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40화 (40/272)

040화. 검은 대륙, 케냐로!(1)

외로움을 타던 직후라서 그럴까.

솔직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태는 일부러 사무적인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예, 한지탭니다.”

- 지금 어디에요?

“아, 죄송합니다.”

- 예? 뭐가요?

“내가 어딜 가면 어딜 간다고 지은 씨한테 일일이 보고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그걸 못해서.”

- 하, 정말! 뭐지, 이거? 너무 다이렉트로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거 아녜요?

폰 너머에서 벌처럼 쏘아대는 지은의 목소리가 따갑다기보다는 청량음료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다.

‘내가 얘한테 이런 느낌을 가져도 되나?’

지태는 속으로 반문하고는 이내 쓰게 웃었다.

“그냥 웃자고 한번 해본 소리였어요. 근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왜 물었어요?”

그러자 곧바로 까르르 웃는 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핫. 글쎄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어딘데요?”

- 한번 맞춰 봐요!

임지은의 목소리가 더욱 더 애교스러워지고 있다.

고개를 갸웃거린 지태가 물었다.

“장난하지 말고. 지금 어딘데요?”

- 지금 한스무역이라는 사무실 앞이에요.

“예에?”

- 뭘 놀라고 그래요. 일부러 찾아온 게 아니라 마침 근처에 볼일 보러 왔다가 문득 지태 씨 회사가 부근이라는 게 생각나서요. 차 한 잔만 주세요.

근처에 볼일 보러 왔다는 건 거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보러 일부러 온 것이 분명했다.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나도 회사 근처이긴 합니다만…….”

- 그럼 기다릴게요.

툭.

지은은 제 할 말만 하고는 지태의 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헐!”

지태는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갑자기 찾아온 고독감을 달래줄 어떤 명분을 찾았다는 기쁨 때문일까.

아니면 설렘일까.

지금은 사실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좋았다.

지태는 회사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우와, 보기보담 사무실이 넓네요!”

지은이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며 낮게 탄성을 질렀다.

지태는 조현민과 박수연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맞아요. 우리 셋이서 근무하기엔 종합운동장 수준이죠. 먼저 인사부터 하시…….”

지태가 조현민과 박수연을 소개하려는 순간 지은의 입에서 먼저 인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임지은이에요. 여기 있는 우리 지태 씨의 새 여친!”

빠악!

뭔가 느닷없이 날아와 뒤통수를 후린 느낌이다.

지태는 골이 팬다는 듯 양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 미치겠네, 정말.’

그때 조현민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혹시… 부경그룹의 임지은 이사님?”

“네! 어떻게 저를 잘 아시네요? 하핫. 반가워요. 부경그룹에서 허울뿐인 이사 직함을 달고 있는 임지은이에요.”

“아이고, 이거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사무실이 너무 누추해서 어떡하나.”

조현민이 돌연 호들갑을 떨었다.

지태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이고, 형님까지 왜 또 그래요?”

지태는 얼른 지은의 손을 이끌고 아직까지는 별 쓸모없이 방치해둔 대표실로 이끌었다.

조금 뒤 박수연이 눈치껏 찻잔을 내려놓고 나가자 지은이 질투하듯 물었다.

“수연 씨, 참 미인이네요.”

“아름다운데다가 심성까지 착합니다. 때론 당차고…….”

마지막 부분은 조현민의 조련 아래 열심히 깡다구를 단련하고 있는 박수연을 떠올리며 내뱉은 멘트였다.

“수연 씨 뽑을 때 뭔가 흑심을 품고 뽑았죠?”

“우리 회사가 무슨 연필입니까? 흑심을 품게!”

“어머, 이 아저씨 웬 아재개그?”

지은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령 지태 씨의 여친 내지는 미래의 신붓감을 꿈꾸면서 말이에요.”

“아하! 왜 허울뿐인 이사로만 내버려두는지 이제 이해가 되네. 그렇게 할일이 없어요? 별 시답잖은 상상이나 해대게?”

“웬 인신공격? 허, 참!”

지은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더니 찻잔을 들어 무심코 입에 댔다가 작은 비명을 뱉었다.

“아, 뜨거!”

“그거 안 뺏어 먹을 테니까 천천히 마셔요.”

지태는 그거 ‘쌤통이다’라는 말 대신 그렇게 돌려 말했다.

지은은 그런 지태를 밉지 않게 흘기다가 물었다.

“오늘 퇴근 후에 선약 있어요?”

이제야 이곳을 찾은 목적을 밝히려나 보다.

어차피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는 건 거짓말로 판명이 난 거니까.

“외국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겨서 그 준비 때문에 내가 요즘 바쁘긴 한데…….”

“어머, 해외출장? 그거 언제 가는데요?”

“또 뭐가 궁금한데요?”

“그냥 친구로서 그 정도 궁금증은 가져도 되는 거 아닌가?”

지은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오늘 따라 더 귀여운 것 같다.

지태가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후훗! 아프리카엘 갑니다. 케냐! 출국 예정은 일주일 뒤고.”

그러다가 자신이 왜 이런 것까지 밝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듯 지태는 제 말끝에 쓴맛을 다셨다.

“먼 데도 가시네. 근데 거기 위험한 데 아녜요? 그 나라 요즘 좀 시끄럽던데?”

“무당이 작두칼 타는 게 무서워지면 무당 짓 그만 때려 쳐야죠.”

“허, 정말 못 말려! 지태 씬 가만 보면 아주 즐기는 거 같아요.”

“뭘 즐겨요?”

“위험한 거!”

“아닌데!”

“아니긴! 혹시 지태 씨의 취미가 이런 거 아닌가? 사람들 간 쪼그라들게 만들어 그걸 혼자 즐기는 마조히스트 같은 거?”

“그쯤 합시다. 너무 막 나가신다.”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나한테 투자하기!”

지은은 결론을 내리듯 그 말을 내뱉고는 이내 입술을 닫았다.

새초롬하게 다문 입술이 지태로 하여금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케냐에의 출장이 결정이 되던 때 문득 온몸을 감싸는 고독감을 느꼈고, 그것을 털어낼 구실로 지은을 떠올렸던 지태였다.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지태가 구실을 만들어 지은에게 부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온 지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지태는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에 속으로 계면쩍게 웃었다.

* * *

지은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구실로 지태는 두 사람보다 먼저 퇴근을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조현민이 분명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한마디쯤 잔소리를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핑계를 댄 사람이 임지은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만큼은 아무런 태클도 걸어오지 않았다.

“저녁은 뭘 먹을까요?”

지태가 고민스럽게 물었다.

저녁메뉴를 고르라면서 고민 가득한 얼굴로 물으니 이상한가 보다.

지은이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메뉴를 고르는 일이 조금 부담은 되었다.

보통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메뉴를 추천하거나 자신이 마음대로 골라도 상관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은은 그 일반적인 사람들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재벌가에서 다이아몬드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라서 그렇다.

재벌가의 사람들을 겪어보거나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그들이 주로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또한 어떤 취미를 즐기는지 따위의 생활양식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라운지 바에서 곤란에 빠진 그녀를 도와주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동석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그녀가 임경남의 동생이라는 점에 약간은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골탕을 먹이려고 일부러 일반 대중들이 자주 찾는 식당으로 지은을 인도했었다.

그날 지은은 순댓국 냄새에 질려 결국 화장실에서 토하고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자신이 현재 첫날에 가졌던 짓궂은 감정으로 지은을 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저녁메뉴를 묻는 지태의 표정이 괴상하다 여긴 지은이 물었다.

“왜 그래요? 컨디션이 안 좋아요?”

“아뇨.”

“근데 왜?”

“그냥 좀 그래요.”

“그니까 뭐가요?”

“약간 고민이 돼서 그래요. 재벌들은 도대체 뭘 잘 먹는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네에?”

순간 지은은 말문이 막힌다는 식으로 헛웃음을 켰다.

“지금껏 그거 고민한 거예요?”

“암튼 부담스러운 것만은 사실이니까.”

“재벌들이라고 뭐 특별할 거 있나요. 재벌들도 사람인데 그냥 일반적인 걸로 먹죠. 물론 식성 까다롭거나 과시욕이 심한 사람은 좀 특별한 것들만 찾은 경우도 있겠지만. 참고로 난 입맛이 아주 서민적이에요. 뭐든 잘 먹으니까. 아! 저번에 그거, 순댓국만 빼고요.”

지은은 그날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지 순댓국만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피식 웃어 보인 지태가 이윽고 저녁메뉴를 결정했다는 듯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은 고민 없이 그냥 삼겹살이나 먹읍시다.”

“좋아요!”

지은이 최고의 선택을 했다는 표정으로 반겼다.

지태는 지은에게서 자동차 스마트키를 받아 근래에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삼겹살집으로 데려갔다.

목삼겹살 2인분과 소주 한 병을 시켜 반쯤 먹었을 때였다.

지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지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현욱 오빠한테선 그날 이후에 뭐 없었어요? 그날 라운지 바에서 지태 씨한테 혼났던 그 사람 말이에요!”

지은은 행여 지태가 못 알아들을까봐 굳이 사족까지 붙여 설명했다.

“뭐가 없었냐… 라니요?”

조금은 정색하며 물어보는 지은과는 달리 지태는 상추쌈을 입에 넣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가령, 그런 거 있잖아요. 음, 말하자면… 그게 뭐랄까…….”

빤히 보이는 질문을 애써 돌려 말하는 지은의 모습이 귀엽고도 웃겼다.

지태는 고기를 오물거리다가 그만 큭! 웃고 말았다.

“혹시 보복 같은 걸 해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겁니까?”

“예, 내 말이! 에이, 뭐야? 다 알아들었으면서 내숭을 떤 거예요? 미워죽겠어!”

지태는 입안에서 씹고 있던 삼겹살을 꿀꺽 삼킨 후 그녀가 궁금해 하는 걸 대답해주었다.

“사실 조폭 몇 명을 보내오긴 했어요.”

“어머, 정말?”

화들짝 놀라며 잠시 두 눈이 크게 떠지는가 싶더니 지은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아, 참! 그래서요?”

지은은 사설을 늘어놓다가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얼른 결과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지태의 몸 상태를 살폈다.

“어! 멀쩡하시네?”

“나야, 멀쩡하지.”

“그 말인즉슨 지태 씨는 무사한데, 그 조폭들은 절대 무사하지 못하다는 뜻?”

지태는 대답 대신 픽 한번 웃어준 뒤 곧 앞에 놓인 소주잔을 비웠다.

지은이 선뜻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입에서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에이, 설마!”

“믿기 힘들면 나중에, 아니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 조 전무님이나 수연 씨한테 확인을 해 보시든가.”

“그게 사실이라면 지태 씨 전직이 심히 의심스러운데?”

“뭐가 그렇게 의심스러울까나?”

참으로 자연스러웠다.

둘은 서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다.

뒤늦게 지은이 그걸 먼저 깨닫고는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킥킥거렸다.

“왜, 또? 무슨 엉뚱한 상상이라도 하셨어?”

지은은 고개부터 내저었다.

“아니, 지금 지태 씨 그 말투, 그리고 내 말투!”

“말투? 아하!”

지태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심드렁하게 끄덕였다.

“난 또 뭐라고. 나야 지은 씨보다 오빠니까 말을 놓는 건 당연한데, 거기는 왜 말을 놓지?”

“어머, 어머!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사상을 갖고 계시나?”

“농담이야.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거든! 우리가 지금 세 번째 만남이던가, 네 번째던가?”

“어휴, 오늘로 꼭 세 번째거든요!”

“그런가? 그럼 웬만한 선수 같았음 한 침대에 같이 누워보자고 벌써 손을 잡아끌었어야 하는 건데.”

지태가 몹시 아쉽다는 듯 입맛까지 다시자 지은이 밉지 않게 흘긴다.

“내가 그리 쉬워 보여요? 나 절대 그런 여자 아니거든! 물론 한때는 정신적으로 막 굴러먹었어. 그래도 몸까지 막 굴렸던 건 아니야.”

지태가 피식 웃었다.

‘누가 뭐래? 제풀에 흥분하긴!’

속으로 퉁을 주고는 지태가 말했다.

“걱정 마. 난 재벌가의 딸을 욕심낼 만큼 주제넘은 짓은 안 하니까.”

“피이! 재벌가 딸은 뭐 특별한가?”

“헛! 뭐냐, 그 말뜻은? 그럼 나랑 호텔에 함께 가도 상관없다는 거야?”

“어머, 꿈도 야무시지. 퍼뜩 꿈 깨세요, 한지태 씨!”

지은은 깍쟁이 같은 표정으로 새초롬하게 술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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