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겁 없는 질주(3)
작전상 필요에 의해 형식적으로 시내에 나온 것이니 할 일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별다른 감흥 없이 그저 어슬렁거리듯 시내를 몇 바퀴 배회했다.
시간을 때울 겸 애초에 마음먹었던 보석상이나 찾아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뜻하지 못하게 이미 대어가 걸려든 마당에 잔챙이를 잡자고 그물을 드리울 필요는 없으니까.
괜히 이쪽저쪽 어설프게 쑤시고 다니다간 현지인들의 이목이나 집중시키고 말 테니 차라리 그러지 아니함만 못하다.
그 과정에서 괜히 원치 않는 똥파리들이라도 꼬이게 되면 더욱 골치만 아파진다.
지태는 노을이 지는 한적한 해변에서 마음속으로 최봉준을 조용히 불렀다.
‘이게 어르신의 뜻이라는 거, 선물이라는 거 잘 압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러자 잠시 후 짜릿한 전기자극과 함께 최봉준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텔레파시처럼.
- 장사꾼에겐 그 특유의 직감이라는 게 있지. 난 그걸 잠시 빌려주었을 뿐이고. 이제부터 풀어 나가는 것은 자네의 몫이야. 잘해보게나.
어느덧 날이 저물고 사위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지태는 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호텔로 돌아오자 안내데스크 건너편에서 피터가 아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지만, 지태는 모른 척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곧장 객실로 올라왔다.
그 뒤로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똑똑.
문득 객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룸서비스입니다.”
“룸서비스? 시킨 적 없는데?”
“저희 호텔 피터 지배인님의 특별 서비스예요.”
순간 지태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문을 열어 주자 흑인 여종업원이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묵례를 한 뒤 요리가 올려져있는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여종업원이 티테이블 위에 요리를 내려놓고 나가자 지태가 비로소 다가와서 그것들을 살폈다.
지태의 마음을 얻으려는 듯 꽤나 공을 들인 흔적이 엿보였다.
로브스터를 베이스로 한 각종 해물 요리였다.
“공짠데 일단 먹고 보지, 뭐.”
늦은 점심을 먹은 후라 아직 크게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해물 요리여서 입맛이 당기긴 했다.
‘엉?’
지태는 포크를 집어 들려다 말고 문득 멈췄다.
접시 밑에 두 번 접은 쪽지가 한 장 깔려 있었다.
[특별히 엄선해서 올려 보낸 해물 요리가 부디 미스터의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요. 식후에 괜찮으시다면 밑에 내려와 간단히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물론이지. 한국 속담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거든!”
지태는 만족스럽게 웃고 포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요리를 보내온 피터 입장에서는 미끼용 쥐약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태 입장에서는 몸에 좋은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호강에 겨운 저녁식사를 마친 지태는 마치 놈이 접근해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하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충분히 시간을 때운 다음에야 동네 마실 나가듯 느긋하게 호텔로비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피터가 로비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거 의외인데?’라며 두리번거리는데 현관문 너머 저쪽에서 손을 흔들어대는 피터가 보였다.
“여깁니다, 미스터!”
퇴근 복장인 듯 오후에 보았던 슈트 차림이 아니었다.
요란한 꽃그림이 그려진 남방셔츠를 입고 있었다.
호텔 안이 아닌 밖에서 그를 기다린 것을 보면 호텔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왜 안에 안 계시고?”
“퇴근 후에 객실 손님과 사적으로 만나는 건 모양새가 그다지 좋질 않아서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주세요.”
굳이 미안할 것까지야.
지태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럼 술을 마시러 시내에 나가야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해변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꽤 괜찮은 술집들이 모여 있어요. 그리 가시지요.”
피터가 에스코트를 하듯 손을 내밀어 지태를 이끌었다.
그의 말대로 약 5분 정도를 걸어가자 외지 관광객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술집들 몇 곳이 보였다.
그중 한곳을 마치 자기 집처럼 피터가 주저함도 없이 들어섰다.
단골 술집인 모양인데 평수가 족히 80평은 되고도 남을 거 같았다.
실내 분위기는 바와 가라오케를 반반씩 섞어 놓은 듯했고, 테이블을 절반쯤 채운 손님들은 관광객들보다는 내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살짝 몸만 숙여도 자칫 속옷이 보일 만큼 짧은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테이블 사이를 바삐 누비고 다녔다.
지태가 자리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자 피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였다.
“외국에 나와 외롭고 적적하실 텐데, 진하게 객고 좀 푸시겠습니까, 미스터?”
파트너를 붙여 주겠다는 의미 같았다.
지태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 그럴 생각 없소. 술이나 간단히 하자는 말에 응한 거니까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십시다.”
“아, 예. 그러시죠.”
피터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후 미니스커트 아가씨를 불러 독한 위스키 한 병과 안주를 주문했다.
객쩍은 피터의 한마디에 대화가 끊기니 잠시 데면데면한 시간이 찾아들었다.
피터는 괜히 자신의 턱을 한 번 쓸어 가는가 싶더니 슬쩍 지태의 안색을 살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데 지태에게 특별 룸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렇듯 술자리에 불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피터를 보며 지태가 씩 웃었다.
“피터! 내게 궁금한 게 있습니까? 그럼 편하게 이야기를 꺼내 봐요. 후한 대접까지 받았는데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소.”
“하하. 들켰나요?”
그럼 노골적으로 티를 내는데 못 알아먹겠냐, 인마!
지태는 말없이 피식 웃었다.
“사실 아까 미스터한테 받은 명함을 보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좀 해봤어요. 큐브 인터내셔널이 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종합상사더군요.”
그러기를 바라고 가짜 명함을 건네준 것이다.
지태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
모르긴 해도 미끼를 단단히 물긴 한 것 같았다.
“대한민국 무역 업계에선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삽니다.”
“아, 열 손가락!”
피터는 예의 그 오버가 섞인 감탄을 내뱉더니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큐브 인터내셔널에서 보석 광산에 어느 정도 규모의 투자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후훗!’
지태는 순간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대답을 원하듯 빤히 바라보는 피터에게 지태는 검지 하나를 쏙 펼쳐 보였다.
“100만 달러씩이나?”
지태가 피식 웃었다.
‘고작 100만 달러라고? 새끼, 생각하는 수준하고는!’
지태는 고개를 두어 번 세차게 내저었다.
“거기에 0을 하나 더 붙여서!”
“헉! 그, 그럼 1000만 달러?”
실제 투자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미끼인데 좀 허풍스럽게 뻥을 친다 한들 어떠랴.
지태는 이 대목에서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꾹 눌러 참았다.
“와우, 와우!”
피터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 금액에 몹시 놀랐다는 듯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사이 주문한 술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고 피터는 정성스럽게 지태의 잔을 먼저 채워 주었다.
“투자 방식이라든가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아,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잘 아는 지인이 광산개발업자라서 한번 물어보는 겁니다.”
마치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내비칠까 봐 피터는 얼른 사족을 붙였다.
“방식이라든가 조건 등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밝히긴 어렵지만, 내가 뭔가 꼭 성과를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럼 제 지인에게 투자유치 설명을 할 수 있게 기회 한번 주실 순 없습니까?”
“글쎄요…….”
지태는 잘나가다가 옆길로 새듯 그 대목에서 대충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렸다.
피터는 그럴수록 더욱 집요하게 지태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애썼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적당히 밀당을 하다가 지태는 하루 정도 더 생각해보자며 피터와 헤어져 호텔로 돌아왔다.
몸바사에서 맞는 피곤한 첫날이었지만, 사무엘을 찾아낼 아주 유력한 실마리를 찾은 날이어서 지태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숙면을 취할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럽게 알코올도 섭취했다.
오늘밤은 이 흐뭇한 기분 그대로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똑똑똑.
객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지태는 잠에서 깼다.
그간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이었다.
적어도 열 시간 정도는 시체놀이를 한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누구세요?”
겨우 졸음을 떨쳐내며 지태가 외쳤다.
“룸서비스입니다. 지배인님의 특별히 올려 보냈어요!”
‘헐! 그 새끼 진짜 정성이네!’
지태는 쓰게 웃고는 잽싸게 바지 하나만 몸에 꿰찬 채 문을 열었다.
담당이 바뀐 듯 어제 보았던 그 여종업원은 아니었다.
식사를 내려놓고 나가자 지태는 우선 피터의 메시지가 없나 하고 그릇 밑부터 살폈다.
‘엥?’
오늘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 내젓는 찰나 객실 내선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피터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미스터! 좋은 꿈 꾸셨습니까?
이 호텔은 고객들 꿈까지 관리해 주나.
지태가 소리 없이 입으로만 웃고는 일부러 퉁명하게 대꾸했다.
“부담스럽게 룸서비스는 왜 자꾸 보냅니까? 어제 보내온 것은 호의로 받을 테니까 오늘 것은 객실 숙박료에 추가하세요.”
- 아, 알겠습니다. 다신 올려 보내지 않을 테니 방금 그것까지만 제 호의로 받아주세요, 미스터!
그냥 해 본 소리야, 인마.
지태가 다시금 입술로만 씩 웃은 다음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럼 피터의 호의가 고마워서 이번까지만 받습니다. 대신 앞으론 안 됩니다.”
- 예, 알겠습니다, 미스터! 한데 오늘 스케줄은…?
“이 호텔은 고객들 스케줄까지 관리해 줍니까?”
- 아, 그, 그런 게 아니라…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괜찮소. 근데 스케줄은 왜 물은 거요?”
피터에게 무안만 주고 말을 막아버리면 안 된다.
적당히 튕겼으니 이제 놈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말문이 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밀당의 기본 법칙.
- 예, 사실은 어제 미스터와 헤어지고 곧바로 지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미스터에 대해 이야기를 살짝 흘렸더니 저더러 꼭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어찌나 사정을 하던지…….
피터가 말꼬리를 흐리는 사이 지태는 자못 고민스럽다는 식으로 신음성을 흘렸다.
놈이 폰 너머에서도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제법 큰소리로.
“확실한 사람입니까, 그 지인이라는 분?”
- 아, 그럼요. 제가 보증합니다.
“그럼 뭐 일단 만나서 이야기나 좀 들어 보죠. 피터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로서도 손해를 볼 건 없으니까. 그래요. 약속 잡아 봐요, 피터!”
지태의 긍정적인 대답이 떨어지자 기뻐하는 피터의 목소리가 여과 없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전화를 끊고 난 지태는 일단 피터가 보내온 요리로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온 다음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한국은 지금쯤 오후 4시쯤 되었을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조현민은 자신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지태는 피식 웃고는 통화목록을 뒤졌다.
* * *
건너편 책상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문득 멈췄다.
그러자 지금껏 스마트폰에 시선을 박아둔 채 잔뜩 인상을 긁고 있던 조현민이 괜히 박수연에게 시비를 걸었다.
“뭘 봐?”
“어머, 전무님은 정수리에도 눈이 달렸어요?”
박수연이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