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케냐여, 안녕!(2)
“햐, 이 친구 이거 한순간에 거의 재벌 다 돼버렸는데!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네 부조금을 챙겨두려고 했지. 분명히 거기 가서 죽어 돌아올 줄로 알았거든! 거금 10만 원씩이나 털리나 싶어 가슴이 나름 조마조마했었는데, 하하핫!”
기민성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암튼 그것들을 전부 처분해야겠는데 누구 사줄 만한 사람이 없을까?”
“찾아본다면야 당연히 있겠지. 근데 언제까지 알아보면 돼?”
“빠를수록 좋지, 뭐. 그리고 내가 귀국하기 전에 어디 좀 다녀와야 해서 그래.”
“어딜?”
“시에라리온.”
“허헛, 참! 거긴 왜? 그 나라에서도 오더 받은 게 있냐?”
“오더까지는 아니고, 그냥 부탁이라고 치자.”
“오더건 부탁이건 간에 그 나라도 케냐 못지않게 골 때리는 동네라는 건 알고 있지? 아니다, 그 나라에 비하면 이곳 케냐는 양반이야.”
“뭐 일단 가보면 알겠지. 암튼 그건 나중 문제고, 차보라이트를 사줄 만한 사람을 수배하는 건 어렵지 않지?”
“그 정도로 대량거래라면 좀 신중하게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을 잘 받아야 할 거 아니냐. 목숨 걸고 벌어온 건데 헐값에 내다팔 수는 없잖아.”
“그러긴 하지.”
기민성은 잠시 깔끔하게 면도된 자신의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뭔가 퍼뜩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가 영민한 눈빛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한 다리쯤 건너면 내가 알만한 곳이 있을 것도 같아.”
“괜찮은 곳이야?”
“이쪽 계통에서는 단연코 최고라고 할 수 있지. 암튼 일단은 내가 먼저 접촉해볼게. 그쪽에서 합리적으로 가격을 쳐주겠다고 약속을 하면 너랑 바로 연결해주는 걸로 하고.”
“그래, 땡큐!”
지태가 감사인사를 하며 씽긋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의미심장함을 담은 듯해서 기민성은 살짝 찡그렸다.
“야, 또 뭔데?”
“부탁이 하나 더 있어서.”
“하아~ 또 무슨 부탁? 난 네놈이 이제 뭘 부탁한다는 소리만 해도 심장부터 벌렁거린다.”
기민성은 짐짓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엄살을 떨어댔다.
“미리 겁먹지 좀 마라. 이건 심장 벌렁거릴 것도 없는 아주 간단한 부탁이야.”
“그럼 다행이긴 하다만… 뭔데?”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이곳에다 회사를 하나 차렸으면 하고.”
“웬 회사?”
기민성은 웬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지태가 피식 웃는 걸 본 기민성은 그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린 눈치였다.
“혹시 그거 서류상 회사?”
“그래, 페이퍼컴퍼니!”
“그건 뭐 하게?”
“어차피 내가 받은 차보라이트며 달러를 선우에 갖다 바칠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이걸 몽땅 싸들고 귀국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여기에다 좀 묶어두면 어떨까 싶어서 그래.”
그때 기민성이 돌연 무거운 표정으로 약간은 심각하게 물어왔다.
“너 혹시 나한테 숨기고 말을 안 한 거라도 있냐?”
“말을 안 해? 뭘…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는 건데?”
“내가 요 며칠 들은 말들이 좀 있어서 그래.”
“무슨 말을 들었는데?”
기민성은 잠시 고민하는 눈빛이더니 ‘그래, 까짓 거!’하듯 이내 털어놓았다.
“네가 몸바사에 가있는 동안 내가 이상한 전화를 좀 받았어.”
“이상한…?”
“그래. 그것도 졸라리 께름칙하고 수상한!”
기민성은 지태가 몸바사에 가있는 동안 골드웰 본사와 케냐 정보부에서 연락을 취해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 여기저기에서 귀동냥으로 조금씩 얻어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지태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방금 기민성이 말해준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이미 에릭이 일러줬거나 사무엘이 죽기 전 털어놓았던 내용들인 거다.
지태의 반응이 그다지 뜨겁지 않고 시큰둥한 것을 본 기민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뭐냐, 그 표정?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지태가 쓴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몸바사에서 에릭을 만난 일이며, 그래서 케냐정보부와 엉겁결에 공조를 하게 됐다는 이야기들을 전부 다 설명해주었다.
또한 누군지는 몰라도 현재 국내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점까지도.
“하, 시발! 이거 졸라 골 때리네.”
그제야 기민성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고, 다른 한편 황당하다는 눈빛이었다.
“나도 사실 최초로 흘러나온 출처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게 들었어. 사무엘에게 네 정보를 넘긴 곳이 다름 아닌 선우라는 것.”
“일단은 나도 선우글로벌이 가장 의심이 가. 걔네가 나한테 왜 그러는 것인지 그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지태는 후우~ 하고 입바람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내가 그래서 선우 측에 돈을 돌려줄 마음이 없다고 한 거다. 어차피 걔네는 처음부터 사무엘한테 사기 당한 돈을 받을 생각도 없었잖아. 오히려 그놈하고 결탁해서 나를 없애려 했고. 그런 마당에 내가 미쳤다고 그 새끼들한테 돈을 갖다 바치겠냐. 안 그래?”
“시발, 나 같아도 당연히 안 주지.”
기민성은 말하면 뭐 하겠느냐는 듯 거칠게 외쳤다.
“하, 시발! 이거 점심밥이 문제가 아녔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낮술을 땡겼어야 했네.”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당연히 그래야… 어, 뭐라고?”
“낮술 땡기자는데 뭘 놀라고 그래. 이대로 곧장 술집으로 가서 둘 다 뻗을 때까지 한 잔 땡기자.”
지태가 히죽 웃어 보이자 기민성이 어이없다는 식으로 쳐다보다가 결국 목젖까지 내보이며 크게 웃었다.
* * *
이튿날 오전이다.
또로로로, 또로로로.
지태는 아까부터 귓전에서 울려대는 객실 내선전화기의 벨소리 때문에 비로소 눈을 떴다.
아직 숙취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머릿속은 돌덩이 몇 개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거웠고, 지구의라는 놀이기구에 올라탄 것처럼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아이고, 골이야!”
지태는 어제 오후 기민성에게 호언장담했던 대로 식당에서 곧바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더러운 기분을 털어내고자 마신 술이었는데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왠지 몸만 혹사시켰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그 더러운 기분은 전혀 지워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로로로, 또로로로.
그나저나 일단은 저놈의 시끄러운 벨소리부터 잠재우고 볼 일이다.
저놈의 방정맞은 벨소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쌓일 판이다.
지태는 머리맡 너머로 게으르게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아, 미스터 한! 에릭입니다. 아직 잠자리에서 안 일어난 모양이군요?
목소리가 잠겨 있는 것을 듣고서 에릭은 약간 미안해하는 분위기였다.
“아닙니다, 아녜요. 어제 좀 과음을 했더니……. 아침부터 전화를 한 걸 보니 이젠 좀 한가해졌나 봅니다.”
- 예, 그래서 미스터 한이랑 점심식사나 같이 하려고 전화한 겁니다. 오늘 점심, 괜찮겠어요?
“아, 그럼요. 물론입니다.”
약속시간을 재차 확인한 에릭은 곧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지극히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다.
다시금 긴 기지개를 켠 지태는 침대에서 내려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꺼내 통째로 들이켰다.
갈증은 해소됐으니 이제 숙취를 해결할 차례다.
한국이라면 사우나에 가서 한바탕 땀이라도 흘리고 오겠지만 이곳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아쉬운 대로 온수 샤워라도 하려고 지태는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태는 한국으로 전화를 넣어 조현민에게 일일보고를 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은 우습다는 느낌이 불쑥 뇌리를 간질인다.
‘대표가 부하 직원한테 일일보고라니. 큭!’
그러다가 얼른 장난기 짙은 그 생각들을 지웠다.
농담이라도 이딴 소리를 했다간 천벌을 받을 것이다.
조현민을 동지이자 멘토로 모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행여 장난이라도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임지은이었다.
하루 한 번 꼬박꼬박 안부전화를 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한다.
비단 그 이유 하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 목소리가 왜 이리 잠겼어? 어젯밤에 노래방이라도 다녀온 거예요?
아직 목이 잠겨 허스키한 소리를 내자 지은은 대뜸 노래방 타령을 해댔다.
“웬 노래방? 케냐에도 노래방이 있어?”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거기 있는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암튼 시끄럽고! 약속대로 오늘 안부전화를 했으니까 이젠 됐지?”
- 어우, 왕짜증! 누가 의무적으로 전화를 하라고 했나, 뭐. 정말 눈곱만치도 의무 말고 다른 속마음은 없는 거야?
“다른 속마음이라니?”
- 가령, 내가 보고 싶어 미치겠다든가…….
“그만 끊을 시간이 된 모양이네. 이상한 소리 하는 걸 보니까.”
- 어우, 야~
지은의 귀여운 앙탈에 지태의 입에서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솔직히 말할까?”
- 뭐얼?
지은의 기대에 찬 음성이 폰 너머에서 엉큼한 고양이처럼 달려들었다.
“사실은 보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은 실었어. 지금 전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다가!”
- 어머, 정말? 솔직히 말해. 그 거짓말, 참말?
“그럼 없던 일로 할까?”
- 아니, 아니야! 절대 없던 일로 하지 마. 너무 좋아요!
드디어 터져 나오는 지은의 웃음소리가 참으로 맑고 싱그러웠으며 상큼하기까지 하다.
“웃지 마! 그러면 더 보고 싶어지니까.”
- 자기 오늘 따라 왜 이럴까? 내 애간장을 다 녹이려고 아예 작정한 거야?
그 뒤로도 지태는 한층 업되어 올라간 지은의 기분에 좀 더 기름을 부어준 다음에야 비로소 전화를 끊었다.
생각난 김에 기민성에게 컨디션은 어떠냐고 묻는 것까지 끝낸 후에야 지태의 스마트폰은 마침내 제 임무를 모두 끝냈다.
침대에 반쯤 걸친 상태로 휴식을 취하던 중 어느덧 정오가 되었고, 지태는 얼마 안 있어 에릭의 전화를 받았다.
“예. 바로 내려갈게요.”
호텔 로비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던 에릭이 환하게 반겼다.
좀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그가 오버를 해온 배경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직속상관뿐만 아니라 다른 보고라인에 있는 상사들까지 나를 차례차례 부르더군요. 그렇게 불려가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가! 사무엘 건을 잘 마무리 지었다고 말이죠. 이게 다 미스터 한의 덕택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번 일에서 오히려 내가 얻은 게 더 많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일이었는데, 그것을 에릭이 가능케 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극한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기까지 했고요. 내가 더 감사해야 할 일이죠.”
서로가 그저 인사치레로 내뱉는 소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칫 낯간지러울 수도 있는 인사치레에도 서로가 멋쩍어하지는 않았다.
“일단 식사하러 가시죠.”
에릭은 차로 조금만 달려가면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 나온다며 지태를 이끌었다.
호텔에서 에릭의 차로 약 10여 분쯤 달리자 넓은 정원이 돋보이는 레스토랑이 나왔다.
짙푸른 잔디밭 사이사이에 열대 수목들과 화초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어김없이 야외 테이블들이 마련돼 있었다.
이곳은 송아지스테이크가 유명하다고 했다.
지금껏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요리였지만, 에릭이 적극 추천을 하니 지태도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다.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에릭이 문득 물었다.
“관광하기 위해 며칠 더 묵는다는 것은 아닐 테고, 아직 케냐에서 할 일이 남은 겁니까?”
“정보부 요원으로서 묻는 겁니까, 아님 친구로서 묻는 겁니까?”
지태가 소리 없이 입술로만 웃으면서 되물었다.
“내 말이 취조하는 것처럼 들렸습니까?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난 그저 말이죠…….”
“어휴, 농담도 못하겠네. 그냥 웃자고 해본 소립니다.”
“난 또…….”
두 사람은 짧지만 유쾌하게 웃었다.
“에릭한테 선물 받은 물건들을 여기에서 몽땅 다 처분하려고 합니다.”
“들고 가지 않고 귀국 전에 여기에서 처분을 하시겠다? 그럼 혹시…?”
눈치 하나는 빠른 듯하다.
지태의 의중을 이미 읽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