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검은 대륙, 케냐로!(2)
식사 겸한 1차 술자리를 마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식당 입구에서 지은은 1차는 지태의 뜻대로 따라줬으니 2차 술자리는 자신에게 양보하면 안 되냐고 물어왔다.
“그래, 2차는 지은 씨 내키는 대로 해.”
“지태 씨 시선으로 보면 거기 손님들이 좀 같잖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도대체 어딜 가려는데 이리 거창하게 나오실까?
지태는 의문을 한가득 품으면서도 남자답게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손님들이 같잖게 군다면 차라리 두 눈을 꼭 감고 안 보면 되지, 뭐. 상관없어. 난 괜찮아.”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에 하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시비를 걸어와도 참을 수 있겠어?”
“어딜 가는데 그렇게 다짐을 받는 거야? 괜히 겁부터 나네.”
“아잉, 암튼!”
“그래. 알았어. 그럴게.”
“나 사실은 지태 씨를 거기 일부러 데려가려 거야. 그 같잖은 것들한테 보란 듯이!”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고 결연해 보여서 지태는 다시 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셨기에 지태는 대리기사를 불렀다.
지은이 대리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준 뒤 승용차로 약 20분 정도를 달려가자 어느 고급 술집 앞에 도착했다.
바, 필링(Bar Feeling).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 같은 분위기의 건축물 앞에 정장을 빼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촘촘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곳이었다.
딱 봐도 일반인들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럭셔리한 술집.
“여긴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곳이야.”
“멋진데!”
“하지만 오래 있진 않을 거야. 그냥 간단히 입만 축이고 곧바로 자리를 옮겨요, 우리!”
지태가 다시금 지은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겨우 술 한잔하자면서 뭐가 이리도 결연한가?’
출입구 앞을 막고 서있던 팀장급 사내가 지태의 옷차림새를 보고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지은과 동행임을 인지하고는 정중한 묵례로서 통과시켜 주었다.
‘헛, 참!’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국내외 최고급 자재들은 다 갖다가 발라 놓은 듯 최상의 인테리어, 그리고 한눈에 봐도 이곳은 가진 자들만의 놀이터라는 게 티가 확 났다.
지은이 들어서자 무료하다는 나른한 느낌으로 늘어져 있던 몇몇 남녀가 급 반색을 해왔다.
“어머, 너 지은이 아니니. 웬~ 일이니!”
“야, 너 오랜만이다?”
지은은 반색하는 그들에게 간단히 눈인사만 해주고는 이내 무시해버렸다.
일부러 지태의 팔짱을 더욱 끈끈하게 낀 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는 상큼 발랄한 포즈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청하자 지은은 고개를 갸웃하는 것처럼 한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기야! 나 예전에 자주 마시던 거 알지? 그걸로 줘요!”
이곳에서의 경력이 오래된 듯 보이는 웨이터는 군말하지 않고 곧 묵례와 함께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지태는 막연하게 주변을 한 바퀴 죽 둘러보았다.
아예 대놓고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대개가 어지간한 서민들의 전세자금 정도는 훌쩍 뛰어넘고도 남을 법한 금액을 온몸에 치렁치렁 처바른 남자들이었다.
지은보다는 그녀가 데리고 나타난 지태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과 눈빛들.
끼리끼리 어울리는 자신들만의 공간, 이곳 필링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인 이유도 있겠다.
개중 한 놈이 손에 술잔을 든 채 어슬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입술 끝을 잔뜩 비틀고 있는 것을 보니 조소를 한 가득 물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야, 우리 임지은 씨의 취미생활이 아주 고상해졌네? 요즘 얼굴 매끈한 신인 딴따라들 스폰 하고 다니는 거야?”
“입조심해! 이 오빠는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니까!”
“차원? 햐, 이거 우리 지은이의 수준에 맞추려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나? 아, 맞다. 국내 열손가락 안에는 들어야겠다. 그치? 나 같은 30대 재벌 축에도 끼지 못하는 놈은 네 안중에도 없지?”
“그래. 바로 맞혔어. 알았음 그만 꺼져 주시던가.”
“이런 씹,”
놈은 벌컥 달아오르는 듯싶더니 이내 표정을 풀었다.
대신 다시금 조소를 입에 물고 지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거기 씨, 실례!”
녀석은 지태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살짝 들어 보인 후 지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음흉하게 위아래를 훑었다.
타악!
지은이 놈의 팔을 거칠게 털어냈다.
“저리 안 꺼져!”
“허, 이거야 원! 아, 친구! 거듭해서 쏘리!”
놈은 무안하고 멋쩍은 것을 모면하려는 듯 지태를 쳐다보며 한손을 들어보였다.
지태는 푹신한 의자에 등을 깊이 묻으며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는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녀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사이 지은이 얼른 일어나 지태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빠, 미안! 내 생각이 좀 짧았나봐. 난 오빠가 어차피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머잖아 이런 쓰레기들을 상대할 건데, 미리 경험해 보라는 측면에서 함께 온 건데…….”
“괜찮아. 나름 재밌는데, 뭘.”
“기업? 어느 그룹인데?”
지은이 찬바람을 풍기며 자리를 옮겨 앉자 조금은 뻘쭘했던 녀석이 뭔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지태와 지은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한스무역!”
지은이 놈의 물음을 되받아치려할 때 지태가 얼른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내뱉었다.
“한스무역? 야, 너희들 혹시 한스무역이라고 들어 봤냐? 이 친구 한스무역을 경영하신대!”
냉소를 입에 가득 문 채 녀석은 뒤를 돌아보며 동조해달라는 식으로 물었다.
질문을 받은 녀석들이 ‘그게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 회사야?’하듯 다들 어깨를 한 번씩 으쓱해 보였다.
그사이 지태가 부연설명을 해줬다.
“나를 포함해서 직원이 세 명뿐인 회사지.”
그러자 놈의 입가에 걸려 있던 냉소가 어느 순간 핵폭탄급 조소로 변하는가 싶더니 곧 숨이 넘어갈 듯 웃어젖혔다.
“직원이 달랑 셋? 프하하하핫.”
입술 끝을 한껏 비튼 지태가 놈을 같잖게 노려보며 물었다.
“어이, 친구! 그러는 넌 순수한 네놈의 힘만으로 그런 회사라도 가져 봤어?”
꾹 눌러 놓았던 지태의 분노가 서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넌 네놈 아버지의 배경 없이는 혼자 힘으로 밥 한 끼도 해결하지 못하는 놈이잖아. 안 그래, 친구?”
“이런 시발 새끼가! 내가 하도 심심해서 몇 마디 받아 줬더니 같잖은 것이 올라타려고 하네. 야! 죽고 싶냐?”
“아, 그래? 그거 잘됐네. 그러잖아도 심심하던 참인데, 해봐! 어떻게 죽여주나 한번 지켜나 보게. 나를 어떻게 죽여줄래?”
지태가 기꺼이 몸을 내주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놈이 당황했다.
생각 없이 같잖은 눈길로만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새삼 다시 보니 지태의 덩치가 남달랐다.
훤칠한 신장에 떡 벌어진 어깨며 옷으로는 차마 다 감춰지지 않는 일렁이는 근육.
한눈에 봐도 무지 강한 놈으로 보였다.
녀석은 지극히 당황스러운 몸짓으로 꾸물대더니 돌연 뒤에 대고 화풀이를 해댔다.
“에이, 시발! 야, 여기 실장 좀 나와 보라고 그래! 시발, 여기도 이제 발길 끊어야겠네. 개나 소나 물을 다 흐려 놓으면 멤버십은 무슨 개뿔이나 멤버십이야?”
놈이 요란하게 떠들어 대자 실장이라 불린 여성 한 명이 사무실의 문을 열고 홀 쪽으로 걸어 나왔다.
왠지 심상찮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술집의 마담 같지 않은 지적 세련미와 어떤 당당함이 온몸에서 느껴지는 포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일까?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로도 다 감출 수 없는 야들야들한 몸매는 가히 예술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천박해 보이지 않는 스타일.
그녀가 어느새 바짝 다가와 놈에게 물었다.
“서상혁 전무님! 절 찾으셨나요? 무슨 일이신데요?”
“무슨 일이나마나 여기가 어디 개나 소나 다 올 수 있는 곳이야?”
“어머, 저희 클럽 룰을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멤버십 회원과 동행한 분에 한해서는 출입을 허가한다. 잊으셨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이곳의 격에 맞는 새끼를 들여야지. 안 그래?”
“어머, 누가요? 부경그룹의 임지은 이사님이요?”
“아니, 내가 지금 지은이를 두고서 그래? 바로 이런 허접한 새끼를 두고 하는 소리잖아!”
녀석은 점잖은 말투로 타이르고 있는 여 실장의 태도에 분개하고 있었다.
홀 안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터라 놈은 더더욱 자존심이 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이 신사 분은 재계 서열 3위 부경그룹의 외동따님이신 임지은 이사님께서 모셔온 분이세요!”
그 한마디로 지금의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는 여 실장이었다.
서상혁이라는 녀석은 마땅히 대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와 임지은의 처지는 같은 재벌가의 자제라도 차원이 다르고 수준부터가 달랐다.
꼼짝없이 당했고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든 꼴이 됐다.
“에이, 시발!”
놈은 다시 한번 지태를 화풀이하듯 매섭게 째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여 실장이 빙긋 웃으며 지은에게 말을 걸어왔다.
“좀 요란했죠, 임 이사님?”
“실장 언니 덕분에 내 속이 다 시원해. 고마워요.”
지은은 여 실장을 향해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러고는 지태를 돌아보았다.
“화났죠?”
“글쎄!”
“미안해요. 이 정도까지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좀 후련하기는 한가?”
“쪼끔!”
지은이 배시시 웃으면서 엄지와 검지를 모아 1센티 가량 띄워 보였다.
“그럼 그걸로 됐어. 처음엔 화가 좀 났는데 지금은 나도 속이 다 후련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여 실장이 그윽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지태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샐리 정이에요.”
“한지탭니다.”
“보시다시피 여긴 멤버십 클럽이에요. 하지만 임 이사님과 함께라면 언제든 환영해요. 잘생긴데다가 멋지기까지 하니까 언제든!”
여 실장은 지태에게 ‘환영해요’라는 눈웃음을 보내곤 이내 지은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한번으로는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지은을 향해서도 눈을 한번 찡긋 감아 보이며 아까 그녀가 했던 대로 깜찍한 인사를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지은이 거부감 없이 환하게 받아들이며 웃었다.
“역시 우리 실장언니는 언제 봐도 최고야. 고마워요.”
“불청객은 이만 퇴청하옵니다. 그럼 두 분, 천천히 말씀 나누시옵소서.”
“아냐. 우리 이제 그만 갈 거예요. 여기에 온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거든!”
지은은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보라는 듯이 다시금 지태의 팔짱을 다정하게 끼었다.
잠시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가요, 지태 오빠!”
지은은 한껏 발랄한 동작으로 지태의 팔에 매달렸다.
“그래.”
지태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두 사람이 다정히 두어 걸음쯤 뗐을 때였다.
출입구 쪽이 잠시 소란스러웠다.
주변에 있던 남녀들이 이제 막 들어서는 누군가를 반갑게 맞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커다란 원형기둥이 가로막고 시야를 가리고 있는 터라 방금 들어선 그가 누구인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그가 누구든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다시 두어 걸음쯤 떼었다.
순간 지은이 이제 막 들어온 사내를 보며 한 발짝 먼저 흠칫 놀랐고, 뒤이어 지태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다름 아닌 대호그룹의 차남 이현욱이었다.
활짝 웃으면서 들어서던 이현욱도 두 사람을 보자 순간 표정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지태는 팔짱을 낀 지은의 손을 떼어내고 대신 그녀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그런 자세로 천천히 이현욱에게로 다가갔다.
이현욱이 움찔하며 몸을 내빼려했지만, 피하기엔 조금 늦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지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이, 친구! 이런 데서 보니까 왠지 두 배로 더 반가운걸!”
이현욱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조폭을 보낸 지은 죄가 있고, 그나마도 되레 깨지고 왔으니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두렵기만 했다.
그런 이현욱의 모습에 홀 안의 모든 시선들이 신기한 구경을 하듯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지은이 지태를 이 자리에 데리고 나타난 것만 해도 약간은 불가사의한 면이 없지 않았었는데, 대호그룹의 차남이면서 천하의 개망나니로 소문이 난 이현욱 또한 그와 구면이라는 게 더욱 신기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이현욱의 저 표정은 지태에게 완전히 주눅이 든 모습이 아닌가.
그들로서는 생전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때 지은이 놀리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