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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30화 (30/272)

030화. 우연한 두 번째 만남(2)

엷은 에메랄드 빛깔의 커튼이 드리워진 곳이다.

실내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던 음악 소리까지 삼킬 정도로 앙칼진 여성의 목소리에 홀 안의 모든 시선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지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둘만의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던 강성원과 김아름조차 대화를 멈추고 돌아볼 정도였다.

“내가 뭐 좋아서 이 자리에 나온 줄 알아? 마지막 경고를 하기 위해 나온 거야. 앞으로는 제발 우리 오빠 통해서 나한테 찝쩍대지 말라고. 그 소리 해주려고 나온 거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 여자가 커튼을 거칠게 걷으며 뛰쳐나왔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지태가 한눈에 알아볼 만한 여자였다.

비록 아버지 때문에 분노를 안고 달려간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처음으로 맞닥뜨린 그녀였지만, 워낙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부경 그룹의 외동딸 임지은이었다.

“야, 임지은! 너 많이 변했다? 근데 그거 아냐. 우리 같은 부류들은 과거를 세탁한다고 해서 근본 자체는 변하지 않아. 그게 우리들 같은 사람들의 본질이고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뒤따라 나온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낚아채며 붙들려고 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햐, 시발! 변하긴 진짜로 변한 모양이네. 야, 임지은! 예전에 툭 하면 어울리던 별장 파티에서 날라리 퀸으로 유명하신 분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아주 요조숙녀로 변신하셨어.”

“그게 언제 적 얘긴데! 그래, 설령 그랬다 쳐. 나 잠깐 방황할 때 너희들 같은 걸레쪼가리들하고 좀 놀아주었다. 그게 뭐 어때서? 나 같은 사람은 요조숙녀 좀 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니?”

지은은 자신의 어깨를 붙든 사내의 손을 거칠게 털어내며 냉소를 한가득 흘렸다.

“볼일 다 봤으면 이제 좀 꺼져 줄래? 그 면상을 마주하는 것조차 너무 역겨우니까!”

지은은 조소와 콧방귀를 동시에 날리며 돌아섰다.

그러고는 홀 안을 또각또각 가로질러 걸어오다가 우연히 지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무슨 생각에서인지 지은이 돌연 그윽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머, 자기야! 여긴 언제 온 거야?”

빠르게 다가온 지은은 비어있던 지태의 옆자리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꿰차고 앉으며 대뜸 팔짱을 꼈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일 새도 없었다.

강성원과 김아름이 벙 찐 모습으로 지태와 지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이대로 조금만 있어 줘요.”

지은은 입가에 한껏 그려진 미소를 지우지도 않은 채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부탁을 해왔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진짜로 절실하고도 간절한 목소리였다.

“야!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너 지금 딴따라 오디션 보냐?”

지은의 뒤를 따라 금세 쫓아온 사내가 지태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무시하는 눈빛으로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그러더니 곧 조소를 입에 걸고는 지은에게 물었다.

“이건 또 뭐 하는 새끼냐?”

“새끼라니, 그 더러운 입 닥치지 못해!”

“하, 지랄!”

“내가 말했지? 요즘 내가 썸 타고 있는 사람 있다고. 바로 이 사람이야. 그니까 눈앞에서 얼쩡대지 말고 좀 꺼져줄래?”

“야, 시발! 이거 누가 봐도 급조한 티가 나거든!”

사내는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는 식으로 냉소를 흘렸다.

“후우!”

지태가 입바람을 훅 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둘 사이에 끼어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낯선 사내의 행동에 기분은 몹시 더러웠다.

다짜고짜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놈의 눈빛부터가 우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사이 지은의 행동은 더욱 과감해졌다.

지극히 도발적이고 요염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왜냐 하면 그녀가 갑자기 진한 스킨십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지은은 눈앞의 사내에게 내보이려는 듯 지태의 가슴팍을 손으로 쓸거나 목 부위를 금방이라도 핥아 댈 것처럼 굴었다.

‘하, 미치겠네, 정말!’

위기에 처해 있는 지은의 처지를 생각하면 대놓고 뭐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목석처럼 모르는 척 내버려두자니 자신이 마치 놀림감이 된 기분이었다.

지태는 최대한 지은이 무안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를 떼어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지은의 남친 행세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는 동시에 저 버릇없는 사내도 제풀에 떨어지리라는 게 지태의 계산이었다.

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내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지은 씨와 만나기로 약속이 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여기에서 보게 됐네요. 실례지만 우리 지은 씨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그러십니까?”

“하, 시발! 점점…….”

사내는 같잖다는 눈빛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쯤에서 자신이 나서야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지은이 사내에게서 지태를 떼어놓으려는 듯 팔뚝을 살짝 잡아끌었다.

“미안해, 자기야. 이 사람은 울 오빠 친군데 오래 전부터 난 정나미 떨어지게 싫다고 해도 자꾸만 찝쩍거리는 거야. 오늘 일은 나중에 사과할 테니까 우선 당장은 자기가 이해해줘. 알았지?”

“조 까고 있네, 시발! 너 지금 나랑 장난해? 그 개소리를 나더러 믿으라고?”

사내는 지은을 매섭게 보려보며 사납게 내뱉더니 돌연 화풀이의 대상을 지태에게로 돌렸다.

그는 지태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그의 가슴팍을 검지로 콕콕 찍어대며 시비를 걸어왔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지은이의 새로운 기둥서방이냐? 시발! 좋은 말로 할 때 지은이 놔두고 썩 꺼져! 안 그랬다간 나한테 오늘 제대로 죽는 수가 있으니까!”

지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 순간 지은이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도대체? 그만 두지 못해!”

“넌 가만히 있어!”

사내가 지은을 향해 독하게 눈을 부라렸다.

“후우!”

그걸 보며 지태가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대로 두고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이봐요. 당신 지금 너무 나가는 거 아냐? 초면에 나한테 너무 실례를 하는 것 같은데?”

“뭐, 너무 나가고 있어?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네까짓 게 뭘 어쩔 거데? 얀마! 너 내가 누군 줄이나 알아?”

“당신이 누구건 난 관심 없어!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합니다. 정중히 부탁할 때 그만 하고 꺼져주세요.”

속에선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지태는 애써 냉정을 유지하면서 좋게 타일렀다.

그러자 불의를 보면 대체로 꾹 참는다는 강성원을 대신해서 김아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술기운 때문에 복숭앗빛으로 살짝 달아오른 모습인 채 김아름이 사내에게 삿대질을 하며 따졌다.

“이봐요, 아저씨!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까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으시네. 지금 댁의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녜요?”

“하, 뭐래니! 이 물건은 또?”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김아름을 밀쳤다.

그제야 불의를 봐도 꾹 참는다던 강성원이 발끈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이, 이봐. 너 지금 사람 쳤어?”

“그래, 쳤다, 이 새끼야. 어쩔래?”

“하, 이런 씨방새!”

강성원은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 사내의 멱살을 확 잡아 낚아챘다.

당장 말리지 않는다면 진짜로 주먹이라도 날릴 태세였다.

지태가 급히 강성원을 말렸다.

“성원아, 잠깐만 참아 봐. 이 사람하곤 내가 얘기할게.”

“아냐. 나 그냥 말리지 마. 오늘 이 새끼 내가 확 죽여 놓고 말 테니까!”

“야, 강성원!”

급기야 지태가 언성을 높였다.

“하아!”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통에 강성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의 멱살을 풀었다.

“내가 널 봐서 참는다.”

“참긴 뭘 참아, 이 새끼야!”

강성원의 그 말에 사내가 발끈하며 눈을 부라렸다.

애써 눌러놓았던 분기가 다시 치솟았다.

강성원이 끓어오르는 분기를 못 참고 몸을 홱 틀자 지태가 급히 또 말렸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깐!”

강성원이 지태와 눈을 마주쳤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내젓는 폼이 사내의 하는 짓을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지가 않았다.

하긴 그동안 봐온 지태 성질로 보건대 그냥 참고 넘어갈 인간이 아니다.

강성원은 사내의 처리는 지태에게 맡기기로 했다.

애써 분기를 누르는 강성원에게 지태가 말했다.

“성원아, 넌 아름 씨나 챙겨.”

“알았어.”

강성원은 곧 저만치로 밀쳐 넘어진 김아름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사이 지태가 사내에게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지태가 독하게 눈을 부라렸다.

“당신, 내가 분명히 그만 두라고 경고했을 텐데!”

“그니까 그만 두지 않으면 어쩔 거냐고, 이 새끼야!”

쫘악.

급기야 사내는 지태의 뺨을 냅다 갈겼다.

손이 올라오는 순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태는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아주었다.

사내가 선방을 날려 온 것을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제 명분이 생겼으니 손을 좀 봐줘도 될 성 싶었다.

지태는 망설임 없이 곧장 사내의 바지춤을 한손으로 움켜쥐었다.

“어, 어?”

사내가 놀라서 황당하다는 소리를 토하는 사이 지태는 그를 허리에 얹듯 번쩍 들더니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쿠쿵!

담벼락에서 늙은 호박 떨어지는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이쪽저쪽에서 통쾌하다는 듯 손님들의 가벼운 웃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웃지 마, 시발 새끼들아!”

사내가 바닥에 나자빠진 채 애먼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지태에게로 가져왔다.

“이 개새끼! 너 지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감히 대호그룹의 둘째인 나한테 손찌검을 해?”

사내는 고통스럽게 겨우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며 협박해왔다.

‘뭐야, 이거! 어쩐지 내가 똥을 제대로 밟은 같은데…….’

지태는 일이 잘못 꼬여간다는 표정으로 목 근육을 풀 듯 괜히 고개를 두어 바퀴 돌렸다.

그때 지은이 두 사람의 앞으로 나섰다.

사내가 자신을 재벌 2세라고 과시한 이상 지태가 이제는 기가 질려 위축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 순간 지태에게 더는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현욱 오빠! 먼저 손찌검한 건 오빠야. 그리고 재벌 2세라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위세를 떨어, 떨기는! 사람이 쫀쫀하게 이럴 거야?”

“뭐, 쫀쫀? 이게 가만 두고 보려니까, 정말!”

제 성질에 못 이겨 사내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이제 막 지은의 싸대기를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덥석!

지태가 재빨리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 새끼 이거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지태는 놈의 손목을 꼭 붙든 채 팔씨름하듯 옆으로 홱 비틀었다.

관절이 꺾이자 덩달아 몸이 따라가던 이현욱은 다시 한번 바닥을 뒹굴었다.

“너, 이 시발 새끼!”

재벌 2세라는 위세도 더는 통하지 않자 이현욱은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태의 완력이나 눈초리가 무서워 이제 더는 덤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사이 입바람을 이마 위로 훅 불어제친 지태가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쏙 뽑아 사내 앞으로 뿌렸다.

“이거 내 명함이거든! 어디 부러진 데 있으면 진단서 끊어서 치료비 청구하든가.”

한참을 노려보던 이현욱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명함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응! 한스무역 한지태!”

입안에서 회사명과 지태의 이름을 한번 굴리던 이현욱이 곧 자리를 털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러고는 독한 눈빛으로 지태와 지은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어디 두고 보자는 식으로 이를 악물고는 라운지 바를 빠져 나갔다.

순간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홀 안의 모든 시선들에게서 속 시원하다는 듯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 * *

지태는 곧 강성원과 김아름을 데리고 라운지 바를 나왔다.

상황은 잘 마무리되었고 홀 안의 손님들에게서 격려와 응원의 박수도 받았지만, 지태는 그곳에 계속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이미 깨졌고, 무엇보다 연신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은 밖으로 나오는 그들의 뒤를 지은이 따라 나왔다는 점이었다.

그러고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내가 빚지고는 절대 못 사는 여자예요. 아까 진 빚을 당장 갚게 해줘요!”

지태가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은은 아직도 지태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부경물산으로 임경남을 만나러 갔다가 경호팀하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 지은이 개입해 싸움이 중단됐었다.

그때 분명히 자신의 이름까지 밝혔었는데…….

하긴 재벌의 따님께서 이 하찮은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시려고.

그런 생각에 미치자 지태는 쓴웃음이 절로 새나왔다.

“어머!”

지은은 그것을 비웃음으로 착각한 듯했다.

“지금 속으로 나를 미친년이라고 비웃었죠?”

“아뇨. 비웃은 게 아니라 난 그저…….”

지태가 뭔가 설명하려 할 때 지은이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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