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다시 발로 뛰어라(3)
“기자라서 그러신지 촉이 남다르시네요.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습니다.”
“야, 뭔데?”
자기만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 든 지은이 오도희를 돌아보았다.
약간 질투가 섞인 눈빛이기도 했다.
“왜, 있잖아. 지난번에 포털을 후끈 달궜던 똘끼 핵충만, 헉! 쏴리~”
오도희가 무심코 포털기사에 달린 댓글의 내용 그대로 설명을 해주려다가 ‘아차!’하며 제 입을 막았다.
“괜찮습니다. 내가 그런 소릴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지태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씩 웃어주었다.
오도희는 다시 제 나름의 순화된 표현을 써가면서 화제가 되었던 뉴스 기사내용을 지은에게 설명해주었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니? 그럼 이거 너무 영광인데? 그렇게 유명하신 분하고 자주 우연이 겹쳐서!”
“지은 씨! 그거 비웃는 거 아니죠?”
“설마요!”
지은은 한쪽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기본 메뉴로 나온 로브스터 회 한 점을 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그사이 오도희는 감동 받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실 엄청 감동받았어요. 대단해요, 지태 씨! 아직 젊으신데 벌써 창업도 하시고, 단 한 번의 도전으로 세상을 놀래게도 만드시고!”
“단 한 번의 도전이지만, 사실 목숨을 걸었었죠. 그게 이 대목의 포인틉니다, 오 기자님.”
“목숨, 포인트, 아!”
인정한다는 듯 오도희는 고개를 퍼뜩 끄덕이는 것으로 곧 수긍했다.
“근데요, 사실 창업을 하게 된 것은 나를 더 이상 찾아주는 곳이 없어서이고. 사실 흙수저의 비애 때문에 무모하게 결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지태가 정색하며 내뱉고는 곧 씁쓸한 미소를 피워 올리자 지은은 살짝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꼭 다이아몬드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신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만 같아서 왠지 듣기에 불편했다.
그녀는 곧 자진납세를 해왔다.
“내 잘못은 아니에요. 내가 뭐 부모님을 골라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눈을 떠보니 그냥 부잣집에 떨궈져 있었을 뿐이야!”
“지은 씨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난 다만…….”
“아녜요. 그래도 멋져요. 도희의 말처럼 지태 씨가 대단한 건 사실이니까!”
갑작스러운 지은의 칭찬에 지태가 이번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시간 내서 회사로 놀러가도 돼요?”
지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보았다.
‘이 여자, 왜 이러나? 설마…? 에이, 아니겠지!’
지태의 대답이 빠르게 터져 나오지 않자 지은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을 내놓았다.
“보다시피, 아시다시피, 나는 재벌 집 딸이잖아요. 혹시나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지태가 쓰게 웃었다.
지은의 의도를 잠시 착각한 민망함을 그녀의 발언에 슬쩍 묻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런 영양가 있는 방문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하!”
* * *
베트남의 바이어 레뚜언에게서 LED 전등을 구매하겠다는 연락이 날아든 것은 단가표를 넘겨준 지 딱 사흘 만이었다.
비록 10만 달러짜리 코딱지만 한 오더이긴 하지만, 오퍼상 본연의 취지를 살린 첫 오더라는 점에서 한스무역으로썬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골드웰 인터내셔널이란 동종 업계의 어려움을 해결해달라는 오더를 받았을 때보다도 지태에게는 그것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지태는 들뜬 마음으로 조현민과 함께 거래업체를 방문해 구매의사를 피력했고, 가계약서까지 작성했다.
다음 방문지는 전광판에 들어갈 모듈 생산 업체였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레뚜언은 현지 업자로부터 모듈을 구해달라는 제안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품질 상태를 살펴보고 미리 단가도 알아둘 겸해서 방문하려는 거였다.
현재 운전대를 잡고 있는 조현민이 해당업체가 있는 안양 쪽으로 승용차의 방향을 틀 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음료 홀더 위에 얹어 놓은 조현민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떨어댔다.
흘깃 내려다본 조현민이 지태를 돌아보았다.
“수연인데?”
“내가 받을까요?”
“그냥 스피커폰으로 돌리지, 뭐. 수연이랑 나랑 연애하는 사이도 아니고.”
조현민은 썰렁한 농담을 내뱉고는 곧 통화 버튼을 터치한 후 곧바로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어, 수연 씨! 왜?”
- 저, 전무님! 사무실에 소, 손님이 와 있어요.
박수연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고, 어딘지 모르게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어떤 손님이 왔기에 이러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린 조현민이 급히 물었다.
“왜 그래? 누가 찾아왔는데 그래?”
- 여기 오신 분들이 대, 대표님을 찾아요.
“분들? 그 사람들이 한 대표를 왜?”
- 아악!
그 순간 박수연의 스마트폰을 누군가 낚아챈 모양이다.
박수연의 짧은 비명 소리 뒤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니가 한지태라는 새끼세요?
대뜸 반말로 거칠게 나온다.
내뱉는 목소리의 악센트로 보아 딱 건달말투였다.
그런 것에 주눅이 들 조현민이 아니다.
“댁은 누구쇼?”
-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 시발 놈아! 니가 한지태냐고?
“야, 이 개새끼야! 넌 도대체 누군데 대뜸 반말에다가 욕지거리야?”
- 허! 이런 개자식 좀 보소? 난 너를 잡으러 온 니 애비다, 이 새끼야! 너 좋은 말로 할 때 바로 튀어와. 조금이라도 늦거나 아예 낯짝을 비치지 않았다간 여기 이년을 데리고 네놈 올 때까지 실컷 재미나 볼 거니까.
-아악!
그리고 뒤이어 박수연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겁박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태는 조현민에게 어서 차를 돌리라는 눈빛 사인을 준 뒤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 바로 가긴 가는데, 그전에 정체나 밝혀라. 너희들 누구야?”
- 오면 자연히 알게 돼, 새꺄! 그니까 발바닥에 땀나게 튀어와. 알겠어?
놈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이미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다가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듯 눈동자만 위로 치켜뜬 채 골똘히 생각을 굴렸다.
* * *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다.
책상이란 책상은 몽땅 다 뒤집혀 있었고 의자들이며 기타 모든 사무집기들도 부서지고 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딱 봐도 조폭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여덟 명의 비곗덩어리들이 사무실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그런 중에 휴게실 소파 테이블에 발을 올려 포갠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덩어리들을 이끌고 쳐들어온 대가리로 보였다.
박수연이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듯 바싹 얼어붙은 얼굴로 놈의 앞에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덥석!
“아악!”
덜덜 떨며 찻잔을 내려놓던 박수연이 자신의 손목을 놈이 콱 움켜쥐자 비명을 토해냈다.
“조용히 안 할래! 너 이런 식으로 자꾸 앙탈 부리면 확 끌고 가서 문신 뜬 다음 섬에다가 팔아버린다!”
움찔!
덜덜덜.
박수연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어 댔다.
놈은 박수연의 그런 모양새가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대가리가 짓궂게 낄낄거리자 나머지 똘마니 놈들도 그를 따라서 느물느물 웃었다.
“야! 너 여기서 한 달 내내 뺑이 치면 얼마 받아? 이 오빠가 좋은 데 소개시켜 줄까? 너 정도 몸매에 상판대기 액면이면 한 달에 못 벌어도 이삼천 이상은 그냥 확 땡길 수가 있는데! 어때, 입맛 당겨?”
“도대체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저씨들은 어디서 오셨는데요?”
“왜긴!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지. 그리고 우리는 절대 나쁜 사람들 아니다. 우린 불철주야 정의를 위해 세상의 모든 불의들을 뿌리 뽑고자 애쓰러 다니는 사람들이야. 이 시대 마지막 정의의 사도라고나 할까. 대충 그런 오빠들이라고 보면 돼.”
좋은 쪽으로만 미화를 시키고 말을 빙빙 돌려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있지만, 결국 결론은 자기네가 조폭이며 해결사라는 이야기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넓게 포진해 있던 덩어리들이 일제히 출입문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지태와 조현민이었다.
약간은 무덤덤한 지태와는 다르게 조현민의 얼굴은 들어서자마자 벌써부터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이 개새끼들! 얀마, 너희들 뭐야?”
“시발, 뭐기는! 그나저나 니가 한지태냐?”
“뭐, 시발? 하, 이 새끼들 좀 봐! 야, 지태야. 나 오늘 절대 말리지 마라. 내가 오늘 사고 제대로 한번 쳐볼 테니까, 시발!”
조현민은 어깨에 걸고 있던 서류가방을 바닥에 홱 내던지고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 있던 육덕들부터 하나둘씩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이! 너님께서 방금 사고를 치겠다고 읊조리셨어? 그래, 쳐봐라. 어떻게 칠래? 자, 어디 한번 사고를 쳐 봐. 난 그냥 가만히 서있을게.”
아무리 못돼도 120kg은 훌쩍 넘길 것 같은 비곗덩어리였다.
놈은 자신의 가슴팍을 바짝 들이밀며 어깨를 이용해 조현민의 가슴팍을 툭툭 건드려왔다.
“아이, 시발! 오늘 일진도 안 좋은데 이대로 사고 치면 내가 골 좀 패겠는데? 야, 지태야! 안 되겠다. 오늘은 내가 좀 참아야 할 듯!”
조현민은 잽싸게 뒤로 빠지며 지태의 등 뒤로 가서 숨었다.
바싹 다가왔던 육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이 새끼 뭐냐?’하듯 양손바닥을 허공을 향해 으쓱 들어보였다.
그제야 지태가 앞으로 나섰다.
“니들 뭐냐? 어디서 왔어?”
“우리? 이 형님들은 강남 돈두파 식구들이다! 우리 나와바리에 개업을 했으면 미리 찾아와서 인사도 올리고 떡도 좀 돌리고 그래야지, 이 사람아. 그니까 우리 돈두 큰형님께서 버럭 화를 내시잖아. 네놈 버르장머리 좀 고쳐 놓으라고 말이야!”
조직이라는 새끼들이 멀쩡한 민간 기업을 찾아와 보호세 내놓으라는 이야기는 태어나 처음 들었다.
이유 같지도 않은 것을 이유라고 앞세우는 것을 보면 놈들의 핑계가 참으로 궁색하거나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부류라고 생각했다.
지태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거네.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냥 얻어터지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면 네놈들한테 세금이라도 내랄까봐 이 지랄들을 다 떨었어? 인마! 애교도 사람 봐가면서 떨어야지!”
어쭈?
육덕의 표정이 바로 그러했다.
말빨로 기선 제압을 하려던 애초의 의도가 먹히지 않자 놈은 순간 당황한 듯했다.
놈은 곧 휴게실 소파에 앉아 있는 대가리를 돌아보았다.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고개를 빳빳이 세운 대가리가 비릿한 웃음을 끌어올렸다.
지태의 기세가 가상하다고 여기는 듯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놈은 이내 가소로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태의 모습은 같은 건달패도 아니고 기껏해야 먹물 든 대가리에 펜대나 굴리는 샐러리맨이었다.
이런 민간인 하나 버릇 고치는 데 무슨 긴장감 따위가 필요하겠나.
대가리가 덩어리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적당히 손부터 봐주라는 뜻.
“인마, 방금 우리 형님 말씀 들었지? 우리 망치 형님께서 네놈 주둥이부터 갈아 놓으라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이 주먹을 휘둘러 왔다.
나름 선방의 묘미를 아는 놈이다.
하지만 살집이 두툼한 탓에 스피드는 그다지 없었다.
파앗!
다만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게 뻗어오는 주먹만큼은 제법 묵직해 보였다.
고개를 숙이는 위빙 동작으로 주먹을 살짝 흘려보낸 지태는 순간 균형을 잃고 허둥대는 놈의 관자놀이를 엄지 끝으로 찍었다.
쩌억.
아주 단순하고도 일견 장난처럼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놈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선 채로 바르르 떨더니 이내 바닥에 코를 박았다.
마치 호박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쿠쿵.
헐!
그 동작이 워낙 전광석화 같고 자연스러워서 제 두 눈으로 목도한 건데도 조현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태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과 필리핀에서의 활약상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