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뜻밖의 방문자(3)
“아직도 모르겠나? 난 자네가 부를 때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
최봉준이 인자한 모습으로 그윽하게 말했다.
지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어르신을 불렀다니요?”
“자네의 긴장도가 강해지면 자동으로 나와 연결되는 것이니 자네가 나를 불러낸다는 표현이 맞지 않겠나.”
“아, 그렇군요. 아, 참!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어르신.”
“감사랄 것도 없네. 난 다만 조언만 해주었을 뿐 모든 판단은 자네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니까 말일세. 나를 부정하지 않고 믿어준 것만으로도 내가 오히려 고마워해야겠지.”
어려운 상황마다 최봉준은 지태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필리핀으로 출국 전 주변에 도사린 위험들을 미리 일러주며 대비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매 위기 때마다 감각적으로 피할 방법을 일러 주었다.
만일 최봉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필리핀에서 자신은 결코 목숨을 부지해 나오기가 힘들었을 거다.
더구나 신장 한쪽을 떼어낸 몸이었다.
신장 한쪽을 떼어낸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하면 차마 사람들이 믿어줄까.
알 수 없는 신비한 힘, 그리고 수술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막강해진 체력의 원천은 기연으로 다가온 최봉준을 배제하고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지태는 최봉준이라는 기연과의 만남이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매순간마다 실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생일대 최고의 행운이며 밑바닥까지 떨어진 그에게 하늘이 내려준 로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최봉준과의 만남은 아버지가 당신을 대신하여 자식에게 내려주는 애틋한 부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
지태가 정색한 얼굴로 최봉준에게 물었다.
“어르신! 제가 지금까지 잘 하고 있는 겁니까?”
최봉준이 그윽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만족할 수준은 못 되지! 무쇠도 망치로 두들겨 맞을수록 강해지듯이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 아니겠나.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겪은 후라야 비로소 강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말도 있듯이 말이야. 내가 존경하는 옛 성현의 말씀에 이런 게 있다네. 고로 천장강대임어시인야신대 필선 고기심지하고 노기근골하며 아기체부…….”
이건 맹자 중 고자 편에서 나오는 말이다.
[故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 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먼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고 괴롭히고 끊임없이 단련시켜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강해졌을 때야 비로소 중한 소임을 맡긴다는 내용.
“지금까지는 그저 맛보기에 불과해. 자네가 훗날 세상이 다 알아주는 위대한 대상(大商), 거상(巨商)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크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련과 어려움들이 함께할 거야. 그 과정에서 나는 다만 내가 지닌 지식을 토대로 자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정도에 그칠 걸세. 그 나머지 모든 판단과 결정은 앞으로도 계속 자네의 몫일 테지. 그러니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해.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지태는 최봉준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퍼뜩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허허로운 벌판 한가운데에 서있는 건 오로지 자신 혼자였다.
문득 고독하다는 느낌이 새록새록 찾아들 무렵 돌연 하늘이 어둡게 변해 갔다.
곧 광풍과 함께 먹구름들이 몰려들더니 순식간에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지태는 와락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 위로 우박이 섞인 강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금세 온몸이 흠뻑 젖어 끝내 한기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사방팔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비를 피할 만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두려움과 고독감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지태는 마침내 비명을 질러 댔다.
“아아아아악!”
그때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웠다.
어머니였다.
“지태야, 무슨 악몽이라도 꿨니?”
“예? 어, 엄마! 그런 거 같아.”
“무슨 꿈을 그리 요란하게 꿔? 난 네가 하도 무섭게 울부짖길래 행여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다.”
꿈속에서 내질렀던 비명이 급기야 어머니의 방에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고는 들고 온 냉수를 지태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비록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것으로 앞으로 닥칠 어떤 안 좋은 일에 대한 액땜은 된 듯했다.
머릿속만큼은 황사가 지나간 다음 날의 하늘처럼 매우 청명하고 싱그럽게만 느껴졌다.
* * *
“어, 이렇게 만나는 것도 꽤나 반가운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지태의 곁으로 조현민이 바싹 다가서며 아침 인사를 해왔다.
지태가 돌아보며 반갑게 웃었다.
“차 안 막혔어요?”
“10분만 빨리 나와도 출근길 도로 사정이 확 다르니까. 근데 넌 언제까지 대중교통만 이용할 거야?”
조현민은 자기 혼자만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게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조금은 껄끄러운 눈빛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진 안 불편해요. 지하철이 훨씬 더 빠르기도 하고…….”
“에이, 그래도 명색이 한 회사의 대표씩이나 되는 사람이 뚜벅이가 뭐냐, 뚜벅이가!”
“괜찮대두요. 아, 참! 어제 수연 씨는 잘 데려다줬어요?”
“야, 말도 마라. 수연이 어머니한테 엄청 깨졌다. 술도 못 마시는 애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고!”
“그러게 왜 그랬어요? 좀 적당히 하시지.”
지태는 피식 웃어 보이곤 이제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머, 두 분이 함께 오시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란히 들어서자 책상을 닦고 있던 박수연이 해맑은 미소로 인사를 해왔다.
지태와 조현민은 깜짝 놀랐다.
“어럽쇼? 난 오늘 수연 씨 결근할 줄 알았더니 아주 쌩쌩하기만 하네?”
“당연하죠. 어제 전무님이 그러셨잖아요. 술 때문에 결근하고 그러면 샐러리맨의 자격이 없다고.”
“하, 이거 참!”
“그리고 앞으로 저를 부를 땐 박수연 말고 깡수연이라 불러주셈!”
지태와 조현민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 모습이 정녕 자신들이 알던 그 박수연이 맞는 것이냐고 상대방에게 묻고 있었다.
박수연이 미리 뽑아 놓은 모닝커피 한 잔씩을 들고 지태와 조현민은 휴게공간의 소파에서 마주보고 앉았다.
지태의 앞에는 조현민이 내민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
조현민은 어제 양태식 부장이 메일로 보내온 자료를 새벽에 일어나서 보강하고 다듬었다고 했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지태는 문서를 손에 들었다.
“거기 보면 알겠지만, 그놈 케냐에서도 아주 소문난 꼴통 같아.”
사무엘 은조로게, 46세.
간략하게 요약된 이력란의 맨 마지막에는 케냐 상무부 대외협력국장 출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공직을 그만두고 나와서 광산투자개발회사를 차렸는데, 미심쩍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냐.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투자사기를 당한 것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더라고. 인도와 중국 쪽 개인 투자자하고 기업들도 몇몇 당한 모양이야.”
“허헛! 이 새끼, 완전히 국제적으로 노는 글로벌 사기꾼 새끼였네.”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 위로 조현민의 설명이 곁들여졌다.
“한데 문제는 공직 출신이라 케냐 내에서 인맥이 매우 짱짱하다는 점, 그리고 현 집권 여당은 물론 야당에까지 정치자금을 나눠준 덕분에 놈을 비호하는 세력들이 많다는 점이야. 그 말인즉슨 잠수를 타면 어지간해선 찾아낼 수 없다는 거지.”
“하, 이거 갑자기 골치 아파지는데!”
“아, 참. 그리고 이거!”
전혀 골치 아픈 푸념처럼 느껴지지 않는 지태의 엄살을 듣고 있던 조현민이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뭡니까, 이건?”
“차보라이트에 관한 모든 것!”
지태가 얼른 종이를 건네받아 읽어 내려갔다.
사실 차보라이트라는 보석은 이름만 들었을 뿐이지 그에 관한 것은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조현민이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광물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은 주로 탄자니아와 케냐의 일부 지역이라고 했다.
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킬리만자로공원 인근이 바로 그 지역이었다.
시세는 때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원석에 내포물이 거의 없는 최상품의 경우 1캐럿당 대략 1천 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커팅 전 원석 수준의 거래가격을 말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커팅을 잘해서 상질의 제품으로 탄생시킨다면 그 값은 몇 배로 치솟는다는 이야기다.
자료를 살피던 지태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조현민을 향해 의미 있는 웃음을 날렸다.
“뭐냐, 그 웃음?”
“이상하게 나한테 맡겨지는 오더마다 보석하고 연관돼 있는 것 같아서요.”
“하핫! 듣고 보니 그러네.”
“근데 내 얘긴 그게 아니라 이겁니다. 아무래도 차보라이트가 생산되는 나라니까 내가 돌아올 때 작은 거라도 몇 알 챙겨서 올 거 아닙니까.”
“뭐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왜?”
“챙겨 와서 우리 형수님의 몫으로 선물을 하나 해드릴까 하고요. 앞으로 야근하고 외박하는 날들이 많이 생기더라도 미리 좀 잘 봐달라는 뇌물로!”
“우리 와이프는 보석하곤 별로 안 친해. 그거 받으면 아마 곧장 보석상으로 달려갈걸! 팔아서 바로 현금화하려고.”
“에이, 설마요! 만약 그럴 거 같으면 안 드려요.”
“얀마, 그래도 그건 아니지. 줬다 뺐으면 엉덩이에 뿔이…….”
“김칫국도 참! 아직 준 것도 아닌데 뭘 줬다 빼앗았다고 그래요?”
지태는 다시금 의미를 담아 픽 웃고는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입에 다 털어 넣었다.
* * *
그로부터 사흘 후 지태는 선우글로벌에 들어가 오더계약서를 작성했다.
케냐로의 출국은 약 일주일 뒤로 결정됐다.
선우에서 나오는 길에 지태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조현민을 힐끔 돌아보았다.
시선을 감지한 조현민이 멋쩍다는 듯 내뱉었다.
“왜, 인마?”
“이번엔 위험 하다느니, 가지 말라니 그런 잔소리가 안 나오네요?”
“왜, 그 말을 안 해줘서 섭섭하냐?”
“섭섭은 무슨!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내가 가지 말란다고 해서 네가 안 갈 놈이냐? 거기가 위험하다고 해서 지레 겁부터 집어먹을 놈이냐고! 그럴 것도 아니라면 내가 뭐 하러 괜히 입 아프게 힘을 빼겠어!”
“그래요. 아주 잘 생각하신 거야. 그런 곳에 힘 빼지 마시고요, 저번처럼 안에서 서포트나 잘해 주세요.”
조현민은 흘깃 돌아보며 눈을 흘겼는데 그 눈빛 속에는 방금 내뱉었던 말과는 달리 이번 출장에 대한 어떤 우려의 느낌이 듬뿍 담겨 있었다.
지태는 회사 빌딩의 로비에 이르자 조현민을 먼저 올려 보내고 자신은 그대로 남았다.
“몇 시쯤 들어올 건데?”
조현민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문득 돌아보며 물었다.
“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지난번처럼 설득 당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답을 주는 자리니까요.”
조현민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아이고, 한 사장!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동구 사장은 지태가 앉은 자리로 옮겨오더니 덥석 손을 붙잡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겸사겸사 가는 건데요, 뭘. 전혀 생색낼 만한 일이 아닙니다, 사장님.”
“우리들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지. 이 고마움은 절대 잊지 않겠네.”
“선우 시절에 제가 사장님들께 도움 받은 게 얼만데요. 이렇게라도 빚을 갚는다 생각할게요.”
지태는 그윽하게 웃어 주었다.
“참, 제가 떠나기 전까지 그 사기꾼 놈한테서 받았다는 것들 전부 취합해서 저한테 보내 주세요.”
“알겠네.”
시에라리온의 사기꾼에 대한 자료를 달라고 했지만, 사실 지태는 그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작정하고 사기를 쳤던 놈이 제대로 된 것을 보내주었을 리 만무한 까닭이다.
사장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지태는 갑자기 외로움이 느껴졌다.
미지의 땅에 다시 또 들어가 모험을 시작하려는 데서 파생된 고독감이랄까.
불현듯 찾아든 진한 외로움과 씨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때마침 간지럼을 태운다.
액정화면을 살펴보니 지은이라는 이름이 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