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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54화 (54/272)

054화. 미끼? 기꺼이 돼주지!(4)

“자, 그럼 이제부터 밀린 계산부터 하자고! 우선 저기 있는 금고 비밀번호부터 읊어 봐.”

지태는 턱짓으로 사무엘의 등 뒤편에 있는 짙은 와인 빛깔의 금고를 가리켰다.

놈은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

“이 시발 새끼가!”

“으어어어어.”

그러나 금방이라도 목을 비틀 것처럼 한국말로 욕을 뱉어 내자 사무엘은 지레 자지러졌다.

지태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한쪽에서 벌벌 떨고 있던 피터를 불렀다.

“야, 피터!”

“예, 미스터!”

지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자 피터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퍼뜩 고개를 쳐들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후다다닥.

“지금부터 이 새끼가 숫자를 불러줄 거다. 그러면 너는 하나씩 또박또박 숫자버튼을 눌러. 알겠어?”

“예, 미스터!”

겁에 잔뜩 질려있긴 하지만 나름 씩씩하게 토해내는 피터의 대답 소리를 들으며 지태는 사무엘의 반쯤 돌아간 턱을 들어올렸다.

“비밀번호!”

“…….”

“너 세상 살기 싫지?”

이럴 땐 목을 비튼다는 협박보다는 아무래도 총이 더 효과적일 듯싶었다.

철컥!

지태는 내 말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듯 리볼버의 노리쇠를 뒤로 확 젖혔다.

“자, 마지막 기회다. 비밀번호! 버텨봤자 소용없어, 이 새끼야. 네놈 죽이고 용접기 갖다가 뚫어버리면 되니까!”

“하아! 사, 사, 칠, 오, 이…….”

사무엘은 마침내 포기한 듯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천천히 숫자를 하나씩 토해냈다.

비밀번호의 입력을 모두 마친 금고가 마침내 찌르렁 열렸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처지를 잊은 듯 피터는 순간 입을 떡 벌렸다.

금고 안을 가득 채운 달러 뭉치와 보석들의 수량이 실로 엄청났다.

순간 지태의 입가에도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피터!”

“예, 마스터!”

“넌 지금 당장 사무실을 나가서 바깥 사정을 좀 살피고 와. 그리고 만약 낯선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면 그중 대가리로 보이는 사람만 이쪽으로 올라오라고 해, 어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간 피터가 나무계단을 요란하게 밟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피터의 모습이 사라지자 지태는 사무엘을 비릿하게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제 네놈이 할 일은 없으니까 잠깐 쉬고 있어!”

그러고는 리볼버의 손잡이부분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냅다 후려쳤다.

뻐억!

지태는 비명도 못 지르고 나자빠진 사무엘을 바닥에 팽개친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금고 쪽으로 다가갔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달러며 유로화 등 세계 각국의 지폐 뭉치 뒤편으로 은행 통장과 무기명 채권 등으로 보이는 각종 문서들이 쌓아져 있었다.

지태는 그것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검정색 세무가죽으로 된 주머니들에 시선을 가져갔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매듭을 풀고 안을 살펴보니 곱게 커팅이 된 차보라이트가 수북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지태가 자신의 오른쪽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주머니 하나를 발목에 단단히 묶었다.

그것만으로는 아쉬운 생각에 또 다른 보석주머니를 왼쪽 발목에도 똑같이 매달아 묶었다.

이 나라에 목숨을 걸고 온 최소한의 보상을 챙길 뿐이다.

이것은 자신이 당연히 받아내야 할 몫이며 지극히 정당한 처사라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이 자리가 모두 정리된 후엔 또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혹시라도 정보부에서 이것들을 전부 압수해갈 것에 대비해 미리 챙겨 놓으려는 거였다.

지태는 몸을 일으켜 바깥쪽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산발적으로 들려오던 총소리마저 이제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이쪽에서 반격하는 총소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전부 제압을 당했거나 사살 당한 듯했다.

이제 곧 에릭이 올라올 것이다.

지태는 소파로 걸어가 지친 듯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마시다 말았던 온더록스 잔이 눈에 들어오자 냉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축을 하듯 독한 위스키를 한입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 * *

세상 그 어떤 인공적인 빛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케냐의 밤하늘은 맑고 선명했다.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등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보석들을 밤하늘에 뿌려 놓은 것처럼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지태는 목을 한껏 뒤로 꺾은 채 금방이라도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무리들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는 다시없을 전사 같더니 지금은 마치 시인이라도 된 것 같습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태는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며 그윽하게 웃어 주었다.

“정리는 다 끝났습니까?”

“정리할 것도 없습니다. 미스터 한이 워낙 설거지까지 다 끝내 놓은 터라 우린 뭐 달리 할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서운하다는 말씀처럼 들리는데?”

지태가 타이어 펑크가 난 것 같은 웃음을 흘리자 에릭이 곧 따라 웃었다.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미스터 한! 이건 뭐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아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지태는 무기 하나 들지 않은 맨손이었다.

한데 자동소총과 권총 등으로 무장한, 그것도 무려 열 명이나 되는 놈들을 혼자 때려눕혔다.

실로 믿기지가 않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거다.

그러니 에릭이 그런 말을 내뱉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목숨이 경각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나도 모르게 초인적인 힘이 저절로 나왔을 뿐이에요.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안 그렇겠습니까.”

지태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에릭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지태가 의아심을 담아 에릭에게 물었다.

“사무엘은 어디에 뒀습니까? 그리고 놈의 나머지 똘마니들은요?”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무엘과 우방가 등 덩어리들이 단 한 명도 눈에 띄질 않았다.

그러자 에릭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쓰게 웃었다.

“살려둬 봤자 나중에 또 설쳐댈 놈들입니다. 몇 년 살지도 않고 출소해서 버젓이 고개 쳐들고 다닐 놈들이에요. 어차피 우리에게 오더를 내린 윗선에서도 놈들이 살아있는 걸 별로 원치 않은 점도 있고…….”

“그럼?”

“모조리 목을 비틀어서 깊이 파묻었습니다. 이제 놈들의 흔적은 세상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이죠.”

당연한 일을 처리했다는 듯 말했지만, 에릭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악인이라 해도 죽여서 묻어버리는 일이 결코 좋을 리는 없었다.

“팀장님! 이곳 정리를 전부 마쳤습니다.”

에릭의 부하 하나가 달려와 그에게 보고했다.

“이제 그만 떠날 준비를 해.”

에릭이 허공에 입바람을 날린 후 명을 내렸다.

조금 있으려니 목조건물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기름을 부어놓은 듯 불길은 삽시간에 목조건물 전체를 거세게 삼켜버렸다.

에릭이 지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시죠, 미스터!”

* * *

몸바사의 호텔로 돌아온 지태는 서둘러서 짐을 꾸리고 체크아웃을 했다.

이제 몸바사에 머물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에릭 또한 이곳에 머물 이유가 사라졌다며 본부로 복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태더러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본부에서 헬기를 보내주기로 했다며 그걸로 이동하자는 거다.

“미스터 한!”

어둠을 뚫고 날아가는 헬기 안에서 에릭이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헤드폰을 착용하지 않은 지태는 창밖에 시선을 꽂아둔 채 아무런 대꾸가 없다.

자신의 목소리가 로터의 굉음에 묻혀 씹힌 듯하자 에릭은 지태의 팔목을 톡톡 쳤다.

“예, 에릭!”

지태가 미소 띤 얼굴로 왜 불렀냐는 듯 묻자 에릭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대고 외쳤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미스터 한은 이겁니다!”

엄지 척!

새삼스러운 칭찬에 지태는 멋쩍기만 했다.

그렇다고 받았는데 그냥 말 수는 없다.

지태는 똑같은 방법으로 에릭을 치켜세웠다.

“에릭이야말로 최곱니다! 당신은 오래토록 우정을 쌓고 싶은 친굽니다!”

그러고는 엄지 척!

서로 공평하게 칭찬과 덕담을 나눠 가진 두 사람이었다.

그때 에릭이 돌연 자신의 옆자리를 더듬었다.

그러더니 곧 옆에 놓아두었던 007가방을 불쑥 들어 지태 앞으로 내밀었다.

“뭡니까?”

지태가 에릭의 귓가에 대고 크게 물었다.

“이건 미스터 한의 몫이오.”

“……?”

“어차피 이거 본부로 들고 가봤자 국고에 귀속되지 않아요. 보나마나 사무엘을 잠재워 달라고 요청한 높은 자리에 계신 새끼들께서 서로 앞다투어 나눠 가질 게 뻔합니다.”

“그렇다고 이걸…….”

“사실 우리가 애쓴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번 일은 미스터 한이 다 차려 놓은 밥상이었어요.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세요, 미스터!”

“허!”

지태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에릭은 다짜고짜 007가방을 지태의 품에 덜컥 안겼다.

지태는 쓴맛을 다셨다.

뾰족한 바늘이 자신의 양심을 콕콕 찔러 대는 느낌이 들었다.

에릭이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미리서 제 몫을 챙긴 자신이 민망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에릭! 사실은 내가 말입니다…….”

자신의 속을 터놓으며 아낌없이 선의를 베풀어주려는 친구를 속인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솔직하게 고백을 하려고 입을 떼었을 때였다.

에릭이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그러면서 미소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뜻인가?’

지태가 멋쩍게 입맛을 다시자 에릭은 그 심정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남짓 날아온 헬기가 문득 같은 자리를 맴도는 느낌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착륙 지점을 잡느라고 선회하는 중이었다.

저 멀리에 나이로비의 야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인 듯했다.

그때 에릭이 지태의 귓가에 대고 외쳤다.

“미스터! 우리가 시내에 호텔을 예약해 두었어요. 헬기에서 내리면 우리 요원 하나가 모셔다 드릴 겁니다.”

지태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케냐에 날아와 생각지도 못한 십년지기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릭은 진정한 사내였고, 도리와 의리를 아는 멋진 사내였다.

이 머나먼 오지에 와서 이런 사내를 만났다는 것이 지태에겐 다시없을 행운처럼 느껴졌다.

* * *

헬기 착륙장에서 지태는 에릭과 인사를 나눴다.

“바로 귀국하는 건 아니죠?”

“그럼요. 며칠 더 머물 겁니다. 나도 이렇게 멋진 친구를 두고 바로 떠나기는 싫습니다.”

설령 이게 빈말이라도 우선 듣기엔 좋았던 모양이다.

에릭이 흐뭇함과 멋쩍음을 동시에 새긴 얼굴로 악수를 청해 왔다.

“정보부 상관들께 보고하고 급한 일만 마치면 바로 연락드리지요.”

“기다리겠습니다, 에릭!”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에릭과 헤어진 지태는 근처에 미리 대기해둔 정보부 소속의 SUV에 올랐다.

새벽 시간대의 한적한 도심을 가로질러 약 20분 정도 차를 달린 것 같았다.

이윽고 예약해둔 호텔에 도착하자 정보부 요원이 거수경례로 지태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돌아갔다.

안내데스크에 이름을 밝히자 직원은 곧 예약을 확인하고는 객실카드를 내주었다.

에릭이 신경을 많이 쓴 듯했다.

그가 예약해둔 곳은 스위트룸이었다.

지태는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캐리어를 한쪽에 던져두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제야 비로소 꽉 막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온종일 목을 죄어오던 긴장감들이 이제야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온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

시어머니의 등살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한국의 조현민에게 전화부터 넣어야했다.

지태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1시 20분.

한국 시각으로는 오전 7시가 넘었을 테니 조현민은 지금쯤 기상해있을 시간이다.

지태는 곧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목록을 뒤져 망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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