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검은 대륙, 케냐로!(3)
“어머! 현욱 오빠, 지금 쫄았어? 그런 거야? 햐, 이거 해외토픽에 나올 일이네?”
조소를 한가득 깨물고 있는 지은의 표정에 이현욱이 치욕을 참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시발! 낯짝 저리 안 치워?”
누가 보면 얼굴에 단풍이라도 물든 줄 알겠다.
이현욱은 이마까지 벌게진 얼굴로 이를 갈더니 이내 지은의 어깨를 톡 밀치며 홀 안 깊숙이 걸어갔다.
그 뒤에 대고 지태가 모두가 다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외쳤다.
“어이, 친구! 저번에 보내준 선물은 그닥이었어. 그래서 그냥 폐기처분하려다가 그건 도리가 아니다 싶어서 반품시켰는데, 이해하겠지? 다음번엔 좀 더 센 놈들로 보내줘! 그땐 반품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즉사 시켜버릴 테니까!”
이현욱은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은 표정으로 근처에 빈자리가 보이자 몸을 감추듯 의자에 깊이 파묻어버렸다.
* * *
멤버십 바 필링의 주차장에 지은은 승용차를 세워둔 채 지태를 따라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곳인데 번거롭게 대리 기사를 뭐 하러 부르냐는 지태의 의견을 좇은 거다.
요사이 젊은 층에서 많이 찾는다는 수제맥주전문 펍이었다.
알싸한 맛과 향이 살아 있는 생맥주 두 잔을 시켜 놓고 지태와 지은은 마주보고 앉았다.
“미안해, 지태 씨!”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손등으로 닦던 지은이 문득 말했다.
“뭐가 또?”
“조금 전에 거기 데려간 거!”
“괜찮다고 했잖아. 정말이야. 나도 은근히 후련했어. 지은 씨 덕분에 그런 자리도 구경해보고, 재벌 딱지 붙은 친구들 골려먹기도 하고.”
지태가 입모양으로만 웃었다.
“사실 제대로 된 남친 생기면 꼭 한번 그러고 싶었거든. 나도 재벌가에 속한 사람 중에 한 명이지만, 늘 그 애들 노는 꼴을 보면 정말이지 역겨웠거든!”
“한때는 그리 놀았다면서, 뭘?”
“그땐 마음이 어렸고! 야, 한지태! 자꾸 시시콜콜 따질래?”
지은이 곱게 눈을 흘겼다.
지태는 그 순간 지은이 재벌의 딸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으로서는 언감생심 넘보지도 못할 아주 높고도 먼 곳에 서있는 까닭이었다.
“지은 씨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불쑥 새나왔다.
“재벌 딸은 왜 안 되는 건데?”
지태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챈 지은이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되지, 당연히!”
“이유는?”
“첫째, 골치 아픈 건 내가 딱 질색이거든! 아까도 봐? 잘난 놈들끼리 그룹 지어 놀던 필링에서도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 감히 재벌가의 딸을 넘보라고? 아이고, 난 그런 거 감당할 자신도 없거니와 골치 아프게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불려 다니기도 싫거든!”
“이 사람 저 사람이라니?”
“만약 지은 씨와 사귀기라도 하면 부모님은 물론이고 일가친척이라는 사람들이 다 불러댈 거 아냐. 도대체 어떤 놈하고 우리 지은이가 교제를 하는지 보겠다고. 그러다가 내가 겨우 이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휴! 감당 안 된다.”
지태가 지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미리 나약하게 굴어대는 지태의 모습이 싫은 듯 지은은 살짝 찡그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지태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임경남 씨의 동생이라는 점!”
“그건 좀 오버다. 지태 씨가 울 오빠랑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내 인생은 나의 것이야!”
지은이 다부지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지태가 쓰게 웃었다.
지은은 자신이 지난번에 그녀의 오빠인 임경남을 어떻게 요리했는지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지금쯤 임경남이 자신을 향해 얼마나 이를 갈아대고 있을 지는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허헛!’
그러다가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떡 줄 사람은 전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셔대는 꼴이라니.
“지금 우리들 뭐 하고 있냐? 사귈 것도 아닌데 별 시답잖은 소리나 늘어놓고 있고!”
지태는 이제 그다지 영양가 없는 소리는 그만두자는 듯 고개를 털고는 맥주잔을 들어 반쯤 벌컥벌컥 마셨다.
“아닌데! 난 지금 어떤 순간보다도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건데!”
“뭘 진지해, 이 친구야! 우린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몇 번 만났을 뿐이야. 애초에 어떤 호감을 갖고 만난 게 아니라고!”
“호감이라든가, 어떤 목적을 갖고 정략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서 난 그게 더 자극적이고 신선해. 내가 원하던 만남이란 바로 이런 거였으니까.”
“옛날부터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어. 끼리끼리 논다는 말! 그거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제 분수에 맞게 놀아야 돼. 내가 언감생심…….”
“난 지태 씨를 그렇게 안 봤는데! 그냥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사람으로 보았는데, 아닌가? 내가 잘못 본 건가?”
“물불 안 가리는 건 맞는데, 그것도 상황 봐가면서 덤비지 무턱대고 덤비는 건 아니야. 그렇게 무턱대고 덤비는 놈들을 전문 용어로 이렇게 불러. 똘ㆍ아ㆍ이라고!”
말을 하고 보니 좀 우스웠다.
지태는 제 말끝에 결국 큭! 하고 쓴웃음을 뱉었다.
그러나 지은은 아니었다.
대화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그 표정 그대로 아주 심각하기만 했다.
너무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은 때문에 지태 역시 자동적으로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리 심각해? 사람이 지나치게 감성적이어도 못 써!”
“감성적? 난 순간의 감정으로 이러는 거 아냐. 뭐랄까? 지태 씨는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주위에선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 같은 거였어. 그래서 자기를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던 거야.”
“그럼 딱 거기까지만 해. 그리고 멈춰. 우린 안 돼. 현실을 직시해, 이 바보야.”
지은이 냉정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지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맑은 두 눈에 금방이라도 이슬방울이 맺힐 것처럼 촉촉이 젖어있었다.
지태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느닷없이 이야기의 방향이 이상하게 흐른다 싶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까지 와버렸다.
첫눈에 홀딱 반해 일사천리로 뭔가 썸씽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할리우드영화 속 주인공들도 아니고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태가 멍한 기분에 휩싸여 있는 반면 지은은 곧 현실을 자각하는 듯했다.
그녀 안에 또 다른 자아가 있는 것처럼 지은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짝 웃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하지만 내가 방금 했던 말들은 전부 다 진심! 그니까 그중 50%만 지태 씨 가슴에 우선 새겨둬. 나머지 절반은 내가 천천히 채워줄 테니까. 누가 뭐라 하건 이제부턴 그냥 내 맘, 내 뜻대로 밀고 나갈 거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지은의 기분을 깨긴 싫어서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그때 지은이 상큼하게 물어왔다.
“출장을 가더라도 가끔은 전화해줄래요?”
“갑자기 웬 존대?”
“그냥! 이 대목에선 그게 어울리니까.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대답이나 하기!”
“하!”
지태가 멋쩍고 난감하다는 듯 괜히 뺨을 긁었다.
“아, 어서요!”
“알겠어, 알았다고. 정말 할 일 없이 따분하거나 그럴 때 한 번씩 전화할게. 됐지?”
“같은 말을 해도 참!”
지은은 괜히 눈을 흘기고는 다시 또 무슨 할 말이 있는 양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몸 건강하게 다녀와요. 다치지 말고, 위험한 데는 절대 가지 말고!”
“누가 보면 부부 간에 생이별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지태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말로는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 같은 거.
다시 지은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이어지려다가 말았다.
“그리고…….”
지은은 살짝 운을 띄워 놓더니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지태의 옆자리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왜 그러나 싶어 돌아보는 지태의 볼에 기습 키스를 했다.
쪽!
“이건 건강하게, 무탈하게 잘 다녀오라는 내 선물!”
지태는 그런 지은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방금 이건 동네 마트에 심부름 잘 다녀오라는 정도의 선물밖에는 안 돼. 내가 떠날 곳은 아프리카 케냐야. 선물을 주려거든 거기에 걸맞은 선물을 줘야지. 바로 이렇게!”
지태가 갑자기 지은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술에 깊고도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가게 안 이곳저곳에서 ‘워워!’ 하는 환호성과 함께 휘파람이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뜨겁게 달라붙은 두 사람의 입술은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예정된 출국을 이틀 남겨둔 시점에 강성원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죽마고우인 이 녀석과는 당연히 치러야 할 의식 같은 거였다.
강성원은 약속 장소에 김아름을 대동하고 나왔다.
“먼 곳으로 출장 떠난다고 하니까 인사라도 한다고 해서…….”
제풀에 찔린 강성원이 그런 식으로 변명을 했다.
지태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아름까지 데리고 나온 자린데 2차, 3차로 술자리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재벌 딸하고는 연애사업 잘 돼 가냐?”
“인마, 연애는 무슨!”
“어쭈? 얼굴까지 붉히는 것 좀 봐? 너희들 진짜로 뭐 있는 거 아냐?”
“있기는 뭐가 있어, 샊… 없다, 그런 거!”
지태는 김아름을 의식하고는 급히 새끼라는 말을 삼켰다.
강하게 부인은 했지만, 속으로는 사실 조금 찔렸다.
지태의 예상대로 술자리는 1차에서 마무리됐다.
김아름이 비번이니 모처럼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는 것 같았다.
출국을 하루 남겨 놓고는 한스무역 식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조현민이 내일 공항에 배웅을 나온다고 하자 지태는 ‘촌스럽게 좀 굴지 마요.’라는 말로 사양했다.
저녁을 먹고 들어오자 어머니는 조금 서운한 표정이었다.
지태는 비행기 출발 시각이 늦은 저녁이니 적어도 내일 아침과 점심은 함께 할 수 있다는 말로 어머니를 달랬다.
방으로 들어와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지난번 필리핀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바늘처럼 뾰족하게 다가와 잠 풍선들을 하나둘 터트리고 있었다.
지태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아둔 최봉준의 낡은 가죽수첩을 펼쳤다.
최봉준의 당부대로 지태는 누군지 모를 후대의 거상을 위해 일기를 적듯 빈 칸을 채워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겨우 한 장을 채웠을 뿐이다.
이렇듯 채워가다가 마침내 맨 끝 장에 이르면 그때의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알 수 없는 설렘, 그리고 머릿속을 후비는 온갖 궁금증들과 뒤죽박죽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긴장이 풀려갔다.
지태는 얼굴에 수첩을 덮은 채 그대로 잠이 빠져들었다.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지태는 아침과 점심을 그녀와 함께 했다.
약 4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지태는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떠났다.
21시 40분.
이런저런 수속들을 밟다 보니 어느덧 출국까지는 약 두 시간 정도 남았다.
인천공항에서는 직항 노선이 없어 두바이를 경유해 나이로비 조모 케냐타 공항으로 가야 한다.
국적기 중 유일하게 직항하던 노선이 있었지만, 케냐 정국의 불안으로 인해 현재는 운휴 중이라고 했다.
“휴우! 20시간!”
지태의 입에서 조금은 암담하다는 식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경유지인 두바이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해 총 20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것이다.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을 들고 대기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도 없어 포털 앱에 들어가 뉴스를 검색했다.
정치 뉴스는 읽으면 읽을수록 괜히 골치만 지끈거리고 열만 뻗칠 테니 패스하고 사회 경제 쪽으로 스크롤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액정화면이 바뀌며 전화가 걸려왔다고 호들갑을 떨어 댄다.
괜히 제풀에 놀라며 살펴보니 임지은이다.
“어! 이 시간에 어쩐 일?”
- 낭군님께서 먼 길 떠나시는데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까분다! 지금 어딘데?”
- 맞춰 봐요!
“내가 뭐 점쟁이야?”
그러자 순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뭐야? 고막 찢어지겠네!”
- 혹시 지금 내가 무지 보고 싶거나 그러지 않아?
“우리가 뭐 그럴 사이라도 되나?”
시큰둥한 지태의 반응에 지은이 다시 또 타이어 바람 빠지는 입소리를 냈다.
- 지태 씨! 지금 앉아있는 곳에서 2시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만 돌려 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하면서 지태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 이런!”
지태는 스마트폰을 귓가에서 천천히 떼어내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