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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31화 (31/272)

031화. 우연한 두 번째 만남(3)

“비웃은 게 아니라면 됐어요. 대신 내가 술 한 잔 대접할 기회를 줘요. 네?”

지태가 난감한 표정으로 강성원을 돌아보았다.

나 좀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는데 강성원은 짓궂게도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곧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굴에 가득한 장난기를 지운 채 다가왔다.

그러고는 지은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이 친구하고 얘기 좀 나눌게요.”

강성원은 지태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지태야! 이게 다 뭔 일이냐? 워낙 요상한 일이 벌어지니까 애써 마신 술조차도 다 깨버렸다.”

“인마, 난 술자리 처음부터 깼어. 네놈이 아름 씨를 소개해준다는 말을 할 때부터.”

“헤헷!”

강성원은 염치가 없다는 듯 머쓱하게 웃었다.

“자식, 엉큼하기는!”

밉지 않게 흘기는 지태를 보며 다시금 머쓱한 웃음을 날리던 강성원이 물었다.

“근데 저 여잔 누구냐? 재벌 2세를 친구로 둔 오빠의 여동생이면 저 여자 집안도 빵빵하다는 얘기잖아? 글치?”

그러자 지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쓰게 웃었다.

“네놈이 저 여자 집안에 대해 듣는다면 아마도 뒤로 발라당 나자빠질 거다.”

“뭐야? 그럼 넌 뭘 알고 있다는 거냐? 저 아가씨 집안도 재벌이야?”

“놀라지 마라. 바로 부경그룹의 외동딸이니까!”

“아, 부경그룹! 뭐, 뭐, 뭐라고?”

순간 강성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가 퍼뜩 물었다.

“야, 그럼 저 여자가 그때 네가 말한 임경남의 그 여동생…?”

“그래, 인마! 하, 그나저나 정말 골 때리는 상황이다. 이럴 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

지태가 입바람을 훅 불더니 이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 강성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인마. 여기서 적당히 떼어 내고 끝내야지. 근데 어떻게 너를 못 알아보냐?”

“딱 보면 모르겠어? 쟤는 재벌 2세야. 나 같은 흙수저까지 알아봐 줄 만큼 여기가 한가하지 않으시다는 증거지.”

지태가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검지로 콕콕 찍어 보였다.

쓴맛을 다신 강성원이 어떡하든 이 자리에서 내뺄 궁리를 했다.

“암튼 난 몰라. 네놈이 알아서 해라. 나랑 아름이는 여기서 슬그머니 뒤로 빠질 테니까.”

“하, 이런 의리 없는 자식!”

지태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강성원이 두 손을 모으더니 싹싹 빌었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 딱 한번만 봐줘라. 지금 오랜만에 내 기분이 완전 예술이거든. 우리 아름이 기분 또한 마찬가지고. 이 분위기를 쭉 이어가서 네놈 조카 하나 딱 만들어놓을 테니까, 응?”

강성원의 너스레에 지태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약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지태는 제법 묵직한 꿀밤 한 대를 강성원의 머리에 먹여주었다.

“에라, 이 자식아!”

지태에게서 반 강제로 승낙을 얻어낸 강성원은 서둘러 김아름을 데리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이제 둘만 남게 되자 지은은 말했다.

“내가 자주 다니는 분위기 좋은 술집이 있어요. 우리 거기로 가요.”

하지만 지태는 완강한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기왕 사줄 거라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사달라고 했다.

그렇게 지은을 이끌어 데려온 곳은 재래시장 근처에 있는 먹자골목이었다.

지태는 그중 피순대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으로 지은을 데리고 들어갔다.

“순대 좋아해요?”

지태가 묻자 지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주 좋아해요.”

아니, 사실은 죽을 맛이었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생전처음 맡아 보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지금도 그 냄새 때문에 미칠 노릇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번 내뱉은 말도 있고, 또한 지태를 배려해서 애써 꾹 참고 견뎌보는 중이다.

그러다가 이윽고 주문한 순댓국 두 그릇과 돼지귀때기며, 내장 따위의 수육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결국 지은은 그대로 화장실을 향해 달음질쳐야만 했다.

지은이 한바탕 토하고 나올 때까지 지태는 수육을 안주 삼아 소주를 두어 잔 정도 마셨다.

“미안해요. 아까 저녁 때 먹은 게 얹혔나봐.”

지은이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며 수줍게 웃었다.

“이해합니다. 재벌가에서 자란 사람이 언제 이런 걸 한번 맛보기나 했을까.”

지태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다시금 술이 채워진 소주잔을 비웠다.

그걸 지켜보던 지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요? 내가 재벌의 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지은은 지태가 자신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글쎄요. 내가 아는 거라곤 고작 지은 씨가 부경그룹의 외동딸이라는 것 정도?”

순간 지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헐!’

곧 황당하다는 얼굴로 지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내 신분을 알고 있어서 라운지 바에서 자신을 도와준 것은 아닐까 하고.

행여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잔뜩 기대하면서 말이다.

또는 김칫국부터 들이켜면서 뭔가 그 이상의 엄청난 상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은은 속으로 냉소를 퍼부었다.

‘그렇담 일찌감치 꿈 깨, 이 엉큼한 저질아!’

이런 지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태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씁쓸하게 말했다.

“역시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군요.”

“기억… 이라고요? 그럼 우리가 구면이라는 뜻인가요?”

지태가 이번엔 약간의 냉소를 입술 끝에 걸었다.

“두 달 전쯤? 아마 그때쯤 될 겁니다. 부경그룹 본사에서 보안 애들하고 한판 붙고 있을 때 지은 씨가 짠하고 나타나서 싸움을 말렸으니까.”

“헐!”

지은은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놀라움과 황당함이 반반씩 교차하는 얼굴로 그녀가 다시 입을 떡 벌렸다.

거기에 대고 지태가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오늘 우리의 만남이 우연치고는 너무도 기가 막히고 고약하죠?”

“고약할 것까지야 뭐 있겠어요. 다만 그림이 좀 어색하고 이상할 뿐이지. 아,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요!”

지은은 ‘아니고요!’라는 부분에선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실으며 강조했다.

“그나마 다행이네. 기분 나쁜 자리라고 했다면 바로 일어설 참이었는데.”

지태가 갈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쓸쓸한 웃음을 날렸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지은이 문득 자신의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더니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줘요.”

“안주가 마땅찮을 텐데…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깍두기만 있어도 돼요.”

털털하게 말하는 지은을 잠시 들여다보던 지태가 그녀에게 소주를 따라 주었다.

채워진 술잔을 지태의 잔 가까이에 가져다대며 지은이 말했다.

“우리 건배해요.”

쨍!

지태가 아무 말 없이 잔을 부딪쳤다.

그러고는 단숨에 들이켜자 지은 역시도 따라서 원샷했다.

잠시의 침묵 후에 지은이 어렵게 입을 뗐다.

“아깐 고마웠어요. 그리고… 그때 그쪽 아버님 일은 오빠를 대신해 내가 사과할게요. 죄송해요.”

“난 그쪽이 아니라 지탭니다, 한지태.”

“네, 한지태 씨.”

복창하듯 제대로 제 이름을 불러주는 지은을 보며 지태가 씁쓸하게 말했다.

“한데 다 끝난 일입니다. 어차피 사과를 받아야할 분께서는 이미 세상에 안 계시니까.”

“예엣?”

지은이 깜짝 놀란 눈빛으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소주병을 들어 자신의 빈 잔을 먼저 채우고 지은의 잔에도 채워준 다음 지태가 덧붙였다.

“그때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안 돼 돌아가셨어요. 아, 물론 지병으로!”

행여 임경남에게 맞아 사망한 걸로 오해할까봐 지태는 얼른 부연설명을 더했다.

극단적인 선택이었긴 하지만, 어차피 폐암말기에 손조차도 쓸 수 없는 지경에 놓인 거라서 지병으로 급히 둘러댄 거다.

“하아!”

그 말을 들은 지은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우리 오빠가 어르신께 너무 못된 짓을 했네요.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는 거 잘 알아요. 그래도 대신 사과는 할게요. 받아주세요.”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게 지은 씨의 마음이 편하다면야…….”

지태가 이번엔 그윽하게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지태의 미소며 눈빛조차 받아내기 힘들다는 듯 지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지은이 안주도 없이 계속 소주잔을 비워댈 것 같아 지태는 아직 순댓국을 다 비우지도 못했지만,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지은의 입맛에 맞는 안주를 찾아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 * *

“햐아~ 이놈 얼굴 좀 보소! 나 없이 너희들끼리만 술을 마시니까 쏙쏙 잘도 넘어가대?”

출근하자마자 조현민이 혀를 끌끌 차댔다.

누구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어제 술자리에서 그를 억지로 쫓아낸 줄 알겠다.

“형님! 말이야 바로 합시다. 고장 난 튀김기계를 탓해야지 왜 나를 탓합니까? 내가 기계가 고장 나라고 고사를 지냈어요?”

지태가 맞받아 투덜거리자 조현민이 피식 웃었다.

어제 라운지 바에서 전화를 받고 바삐 달려갔는데 기계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니었다.

콘센트에 전기 코드가 깊이 찔러지지 않아 전원이 안 들어와서 벌어진 작은 소동이었다.

“덕분에 이젠 냄새만 맡아도 질리는 치킨에다가 맥주만 냅다 들이부었다, 혼자서.”

“잘하셨어요, 형님! 아마 어제 우리랑 함께 계셨더라면 분명 형님은 그 상황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을 거야. 안 계신 것이 우릴 도와준 겁니다.”

“그 상황이라니? 어제 술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어?”

조현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물어왔다.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쓰게 웃은 지태가 라운지 바에서 벌어진 소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 임지은과 개인적으로 얽힌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안 좋은 일까지 말해줘야 할 것이므로.

“햐, 그래서 결국은 재벌의 딸이랑 술까지 마셨어? 역시 CEO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한스무역의 대표님답게 다이아몬드수저랑 노셨구나아!”

“아, 쫌! 가뜩이나 주량 오버해서 죽겠구만.”

지태는 놀려대는 조현민을 뒤로 하고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조현민은 집요했다.

커피 한 잔을 핑계로 다시 또 은근슬쩍 다가왔다.

“자, 마셔.”

수작이 뻔히 보이니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었다.

지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대면서 물었다.

“뭐요? 뭐가 더 궁금한데요?”

“그냥 전부 다 궁금하지.”

“그니까 뭐가요?”

“재벌 딸하고의 오붓한 술자리를 가졌어! 분위기 좋게 2차까지 갔어! 그 후 말이야, 그 후! 진도 좀 빼봐, 어서!”

“진도는 무슨! 그런 것 없어요. 2차 때 좀 많이 취한 것 같아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게 끝!”

“에이, 아닌 것 같은데, 뭘! 생각을 해봐라. 재벌 딸하고 술 마실 기회가 어디 자주 오냐? 더구나 엄청난 미인이야. 그럴 때 보통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것 있잖냐.”

“꿈꾸는 그것이라뇨?”

“모든 남자들의 로망 말이야. 재벌 딸과 잘 돼서 남자 신데렐라가 되는 꿈 말이다!”

“아이고, 됐네요! 그런 비슷한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만 관심 꺼주세요.”

“에라, 이 싱거운 놈아! 만약 내가 너였다면 그 상황에서 앞뒤 안 가렸어, 인마! 그냥 확 자빠뜨린 다음…….”

“아, 쫌! 그만 하시라니깐!”

“알았어, 인마. 그만 가면 되잖아, 가면!”

조현민은 뭔가 아쉬움이 큰 표정으로 덜 떨어진 놈이라느니, 등신이라느니 뭐라 뭐라 구시렁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흘깃 보다가 지태는 곧 노트북을 켰다.

그러다가 문득 픽 하고 웃었다.

사실 임지은과 어제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조현민의 말마따나 그 로망이라는 것을 아주 잠깐이지만 꿈꿔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상적인 육체와 사고를 가진 남자라면 당연히 꿈꿔볼 로망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내 머릿속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영화나 드라마처럼 이뤄진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설령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안 될 말이었다.

그녀의 오빠인 임경남을 그리 험하게 다뤄놓고 지은과의 로망을 꿈꾼다?

그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후훗!”

어젯밤 일을 잠깐 떠올렸던 지태는 기억을 털어내며 다시 웃었다.

그러다가 흘깃 조현민을 돌아보았다.

노트북에 고개를 박고 이메일을 확인하던 조현민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는 그대로 노트북에 박아둔 채 입으로만 물었다.

“뭘 봐?”

“암튼 눈치 하난 귀신이셔. 오늘은 뭐 눈여겨볼만한 의뢰 같은 거 없어요?”

“야! 톱니바퀴 물리듯 계속 일이 들어오면 진짜로 재벌 되게.”

“그런가? 하핫!”

“그리고 궁극적인 우리 한스무역의 목표는 그게 아니잖아. 아무리 작은 오더라도 우리 본래의 업무를 찾아야지.”

하기는 그렇다.

기업 해결사 노릇이나 하려고 창업을 한 것은 아니니까.

첫 오더로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자금이 확보되었으니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본연의 업무를 찾아 영업을 뛰어야 할 때다.

쓰게 웃은 지태가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조현민을 불렀다.

“아, 참. 형님!”

“응, 왜?”

“오늘 오후에 면접 볼 준비하세요.”

“웬 면접?”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박수연!”

“헛, 참! 이놈이 딱 그놈이네. 번갯불에 냉큼 콩 구워먹을 놈!”

조현민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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