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미끼? 기꺼이 돼주지!(3)
사무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에 서있던 똘마니 중 하나가 잽싸게 선반에 놓인 양주 한 병과 온더록스 잔 두 개를 가져왔다.
“한잔할 텐가? 어쩌면 이게 생애 마지막 술일 텐데.”
“좋지. 대신 나중에 이 싸구려 술에 대한 청구서는 내 앞으로 보내지 말도록!”
사무엘이 기가 막힌다는 웃음을 뱉고는 지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잔에 천천히 술을 채우면서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지!”
“두 개 물어도 괜찮아. 아직 시간은 널널하니까.”
내뱉고 나니 급 후회가 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멘트다.
아울러 사무엘의 찡그려지는 인상에서 지태는 자신의 멘트가 무지 썰렁했다는 걸 바로 느꼈다.
“그래! 그렇게 정체를 다 알면서도 굳이 나를 찾았던 이유는 뭐였냐? 혹시 거꾸로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그랬던 거냐?”
“대답을 주기 전에 나도 하나만 묻자. 넌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한국에서 너에게 소스를 넘겨준 놈은 또 누구고?”
“아니지. 이런 식이면 대화가 재미없어지지. 질문과 응답이라는 게 핑퐁게임처럼 주고받아야 맛이 나는 거지.”
사무엘은 반쯤 채워진 온더록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몸을 여유롭게 소파 깊숙이 파묻었다.
지태 역시 몸을 뒤로 젖히며 발을 포개서 얹었다.
“그건 맞는 말이로군. 그래, 내가 먼저 대답을 주도록 하지. 당신도 알다시피 난 오더를 받아 날아왔어.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선우글로벌이라는 데서!”
“그래서 선우의 투자금을 대신해서 받으러 왔다?”
“그게 내가 받은 오더니까.”
“선우에서도 예전에 이미 포기한 돈을 내가 돌려줄 것 같아서 왔다? 하핫. 이 살벌한 땅에 네놈 혼자서?”
“내 모토는 이거야. 돈이 있는 곳이라면 그게 설령 지옥이라도 거부하지 말자! 자, 이번엔 네가 내 질문에 답할 차례야. 말해 봐, 나에 관한 소스를 던져준 게 누구지?”
“어차피 곧 뒈질 놈인데 내가 말을 아껴둬서 뭐 하겠나. 말해주지, 바로 선우야!”
“뭐?”
“귓구멍이 막혔냐. 선우라고, 선우글로벌! 거기에서 네놈에 관한 모든 소스를 다 넘겨줬어. 네놈이 곧 나를 찾아갈 거라고. 지금 한창 뒈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이니까 나더러 적당히 알아서 묻어 줬으면 한다고 말이지.”
꿈틀.
씰룩씰룩.
지태는 저도 모르게 양 눈썹을 꿈틀댔다.
너무도 황당하고 놀라운 이야기라서 양볼 역시 껌을 씹어대는 것처럼 마구 경련을 일으켰다.
“새끼! 엄청 많이 놀란 모양이네. 완전히 똥 씹은 표정을 하는 걸 보니까!”
사무엘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지태를 보며 냉소를 내뱉었다.
“시발, 참 엿 같구먼!”
지태가 쓰게 웃으며 한국말로 욕을 뱉어 냈다.
“방금 내뱉은 그거 한국말로 된 욕인가?”
사무엘은 지태의 입모양과 뉘앙스만으로 그리 읽은 듯했다.
지태는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모습으로 픽 웃었다.
그러면서 주먹을 쥔 상태에서 중지를 쑥 뽑아 올렸다.
“바로 이런 욕이었다. 이거 먹으라는 욕!”
사무엘이 쓴맛을 다시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곧 정색하더니 빤히 쳐다보았다.
“넌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돈을 받아 내겠다고 이 땅에 넘어왔다. 난 그런 네놈의 정체를 이미 다 알면서도 몸바사에서 처리하지 않고 굳이 이곳까지 불렀어.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이유가 뭐였을까?”
“퀴즌가? 근데 이거 정답 맞히면 선물이라도 주는 거냐?”
“정답이라면 당연히 선물을 줘야지. 최대한 안 아프게 살살 죽여주는 선물! 이건 내 이름을 걸고 꼭 약속하지.”
지태가 헛웃음을 삼켰다.
‘허, 놀고 자빠졌네, 개새끼!’
그러면서 속으로 진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사무엘이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말해 봐. 내가 왜 너를 이곳으로 불렀을까 하는 그 이유를!”
“그거야 뻔한 거지. 뭔가 나한테 빼먹을 게 있다고 대가리를 굴린 거 아니겠냐. 다른 놈도 아니고 넌 대가리를 굴리는데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주 영악한 새끼니까.”
거칠게 대꾸를 해줘도 사무엘은 그저 흐뭇하다는 표정이었다.
“빙고! 정답을 맞혔으니 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은 꼭 지켜 주지. 이봐, 모두들 내 말 알아들었지?”
사무엘은 의기양양하게 물개박수까지 쳐대며 박장대소를 하더니 뒤돌아 부하들에게 호기롭게 지껄였다.
이 대목에서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은 똘마니들의 몫.
“자, 그만!”
사무엘이 곧 한 손을 치켜들며 똘마니들의 수다를 멈추게 했다.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웃음소리며 추임새 등이 뚝 그쳤다.
“한지태, 너 회사의 대표라면서?”
문득 싸늘하게 내뱉는 사무엘의 눈빛이 그 순간 비릿하게 번뜩였다.
지태는 말없이 조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선우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발설했다면 한스무역을 창업했다는 것쯤 이 새끼가 모를 리 없을 터였다.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넘어오기 전에는 필리핀에서 크게 한탕 했었고 말이지?”
“그래, 그때 내가 좀 많이 벌긴 했지.”
“그렇게 챙긴 돈이 지금 네놈 수중에 고스란히 남아 있겠고?”
“그래서 뭐?”
“아니, 다른 건 아니고. 내가 그걸 좀 나눠 가지겠다는 거야.”
사무엘은 제 말끝에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수는 없다는 듯 낄낄댔다.
“시발, 조 까고 있네!”
“뭐라고?”
한국말이어서 놈은 퍼뜩 알아듣지 못했다.
“한 마디로 뻐큐라고, 시발 놈아!”
빠악!
그 순간 사무엘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지태의 뒤편에 서있던 놈이 권총손잡이로 머리를 후려쳤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감히 우리 보스한테!”
무방비 상태에서 순식간에 당한 것이라서 지태는 그 충격으로 잠시 옆으로 픽 넘어갔다.
지태는 곧 자세를 가다듬으며 일어났다.
기가 죽기는 싫어서 아픈 티를 내진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되면 투자금 이외에 치료비가 따로 또 추가된다. 그거 알고 있냐, 이 새끼야!”
“하, 이거야!”
사무엘은 급기야 혀를 끌끌 차더니 우방가를 쳐다보았다.
손동작으로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하니 우방가가 금세 알아들었다.
씩 웃고는 부하 한 녀석을 콕 집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호텔에서 지태의 스마트폰을 챙겼던 놈이다.
놈은 곧 지태의 스마트폰을 사무엘에게 건넸다.
그러자 사무엘은 그것을 받아 들고 카메라를 켜더니 지태의 사진을 거침없이 찍어대기 시작했다.
“야! 포즈가 별로잖아. 좀 더 실감나게 해보란 말이다. 이래서야 한국에서 네놈 사진을 감상할 새끼가 어디 겁이나 집어먹겠어?”
사무엘이 윽박지르자 아까 권총손잡이로 머리를 가격했던 놈이 권총의 총구를 돌연 지태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새끼! 아주 센스가 철철 넘치는걸! 그렇지, 바로 이거야!”
부하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사무엘이 칭찬을 내뱉고는 다시금 사진을 찍어갔다.
그러곤 갤러리에서 방금 찍었던 사진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아낸 듯 스마트폰을 지태에게 내밀었다.
“자, 이제 서울에 있는 네 동료인지 부하인지 하는 놈한테 이 사진 당장 전송해. 네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까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 돈을 송금하라고 말이야.”
지태의 표정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마른오징어처럼 일그러져 갔다.
겨우 참고 있는 마지막 인내심까지 바닥을 보였다는 표정.
하지만 사무엘은 아직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그 자신이 100% 유리한 고지에 놓여 있으니 지태의 표정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 이제 슬슬 움직이려는 거로구먼?
지태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순간 머릿속을 자극하며 최봉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이제 다 놀아 준 거 같습니다, 어르신.’
- 그래도 조심하게. 혼자 상대하기엔 그 숫자가 너무 많네그려.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 그거야, 뭐…….
최봉준과의 머릿속 대화를 마친 지태가 들숨을 깊게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곧 이제나 저제나 하며 도청으로 지금껏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에릭에게 사인을 보냈다.
“지금 바로 작업에 들어갑시다. 그전에 내가 먼저 움직일 거요!”
“……?”
사무엘은 뜬금없이 웬 독백이냐는 듯 지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태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웃음기가 채 입가에서 지워지기도 전에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발을 휘둘렀다.
슈웅.
타앗!
지금껏 억눌러왔던 분노를 한껏 얹은 강력한 한 방이었다.
지태의 발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빤히 쳐다보던 사무엘의 턱에 정확히 꽂혔다.
“칵!”
사무엘은 앉은 채 옆으로 벌러덩 넘어갔다.
“!”
순간 목조건물 복층 사무실 내부는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터라 자못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뭐해, 이 새끼들아! 얼른 조져!”
우방가의 다급하고도 억센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똘마니들은 허둥지둥 몸을 움직였지만, 그때는 이미 지태의 몸이 허공을 붕붕 날고 있었다.
빠악.
빠각.
소파등받이를 한 손으로 지탱하며 몸을 역모션으로 훌쩍 날린 지태의 발길질에 뒤편에 서있던 두 놈의 면상이 흉한 모습으로 깨졌다.
“헙!”
“컥!”
놈들은 몹시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워낙 비호처럼 날뛰는 지태인지라 붙들기가 쉽지도 않은데다가 총을 쏘자니 자칫 동료들이 다칠 것 같아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사이 지태는 거대한 체구만 믿고 고릴라처럼 달려드는 녀석들의 턱에, 관자놀이에, 목울대에, 겨드랑이 사이에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쩌억, 쩌어억,
쩌억, 쩌어억, 쩌어어억.
그때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우방가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급히 5연발 38구경 리볼버를 빼들었다.
- 조심해, 우측!
순간 최봉준의 경고음이 들렸다.
지태는 서있던 자세 그대로 몸을 틀며 한 바퀴 백텀블링을 했다.
찰나 방금까지 서있던 자리로 총알이 한 발 날아들었다.
타앙!
“윽!”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방가의 리볼버 총구를 떠나온 총알이 애꿎은 부하 녀석의 가슴팍을 시원하게 뚫어버린 거다.
지태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리볼버를 내려다보는 우방가의 옆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녀석의 눈알을 엘보로 찍어버렸다.
쩌억!
“아고고고고곡, 으아악!”
쿠다다당.
기괴한 비명을 지르던 우방가는 고목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요란하게 처박혔다.
지태는 허리를 숙여 놈의 38구경 리볼버를 주워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타당, 타당.
따랑따랑, 텅텅텅.
타다다다탕.
건물 밖에서 마치 양철 지붕을 때리는 것처럼, 아니면 흡사 콩을 볶는 것처럼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에릭과 정보부 요원들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한 거다.
양쪽에서 서로 다른 총기들이 쏟아내는 정신없는 총성 사이로 잘 버무려진 양념처럼 처절하게 내지르는 비명 소리도 간간이 섞여 들려왔다.
지태는 리볼버를 든 채 한쪽 구석에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피터를 흘깃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피터는 불에 덴 듯 놀라며 시선을 재빨리 피해 갔다.
인상이 험하고 덩치만 고릴라 같았지 이놈들처럼 갱단의 일원은 아닌 듯했다.
저런 놈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지태는 퍼뜩 고개를 돌려 사무엘의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자력으로 멀쩡하게 서있는 것은 딱 세 놈뿐이었다.
동료들 대부분이 쓰러지자 마음 놓고 총을 쏘아도 된다고 판단한 듯 두 놈은 자동소총을, 나머지 한 놈은 글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총구를 지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굼뜨게 움직이는 놈들보다 감각적으로 움직이는 지태가 한발 더 빨랐다.
번갯불이 튀듯 리볼버의 총구에서 불꽃이 세 번 튕겨 나갔고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확히 이마와 심장 등이 꿰뚫린 세 놈은 비명 한 번 크게 지르지도 못한 채 조용히 고꾸라졌다.
5연발인 38구경 리볼버엔 이제 딱 한 발이 남아있다.
지태는 소파를 돌아 아직까지 정신없이 바닥을 기고 있는 사무엘에게로 다가갔다.
덥석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강제로 반쯤 일으켜 앉혔다.
“너 이 새끼! 내가 아까 말했었지. 여기에 누울 무덤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라고.”
끄응!
사무엘은 보기 흉하게 돌아간 아래턱 사이로 분노의 신음성을 토해 냈다.
“하긴 이제 겨우 한 대밖엔 안 맞았으니 아직 눈깔에 힘이 들어가 있겠지.”
비릿하게 입술 끝을 끌어 올린 지태는 망설임 없이 사무엘의 복부에 독한 주먹을 꽂았다.
뻐억.
“컥!”
“이 새끼가 엄살은! 지금부터 앓는 소리가 내 귀에 한 번만 더 들렸다간 곧바로 대가리를 비틀어버린다. 알아들었어?”
지태가 미간을 좁히고 노려보자 사무엘은 두 다리를 잡힌 방아깨비처럼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