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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36화 (36/272)

036화. 다시 발로 뛰어라(5)

“그러다가 그런 생활에 슬슬 싫증이 날 즈음이었는데 영장이 떨어지더라. 그래서 기왕 군대에 갈 거라면 내가 가진 주특기를 살리고 싶었다. 바로 이거!”

지태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그리고 깡다구 하나! 이걸 믿고 내가 자원입대한 곳은 다름 아닌 해군 특수전전단이었다. 너희들이 흔히 알고 있는 바로 그 UDT!”

지태는 그 후로도 한동안 이러저러한 썰들을 풀어댔는데, 나중엔 자신이 무슨 썰을 풀어댔는지도 모를 만큼 온갖 허풍을 다 갖다 붙였다.

심지어는 특수공작의 임무를 띠고 북한 땅에 침투한 적도 몇 번 있다는 뻥을 쳐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워낙 실감나게 사기를 친 탓인지 놈들은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눈치였다.

아니면, 지태의 무서운 기에 눌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마지막으로 던졌던 한 방이 그야말로 특효약이었다.

지금껏 풀었던 썰들은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이것만큼은 충분히 확인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얼마 전 SNS와 인터넷을 후끈 달궜던 이야기 알고 있지? 필리핀에서 반군들이 쏟아내는 총알 사이를 뚫고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

당연히 들어보았다.

덩어리들이 잘 안다는 듯 고갯짓을 해왔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야, 인마. 인간, 한지태!”

“아!”

거침없이 끄덕끄덕.

놈들은 맞다, 맞아! 하는 눈빛들로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흔들어댔다.

이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들이 찾아온 이가 바로 한지태였다.

얼마 전 인터넷과 각종 SNS를 뜨겁게 달궜던 주인공과 똑같은 이름.

더구나 업체명까지 일치하지 않은가.

이제 덩어리들은 심지어 감동까지 하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이런 분위기를 살려 쐐기를 박아야할 때였다.

지태가 엄한 눈빛을 쏘아대며 말했다.

“내가 왜 귀한 시간 낭비해 가면서까지 이런 썰을 풀었는지는 모두 알겠지? 난 말이다. 평소엔 사람이 한없이 좋지만 일단 분노가 치밀면 사람이 한순간 헤까닥 돌아 버려. 물불 안 가린다는 얘기지. 그니까 나로 하여금 더는 사고 치게 만들지 말게 하란 얘기야. 모두 알아들었냐?”

놈들은 다시금 고개를 호들갑스럽게 끄덕이며 복종의 뜻을 나타냈다.

“그럼 두 번 묻지 않게 바로 불어라! 여길 찾아가서 개지랄을 떨라고 시킨 놈이 누구냐?”

그러자 서둘러 대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구난방 같아도 한목소리로 딱 한 놈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현욱 사장입니다.”

“누구?”

“대호건설의 이현욱 사장 말입니다.”

순간 지태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이 토해졌다.

* * *

박수연에게 근처 카페에 가서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조현민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을 바로 세우고 깨진 집기들을 치우는 조현민을 도와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얼추 다 치워진 상태였고, 조현민은 마무리로 손수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있었다.

안 쓰던 근육을 쓴 탓인지 허리가 자꾸만 쑤시는 모양이었다.

조현민은 잠시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다가 문득 대표실을 돌아보았다.

결연하게 들어갔으니 한바탕 소란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한 것이 왠지 좀 의아했다.

“조용한 것이 좀 수상하지?”

동의를 구하듯 박수연을 바라보자 걸레로 책상을 닦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까 그 정도 하셨으면 이제 다음 순서는 말빨로 죽일 차례니까요.”

뭐라 말빨로 죽여?

조현민은 약간 놀란 눈빛으로 박수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

“수연 씨! 그런 소리도 할 줄 알아?”

“오늘부터 제 성격 좀 바꿔 보려구요. 제가 매사 소심하고 기가 죽어 사니까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아요.”

“그거야 고무적인 현상이긴 한데…….”

“그동안 조 전무님께 훈련받은 영향 덕분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좀…….”

박수연은 ‘부탁해요.’라는 부분을 생략하면서 대신 머리를 15도 각도로 애교스럽게 살짝 옆으로 숙여 보였다.

“헐!”

조현민이 놀라움의 연속이라는 듯 박수연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대표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덩어리들을 앞세운 채 지태가 맨 뒤에 나왔다.

들어갈 때처럼 대가리의 뒷덜미를 꼭 움켜쥔 채였다.

다만 이번엔 질질 끌지 않고 제 발로 걷게 한 다음 끌고 나온다는 점이 그때와는 좀 다르긴 했지만.

여하튼 대가리 놈은 두 번에 걸친 매타작의 후유증이 아직도 진행 중인 듯했다.

놈은 여전히 걸음걸이가 온전하지가 못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연은 아주 잠깐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제는 똑바로 노려보기까지 하는 폼이 조금 전 자신의 말처럼 당당하게 살겠다는 자신감의 일환처럼 보였다.

그때 지태가 대가리의 귓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했다.

얼핏 보면 귓속말을 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를 크게 하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똘마니들도 전부 들으라는 소리 같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길 한 번 더 찾아오거나 개수작을 부렸다간 내 군대 시절 동료들 전부 다 이끌고 돈두파를 찾아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내 실력을 봐서 알겠지만 다들 나만큼이나 무서운 놈들이다. 네놈들 모가지 따는 걸 그냥 닭 모가지 비틀 듯 할 테니까 궁금하면 내 말 무시해도 되고. 특히 이현욱한테 오더 받은 네 큰형님이라는 새끼한테 전해라. 제 명대로 곱게 살다가 뒈지고 싶거든 더 이상은 내 앞에서 깝치지 말라고!”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대가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무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잠시 후 지태는 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행여 박수연이 상심하지나 않았을까 염려되어 먼저 표정부터 살폈다.

“괜찮아, 수연 씨?”

“뭐가요? 언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박수연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형님! 수연 씨 갑자기 왜 이래요?”

지태가 의외라는 듯 조현민을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오늘부터는 이제 깡다구 있게 살고 싶대나 뭐래나.”

“헐!”

지태의 입에서도 조금 전 조현민이 내뱉었던 탄성이 흘러나왔다.

* * *

이현욱의 사주를 받은 돈두파 행동대들의 난동으로 잠시 미뤄졌던 안양 LED 업체를 오후 늦게 다시 찾았다.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가격 협상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뷔이익, 뷔이익.

강성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성원아!”

- 어디냐?

“외근 나왔다.”

- 욜! 외근씩이나. 구멍가게에 오더가 들어오긴 하냐?

“이 자식이! 인마,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면 그만 끊어.”

-알았어. 근데 오늘 퇴근하고 선약 있냐?

“그건 왜?”

-술 한 잔하자는 얘기지, 뭐.

“술?”

지태는 아주 잠깐 고민하는 눈빛을 보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폰 너머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자, 한 잔 더해.”

퇴근 후 약속을 잡은 곳은 부대찌개전문점이었다.

술과 밥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좋아서 지태가 고른 집이다.

강성원이 자꾸만 술을 권해왔다.

정작 자신은 술잔만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면서.

일단 술을 받은 후 지태가 물었다.

“뭔데 너답지 않게 뜸을 들여? 빨리 털어놔봐.”

그러자 강성원이 히죽 웃었다.

“눈치 챘냐?”

“딱 봐도 술 마시자는 건 핑계 같은데, 뭘.”

강성원이 다시 한번 뭔가 꿍꿍이를 잔뜩 숨긴 표정으로 웃었다.

그보다는 빨리 털어놓지 못해 입이 무척 근질근질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퍼뜩 느껴지는 게 있었다.

그래서 지태가 먼저 물었다.

“그날 밤에 댑따 좋았나 보네. 저 입 찢어지는 것 좀 봐.”

“티 나냐?”

“티를 그렇게 내고 있는데 눈치를 못 채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인마! 그래서 좋았냐?”

“좋기는! 내가 뭐 생애 첫 경험이냐?”

강성원은 눈을 흘기며 투덜댔지만, 입가엔 벌써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강성원은 은연중 그날 밤 김아름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것을 실토를 해버렸다.

지태가 웃음기를 입에 문 채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날 나한테 장담한 것처럼 열 달 뒤에는 내가 큰아빠 되긴 하는 거냐?”

“하, 이 자식 봐! 누가 큰아빠래? 우리 민쯩 깔까? 넌 인마 그냥 작은아빠지! 아니다. 작은아빠 소리도 과분하다. 그냥 삼촌이라고 하자.”

“지랄!”

“인마! 너도 곧 그 재벌 딸이랑 ‘응응’할 사이잖아. 그게 다 내 덕분인 줄 알아라. 그날 내가 거기에서 만나자고 안 했음 네놈이 언감생심 그런 기회나 잡을 수 있었겠냐?”

“시끄러워, 인마! 그러잖아도 네놈 덕분에 요즘 계속 주머니 털리고 있으니까.”

“주머니가 털려? 그렇다면 그새 몇 번 더 만났다는 말이네?”

“만나려고 만난 게 아니라 어쩌다 우연……. 아, 시끄럽고. 어서 술잔이나 들어.”

지태는 흰소리는 그만 하자는 듯 소주병을 들었다.

강성원이 소주를 입안에 털어넣자 얼른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돈두파라고 들어봤냐?”

“돈두파?”

강성원이 지태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네가 그 조직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눈치였다.

지태는 오늘 오후 사무실에서 벌어졌던 소동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놈들이 대호그룹 이현욱의 사주를 받아 쳐들어왔다는 사실까지 모두 다.

“얀마! 그런 일이 있었으면 재깍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 확 다 잡아들이게.”

강성원은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다.

그러자 지태가 쓰게 웃었다.

“그랬다간 그놈들보다 니가 내 손에 먼저 수갑을 채웠을 거다.”

지태의 너스레에 강성원이 헛웃음을 날렸다.

“시발! 그럼 그렇지. 너 그 새끼들을 죄다 조져 놨구나?”

말해 뭐하겠느냐는 듯 지태가 다시 웃었다.

그 위로 강성원의 설명이 보태졌다.

“그러잖아도 그 새끼들 요즘 우리 광수대에서 눈여겨보는 중이야. 강남을 양분하고 있는 타워파와 두식이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정도로 무서운 신흥조직이거든!”

그런 돈두파의 행동대 녀석들을 혼자서 죽사발 냈다는 것이니 아무리 지태가 자신의 친구이고 싸움의 달인이라지만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다친 덴 없고?”

강성원은 그제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지태의 몸 상태를 살폈다.

* * *

“으드드드드!”

조현민이 지금껏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북에서 눈을 떼며 게으른 기지개를 켰다.

사선으로 놓인 건너편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박수연이 그런 조현민을 힐끔 돌아보았다.

“졸리세요, 전무님?”

“그럴 틈도 없어야 하는데, 일이 없어 너무 한가하니까 쫌! 근데 뭐 하고 있었어?”

“거래 업체들 정리요.”

“저번에 내가 넘겨준 거?”

“네. 너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어서 품목별로 업체들을 따로 정리해 두려구요.”

선우글로벌 시절 거래했던 업체들의 명단과 생산 품목들의 단가가 적힌 자료들을 퇴사할 때 가지고 나왔었다.

거의 모든 무역업체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자료라서 사실 선우만의 사외비랄 것도 없어 달리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들 위주의 파일이었다.

박수연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조현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요? 커피 한 잔 드려요?”

“아냐, 괜찮아. 내가 커피 내릴게.”

조현민이 손사래를 치며 걸어가다가 돌연 지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새삼 쳐다보니 그가 노트북에 넋을 빼놓고 있는 까닭이었다.

“한 대표, 뭐하냐?”

그러자 넋을 놓은 채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지태가 퍼뜩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예? 뭐라고요?”

“뭐하고 있냐고?”

“아!”

“뭐, 메일 들어온 거라도 있어?”

현재 노트북 화면에 띄워놓은 창으로 이메일 하나가 보였다.

지태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영어로 된 메일이네?

조현민이 노트북 화면에 얼굴을 더욱 가까이 붙이며 들여다보았다.

“후안 안토니오? 이 친구 필리핀에서 보디가드 해 줬다던 그 친구 아니냐.”

“예, 맞아요.”

“저번에도 한번 보내오더니 왜 또 메일을 보내와? 너희들 혹시 둘이서 사귀냐?”

농담을 흘리다가 다시금 진지하게 들여다보던 조현민의 표정이 이내 색다르게 변해갔다.

“뭐야, 이거?”

“보다시피 그렇다네요.”

지태가 다시금 씁쓸하게 웃었다.

후안이 보내온 이메일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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