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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55화 (55/272)

055화. 케냐여, 안녕!(1)

- 얀마, 너!

통화가 이뤄지자마자 조현민은 버럭 화를 내려다가 애써 참는다는 식으로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한 마디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기어이 내질렀다.

- 너 정말 죽고 싶냐? 왜 하루 종일 전화가 먹통인 건데?

“아, 정말! 너무 하시네, 형님! 오늘 전화 한 통 못할 만큼 바빴어요. 나름 목숨 걸고 액션영화를 찍었어요. 그니까 좀 봐줘요.”

지태가 말끝에 가볍게 웃었다.

- 인마! 하루 종일 내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든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냐. 내 심장이 얼마나 콩알만 하게 쪼그라들었는지 알아? 아니다. 어디 콩알이면 다행이게. 이젠 쪼그라들다 못해 아예 좁쌀만 해졌다!

그렇게 한껏 쏘아 붙이더니 조현민은 곧 진정된 목소리로 은근하게 물어왔다.

그게 본질이 아닌 거다.

- 그건 그렇고 괜찮아? 너 아무 일 없는 거 맞지?

“하핫, 참! 빨리도 물어보시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내가 지금 형님한테 이런 잔소리를 듣고 있는 거 아뇨.”

지태가 아기 옹알이하듯 투덜거리자 조현민은 그거 말이 된다는 듯 껄껄 웃었다.

웃음 속에는 무척 안심이 된다는 안도감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흐뭇하게 따라 웃던 지태가 이내 정색하고 오늘 루캉가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을 간략하게 다듬어 설명해주었다.

“으음…….”

조현민은 듣는 내내 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신음성을 흘렸다.

지태가 말해준 당시의 상황과 풍경들이 눈앞에서 선명히 그려지고 있는 듯 조현민은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침묵의 이유가 비단 지옥에서 살아왔다는 지태의 무용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무엘이 기선을 잡고 놈이 기고만장해 있을 때 내뱉었다던 충격적인 진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 난 지난번 필리핀의 후안이란 사람이 귀띔해준 그것도 아직 수상쩍어. 의심이 다 가시질 않았어. 그런데 이번엔 또 선우에서 그와 똑같은 오더를 내렸다? 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너를 자꾸만 죽여 달라, 없애 달라, 부탁을 하는 건데?

“……!”

지태라고 영문을 알 턱이 있나.

조현민과 마찬가지로 잠시 침묵을 뱉어낸 지태가 쓰게 입맛을 다신 후 말했다.

“내가 이곳 케냐에 와서 엄청난 돈을 벌게 됐지만, 반면에 골치 아픈 수수께끼도 동시에 떠안은 것 같아요. 정말이지 이걸 두고 웃픈 쾌거라고 해야 하나?”

- 웃픈 쾌거? 하, 시발! 듣고 보니 말이 되네, 그거!

조현민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 내일이라도 바로 귀국할 거지?

그의 물음에 지태는 단 1초도 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뇨, 형님.”

- 어! 왜?

깜짝 놀란 목소리였다.

“내가 몰래 챙겨둔 차보라이트하고 에릭이 내 몫이라고 건네준 보석과 달러부터 처리를 해야겠어요. 그리고… 기왕 아프리카에 넘어왔으니까 시에라리온에 들렀다 넘어갈 생각이에요.”

- 시에라리온? 아! 이동구 사장의 부탁으로 말이지?

“예. 내가 약속한 부분이니까요. 해결이 되던 안 되던 일단은 넘어가볼 생각이에요. 뭐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형님.”

지태는 가벼운 마음으로 단언했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시에라리온에 도착한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원치 않는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테니까.

지태가 이미 결정을 내리고 내뱉은 말이라서 조현민은 이렇다 저렇다 딴죽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다만,

- 꼭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주어진 건 아니니까 그곳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귀국해.

“예. 알겠어요, 형님!”

통화를 마친 지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다가 저도 모르게 떫은 입맛을 다셨다.

문득 또 다른 시어머니가 떠오른 까닭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임지은이었다.

이 시간쯤이면 깨어 있을까?

지태는 곧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너 번쯤 발신음이 달려간 뒤였다.

그녀가 이른 아침 청량한 이슬방울이 톡톡 터지는 듯한 음성으로 반겼다.

- 이른 아침부터 내 목소리가 그리웠구나! 내 말 맞지, 지태 씨?

헛, 참!

한국과 케냐의 시차를 그새 까먹은 건가?

지태는 헛기침 끝에 응답했다.

“여긴 새벽 1시야.”

- 아, 그렇지!

지은은 그제야 깨닫고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이른 아침 대신 깊은 새벽으로 시간만 바꾼 뒤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 그럼 이 심야에 내 목소리가 그리웠던 거야?

“허헛, 참! 오늘 하루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까 이제야 전화를 하게 된 거야.”

- 암튼 이 새벽에도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했다는 건 팩트잖아.

뭔가 기어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눈치여서 지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목소리가 그리워서 전화했다. 이제 됐어?”

- 응. 만족해.

하지만 그 만족스러움이 깨져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로 이어서 지태의 말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나 여기에서 며칠 더 묵은 다음에 바로 시에라리온으로 넘어갈 거야. 그래서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 정도 귀국이 늦어질 거고.”

순간 싱그러운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던 지은의 목소리가 빠르게 지워졌다.

대신 아까 조현민의 경우처럼 무거운 침묵이 폰과 폰 사이에 휴전선처럼 넓게 드리워졌다.

“여보세요?”

- 말해. 듣고 있으니까.

“난 지은이가 꿀이라도 한 사발 입에 문 줄 알았네. 갑자기 웬 침묵?”

- 몰라. 순간적으로 뭔가 뜨거운 것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귀국이 늦어진다고 하니까 왠지 좀 기운이 빠지는 것도 같고. 암튼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우리가 어디 그럴 사이나 돼? 우리가 다른 연인들처럼 아직 그리움에 몸부림 칠 정도로 애틋할 사이는 아니잖아.”

너무 기분이 다운된 듯해서 지태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한데 지은의 반응이 순간 날카로운 가시처럼 날아와 꽂혔다.

- 매번 그 소리! 그게 나로 하여금 얼마나 질리게 만드는지 알아요?

그러나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스스로 깨달은 듯 지은은 곧 목청을 약간 낮췄다.

-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난 이런 경험 처음이란 말이야. 내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누구를 생각하고 그리워해 보기는 처음이라고!

지태는 염치없다는 듯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 여자가 그간 너무도 외롭게 살아왔나?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미안해. 나도 지은 씨처럼 이런 느낌, 이런 감정을 품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아니다, 사실은 나도 이런 거 처음이라서 그래. 내가 서툰 표현으로 지은 씨의 맘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

- 진짜?

“그럼 진짜지!”

- 진심이 느껴지네. 그래서 이번 한번은 내가 봐줬다!

어느새 다시 싱그러움을 되찾은 지은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거기에 대고 지태가 진심을 담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귀국할 때까지 내가 좀 더 자주 전화할게.”

그렇게 여운을 남긴 한 마디를 끝으로 지태는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끊고도 지은을 떠올리며 한동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갈 길이 먼 내가 이러는 건 아무래도 사친데…….”

지태는 쓴웃음으로 고개를 내젓고는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고된 하루였다.

아니,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시간들.

피곤했다.

그래서 씻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잠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마음속에 피워낸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결국 그 바람은 하루의 고단함에 실려 시나브로 이뤄지고 말았다.

* * *

입은 옷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던 지태는 요란하게 귓가를 울리는 스마트폰 벨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액정을 살펴보니 에릭이었다.

그는 편히 잘 쉬었느냐는 인사와 함께 내일쯤 자신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아직 처리할 일들이 많아 오늘은 도저히 시간을 못 내겠다고 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말라는 말과 함께 지태는 전화를 끊고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오전 9시가 훨씬 넘은 시각.

새벽 2시가 가까워질 즈음 잠들었으니 일곱 시간 넘게 푹 잤다.

“으드드드드드!”

지태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미지근한 온수로 온몸의 근육들을 이완시키고 나온 지태는 다시 또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기민성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 어, 한 대리. 지금 어디야?

“여기 나이로비야. 어제 새벽에 도착했는데 너무 늦은 시각이라 일부러 연락 안 했어.”

- 사무엘은 찾았고?

“지금 전화로 다 설명하기엔 너무 길다. 만나서 얘기해 줄게. 오늘 점심 어때?”

- 그래, 좋아. 이따 호텔로 갈게.

뚝.

통화를 마치고 지태는 소파에 앉았다.

스위트룸의 격에 맞춰 응접소파와 테이블 등은 꽤나 고급으로만 꾸며져 있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지태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잠시 잊고 있었던 고난이도의 수수께끼 하나가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보기문항은커녕 그 어떤 힌트 하나 제시하지 않은 채 문제만 불쑥 던져진 막막함 앞에서 지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골드웰 인터내셔널과 선우글로벌.]

이들의 연관성은 과연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연결고리로 맺어져 있기에 자신을 이렇듯 압박해 오는가.

왜 끊임없이 없애려 드는가.

다만 골드웰의 속사정은 몰라도 선우글로벌의 경우엔 굳이 엮고자 한다면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허영만 상무.

그렇다 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여직원들을 성추행했다는 건 지태만 알고 있는 비밀이 아니다.

회사 내에서는 이미 공공연하게 퍼져 있던 비밀이었다.

겨우 그것을 입막음하려고 벌인 짓이다?

거기에 대입한다는 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퇴사할 때 망신을 준 것 때문에?

그 또한 허영만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을 벌일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지태는 답이 보이지 않는 갑갑함에 거친 한숨을 내쉬고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좋아.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언젠간 실마리가 보이고 해답도 찾아내겠지, 뭐.’

정오가 가까워오자 기민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5분 뒤에 호텔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이햐, 내가 그렇게나 많이 보고 싶었냐?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얼굴이 반쪽이 됐을까!”

기민성은 지태를 보자마자 그렇듯 흰소리를 내뱉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지태는 입을 떡 벌렸다.

“너 뭐냐? 갑자기 낯간지럽게 왜 이러는 건데?”

“살아서 돌아와 주니까 반가워서 하는 소리지.”

기민성이 다시 또 너스레를 떨어댈 때 지태는 떫게 입맛을 다시고는 자신의 복부를 가리켰다.

“우선 배부터 좀 채우자. 나 아직 아침도 못 먹었어.”

기민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길 건너편에 있는 정션몰(Junction Mall)을 가리켰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3층의 식당가에 이르니 주욱 늘어선 식당들에서 달려온 케냐 전통 음식들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기민성은 그중 한곳을 콕 찍어 지태를 안내했다.

지태는 그가 추천해주는 대로 메뉴를 골랐는데, 대체로 입맛에 잘 맞았다.

기민성이 추천한 메뉴는 필라우(Pilau)와 칠라피아라는 생선을 구운 요리였다.

필라우는 쌀에 향신료와 다진 고기, 야채 등을 넣어 만든 볶음밥 종류였는데 꽤나 맛이 좋았다.

“내일이라도 곧바로 귀국할 거야?”

기민성이 칠라피아라는 생선살을 바르면서 문득 물었다.

“나이로비에서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거 같아. 물론 기 대리, 너한테 도움 받을 일도 좀 있고.”

“야, 나한테 도움 받을 일이라고 하니까 벌써부터 겁난다. 이번엔 뭐 RPG나 수류탄 같은 거 구해 달라는 건 아니지?”

“네! 지랄을 하십니다!”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밉지 않게 눈을 흘기다가 이내 정색했다.

“사무엘한테서 받아낸 것들 말이다. 그걸 여기에서 전부 처분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받아 냈다기보다는 빼앗았다고 보는 게 맞는 말이지만, 기민성에게 일일이 설명하자니 입만 아플 것 같아 그렇게 둘러댔다.

에릭과 약속한 부분도 있으니 사무엘이 땅속에 묻혀 있다는 말도 발설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고.

기민성이 물었다.

“처분할 거라는 게 차보라이트야?”

“어!”

“몇 개쯤 되는데?”

“겨우 몇 개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돼.”

“도대체 보석의 양이 얼마나 되는데 그리 허풍이야?”

“아마 이 정도…?”

지태가 씩 웃으며 양손을 모아 차보라이트의 부피를 대충 가늠해주자 기민성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게 벌어진 입은 한동안 닫힐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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