“그럼 난 여기 있는 동안엔 기승전, 에릭 띄우기를 할 겁니다. 에릭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하하핫. 이거 원! 무슨 말을 못하겠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내가 술 한 잔 거하게 사드려야겠는걸! 참, 그러고 보니 내가 어쩌면 미스터 한에게 도움 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도움이라뇨?”
“시에라리온의 정보부에 선이 닿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둠부캉이라고.”
그러다가 곧바로 쓰게 웃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아직 그가 미처 내뱉지 못한 후렴구는 바로 이랬다.
“다만, 아직 안 잘리고 그대로 있다면 말입니다!”
“어떻게 아는 사람인데요?”
“일 년에 한 번씩 회의가 있어요.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소속 국가정보부회의라고! 해마다 내가 부장님을 모시고 다녀왔는데, 그때 거기서 알게 된 친굽니다. 가끔 사적으로 정보교환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날아가기 전에 소개를 해주시면 아주 큰 도움이 되겠는데요?”
“내가 연락을 한번 취해 보겠습니다. 요즘엔 서로가 연락이 좀 뜸하긴 했지만.”
지태가 알겠다는 듯 끄덕이는데 뒤에서 기민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이거 완전히 부르주아네. 이런 비싼 데서 식사를 다 하고.”
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겼다.
둘 사이에는 굳이 그런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지만, 에릭과 인사를 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에릭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바짝 다가온 기민성을 가벼운 목례와 눈인사로 맞았다.
“기 대리! 인사해라. 내가 말했던…….”
“안녕하십니까! 큐브 인터내셔널 케냐지사의 기민성입니다.”
기민성은 지태의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릭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에릭 키라이더입니다. 반갑습니다.”
“한 대리, 아니지. 우리 한 대표가 어제 하루 종일 에릭에 대한 칭찬만 해대는 통에 귓불이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어요. 한데 직접 만나보니 과연 그럴 만하군요.”
“미스터 한의 친구답군요. 만나자마자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걸 보니…….”
에릭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주고는 기민성에게 자리를 잡고 앉기를 권했다.
이후 지태와 기민성은 에릭을 배려해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가끔 장난을 칠 때면 엉겁결에 한국말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게 비밀스러운 대화가 아니라는 것쯤은 앞뒤 맥락을 보면 알 수가 있어서 에릭도 한국말의 의미는 모르지만 유쾌하게 따라 웃었다.
“아까 네 목소리 말이야. 왠지 밝은데다가 거드름까지 피워대는 것 같던데, 혹시 좋은 소식이라도 물고 왔어?”
“이런 귀신같은 녀석!”
기민성이 정곡을 찔렸다는 듯 제 가슴팍 콱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알아본다는 데하고 이야기가 잘 된 거야?”
지태의 물음에 기민성은 의기양양하게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너도 그라프라고 들어봤을 거다, 영국 최고의 보석 회사!”
기민성은 비로소 어제 언뜻 언급했던 보석 회사의 이름을 밝혔다.
지태도 귀에 익은 회사였다.
언젠가 1,100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600억이 넘는 금액으로 캐나다 원석 채굴업체로부터 사들였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다이아몬드 원석 중 사상 두 번째로 큰 사이즈라고 했다.
그 이름이 레세디 라 노나라든가?
원석이 발굴된 보츠와나 지역의 언어로 ‘우리의 빛’이라는 뜻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토록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석 회사라니 일단은 믿음이 갔다.
지태가 흐뭇하게 끄덕이자 기민성이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그라프 케냐지사에 다녀왔어. 지사장하고 직접 면담을 했는데, 보석의 상태만 좋다면 후려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더라. 최대한 합리적인 가격으로 사들이겠대. 더구나…….”
기민성은 이 대목에서 흘깃 에릭의 눈치를 보았다.
뭔가 비밀스러운 말 같은데 여기에서 해도 되는 것인지 간을 보는 듯했다.
지태가 쓰게 웃었다.
“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분이야, 괜찮아!”
지태가 믿어준다고는 했지만, 에릭은 그럼에도 자리가 불편한 듯했다.
그가 기민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미스터?”
“아닙니다. 내가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이 친구가 그리 말을 했는데도 혹시나 하는 의심을 품은 내 잘못입니다.”
기민성이 사과를 하자 에릭이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자신은 정말 괜찮다는 표현.
상황이 정리되자 지태가 마음 급한 듯 재촉했다.
“말해 봐, 뭔데?”
“보석 대금은 네가 원하는 대로 전달해 주겠대. 스위스든 케이맨제도든 어디든 간에 원하는 대로 쏴주겠다는 거지.”
“내가 차보라이트를 불법취득한 줄 아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말로는 합리적으로 가격을 쳐 준다고 하지만, 그게 아닐 가능성이 크잖아. 안 그래?”
그때 에릭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보증을 서주면 될 것 같군요.”
“……?”
“……!”
지태와 기민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에릭은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내가 그라프 케냐 지사장인 윌리엄과 안면이 좀 있습니다.”
그러자 지태가 대화에서 벗어난 질문을 뜬금없이 던져왔다.
“신발 사이즈가 어떻게 됩니까?”
“예? 내 신발 사이즈는 왜?”
에릭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기민성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태의 썰렁한 아재개그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발이 굉장히 넓은 것 같아서 말이죠.”
“……?”
기민성의 예상대로 역시나 지태의 썰렁개그가 튀어나왔고, 에릭은 한국식 아재개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야, 한지태! 그런 것 좀 제발 하지 말라니까.”
기민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태는 괜히 먹히지도 않을 아재개그 한번 잘못 내뱉은 죄로 그 후로 한참을 에릭에게 한국식 썰렁개그의 개념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나중에야 겨우 이해한 에릭이 쓰게 웃었다.
여하튼 기민성에 이어서 에릭까지 발 벗고 도와준다니 그 문제에 대해선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그사이 기민성 몫으로 주문해둔 송아지스테이크가 나왔다.
세 사람은 곧 가벼운 대화들을 주고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점심식사를 가졌다.
* * *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에릭의 지원에 힘입어 그라프사와의 차보라이트 가격협상도 원활하게 진행됐다.
총 600만 유로, 한화로 80억 원이 조금 넘는 금액에 지태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차보라이트를 모두 넘기기로 했다.
송금은 이번에 새로 개설한 스위스은행 계좌로 해왔다.
에릭이 차보라이트와 함께 007가방에 넣어 준 돈이 200만 달러, 거기에 차보라이트를 처분해서 얻은 금액까지 합하면 총 100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목숨 걸고 케냐에 넘어온 대가라 쳐도 이건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지태는 시에라리온으로 떠나는 날을 이틀 후로 잡았다.
출국을 이틀 남기고 지태는 기민성과 에릭을 호텔로 불렀다.
작별의 정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룸서비스로 푸짐하게 저녁 식사 겸 술상을 차려 놓고 기다렸다.
기민성이 먼저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그간 내 골치를 아프게 만든 녀석이 떠난다고 하니까 속은 후련한데, 왠지 이쪽은 오랫동안 허전하고 시릴 거 같다!”
기민성은 자신의 옆구리를 검지로 콕콕 찌르면서 조금 오버하는가 싶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꽤 많은 정을 쌓았는데 막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기민성 역시 서운하고 몹시 허전한 듯했다.
지태가 기민성을 보며 그윽하게 웃었다.
“기 대리, 너 아니었으면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다. 고맙다, 친구야!”
기민성이 머쓱하게 웃는 사이 지태는 오히려 웃음기를 지우더니 정색했다.
“참, 그리고 내가 이런다고 절대 화내지 마라, 민성아!”
“야! 왜 갑자기 진지를 잡수시고 지랄이야, 사람 무섭게. 나한테 고맙다고 하는데 화낼 일이 뭐가 있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이것 때문에 하는 소리야!”
지태는 제 말끝에 바지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기민성에게 불쑥 내밀었다.
숫자와 문자가 혼합된 스위스은행의 계좌번호였다.
“뭐냐, 이거?”
“고마움을 절대 돈으로 사려는 건 아냐. 그러니까 화내지 말고 받아 줘. 이건 당연히 네 몫이기도 하니까.”
기민성은 지태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지태를 차근차근 읽어가듯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던 기민성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