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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9화 (29/272)

029화. 우연한 두 번째 만남(1)

“이런 데서 무슨 술 맛이 난다고!”

라운지 바에 들어서자마자 조현민은 툴툴거렸다.

고급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술집이었다.

술값도 만만찮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다가 손님들의 수준도 제법 있는 집의 자제들처럼 보이는 젊은 사람들 천지였다.

이런 건 체질상 자신에게는 안 맞는 옷이라는 듯 투덜거리는 조현민을 지태가 웃는 낯꽃으로 설득했다.

“일단 앉죠. 맥주나 한 병씩 하다가 성원이 오면 바로 다른 곳으로 옮기게.”

“야, 인간적으로 난 이런 데는 진짜 낯간지러워서 오래 못 있어. 삼겹살에 소주를 발라야 그나마 술 마시는 기분이 좀 나지. 이게 뭐냐, 간지럽게!”

조현민은 비 맞은 중처럼 구시렁대면서도 전망이 좋은 빈자리가 보이자 서둘러 앞장서더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태는 강성원이 올 때까지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간단히 맥주 두 병을 시켰다.

병맥주가 반쯤 비워졌을 때 지태가 문득 물었다.

“형님! 내가 필리핀에 나가 있을 때 혼자 사무실 지키느라 적적했죠?”

조현민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잔뜩 좁히며 쳐다보았다.

“행간에 감춰둔 게 뭐야?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인마.”

“한국말을 이해 못하시나! 형님 혼자 사무실 지키는 게 심심하지 않았냐 이 말 몰라요?”

“그니까 뜬금없이 왜?”

점점 목청이 높아가는 걸 보니 빨리 실토를 하지 않으면 머리통이라도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지태가 히죽 웃고는 본론을 꺼냈다.

“우연이든 천운이든 간에 첫 오더에 무려 40억을 벌었어요.”

“그렇긴 하지. 로또 맞은 것보다도 컸으니까.”

조현민이 곧바로 고갯짓을 해주면서도 도대체 무슨 말을 늘어놓으려고 이렇게 사설이 긴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만 하면 직원 몇 명을 더 써도 사치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을 거 같아서 말이죠.”

“그래서 직원들을 충원하자고?”

지태는 대답 대신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아직 업무 분담할 것도 없는데 굳이……?”

“아직은 그렇지만, 언제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형님.”

“거야, 당연하지만.”

“해서 미리 두어 명 충원해 훈련 좀 시켜두자는 말입니다. 나중에 개개인이 일당백이 되게끔!”

조현민이 찡그렸다.

“그 훈련 교관은 물론 나일 테고?”

“그거야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대표님께서 조현민이라는 졸병을 놔두고 손수 교육을 시킬 순 없으니까.”

“에라!”

조현민이 끝내 손을 치켜 올렸지만, 이내 내렸다.

물론 조현민은 장난이었지만, 흘깃 돌아보는 옆자리의 눈초리들은 오해하기 딱 좋은 폼이었다.

“혹시 누구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냐?”

역시나 눈치 하면 조현민이다.

괜히 지태와 죽이 맞는 사수라고 하겠는가.

계속 농담만 흘려댈 수는 없었다.

지태는 얼른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한 뒤에 좀 더 진중하게 대화에 임했다.

“선우글로벌 후뱁니다, 여자고!”

“여자?”

“형님하고 나를 퇴사케 만든 그 새끼가 결국 한 사람을 더 쫓아낸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럼 네가 회식 자리에서 허영만의 성추행을 막아 줬다는 그 신입 여직원?”

지태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끄덕였다.

허영만에게 한바탕 퍼붓고 퇴사할 때 복도에 나와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표했던 바로 그 박수연이었다.

그날 지태는 마음 여린 박수연을 두고 마음속으로 일 년을 버티면 잘 버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예상은 훨씬 많이 빗나가고 말았다.

지태가 퇴사한 뒤 두 달이 채 못 되어 그녀 역시 사표를 내던진 거다.

“너 뛰쳐나오고 더는 딴죽 걸어댈 새끼들이 없으니까 완전히 제 세상 만난 듯 설쳤네, 설쳤어! 그 개새끼는 안 봐도 딱 비디오다.”

조현민은 허영만 상무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입에 게거품부터 물었다.

지태가 곧 맞장구를 쳐줬다.

“그러게요. 오죽했으면!”

“근데 사표 쓴 건 어떻게 알았어?”

“우리 회사 사무실 자리를 알아보러 다닐 때 영업 1부 윤 대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킁킁이, 윤창민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코를 킁킁거리는 버릇 때문에 생겨난 그의 별명이었다.

지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골치 아프게 생겼네.”

조현민이 쓴맛을 다시며 맥주병을 들더니 그대로 나발을 불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 빨아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걔, 마음이 여리다고 안 그랬어? 그런 애를 데려다가 무슨 훈련을 어떻게 시켜?”

조현민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기에 지태는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의 신입시절 조현민의 매서운 가르침에 눈물콧물을 쏙 뺐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조현민은 일을 가르쳐줌에 있어서만큼은 흡사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여리고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박수연이 과연 그 과정들을 선뜻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도 선우에 입사할 때 동기들 중에서 1등으로 들어온 앱니다.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마시고 살살 좀 가르쳐서 일당백으로! 알았죠, 형님?”

“살살은 니미!”

그러는 찰나 조현민의 스마트폰이 수상쩍게 울어 댔다.

“울 와이프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조현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울 여봉봉! 낭군님이 벌써 보고 싶어지셨어?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저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그것이 의외의 결과로 이어지면 자신감도 절로 상승하는 법이다.

조현민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나 목소리 자체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 어휴, 이 아저씨 왜 이러실까? 자기 술 마셨어?

“이제 막 들어오긴 했는데, 왜?”

- 아무래도 오늘 우리 가게 문을 닫아야할까 봐.

“왜? 어디 급한 약속이라도 잡혔어?”

- 그런 게 아니라 튀김기계가 고장 났나 봐. 전원이 전혀 안 들어와.

하루라도 가게의 문을 닫는 게 아까워 한 달에 두 번 있던 정기휴일 자체도 과감히 없애버린 아내였다.

그런 또순이 아내가 튀김기계가 고장 났다는 이유로 가게 문을 닫겠다?

그건 조현민에게 지금 바로 달려와 도와달라는 반어법이다.

조현민은 곧 쓴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난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

“그러게요.”

지태 역시 아쉽다는 듯 떫게 입맛을 다시는 사이 조현민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여우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달린 열매를 보며 그랬다던가.

‘저 열매는 익지 않아서 분명 시디실 거야.’

조현민의 마지막 내뱉은 말이 딱 그랬다.

“어차피 이런 데서는 아무리 골 패게 마셔도 어차피 술맛도 안 났을 거다. 나 먼저 간다.”

손 흔들며 돌아서는 조현민의 등에 대고 지태는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웃었다.

약속 시간에서 벌써 30분 가까이 지났다.

강성원은 그때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냥 멀뚱하게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태가 맥주 한 병을 다시 주문하려고 종업원을 부르려는 순간 출입문이 열리고 마침내 강성원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태를 찾는 듯 잠시 두리번거렸다.

지태가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자 강성원은 살짝 웃어주고는 곧 다시 밖으로 나갔다.

영문을 몰라 지태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곧 다시 들어온 강성원은 이제 누군가와 함께였다.

처음 보는 묘령의 아가씨다.

뜻하지 않은 손님의 등장이니 앉아서 그를 맞을 수는 없었다.

지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와.”

그러면서도 시선은 자동으로 강성원의 옆을 향했다.

강성원이 씩 웃고는 함께 들어온 아가씨를 소개했다.

“지태야, 인사해라. 여긴 김아름 씨!”

뜻하지 않은 상황이라 살짝 당황스럽긴 하지만 지태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한지탭니다.”

“예, 말씀 많이 들었어요. 김아름이에요.”

지태는 강성원과 김아름에게 앞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강성원은 비어 있는 앞자리에 김아름만 앉히고는 그 자신은 지태 옆으로 와서 앉았다.

“아름 씨를 모시고 올 거 같으면 미리 얘기라도 하지 그랬냐.”

지태는 후렴구에 인마! 라는 소리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초면인 김아름이 있어 최대한 말을 순화했다.

“왜?”

“왜는 무슨 왜! 조금 전까지 현민 형님이랑 함께 있었으니까 하는 소리지.”

“아하! 난 또 뭐라고. 무슨 상관이야, 인마! 내가 너 소개팅 시켜 주려고 어렵게 아름이랑 함께 온 건데.”

헐!

지태가 순간 기가 막힌 표정을 했다.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린가 싶다.

지태가 돌아보자 강성원은 뜻 모를 웃음을 낄낄 쏟아냈고, 김아름은 그런 언질을 미리 받았는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초면인 아름 씨를 앞에 두고 장난치지 말고, 인마!”

결국 ‘인마!’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장난 아냐. 내가 예전에 지구대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던 친군데, 너랑 죽이 잘 맞을 거 같아서 어렵게 설득해서 데려온 거야. 김 순경! 내 말이 맞아, 안 맞아?”

‘어휴! 이 새끼를 어쩌면 좋으냐!’

어쩐지 분수에 안 맞게 라운지 바니 뭐니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지태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타는 속을 앞에 놓인 냉수로 달랬다.

여하튼 거하게 술을 산다고 했으니 주문부터 하고 볼 일이다.

지태는 메뉴판을 김아름에게 넘겨주며 먹고 싶은 걸 골라보라고 했다.

“제 주머니 걱정 마시고 뭐든 맘껏 시키세요.”

“어머! 정말 그래도 돼요?”

곱상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활달한 성격 같았다.

“그럼, 그럼! 이놈 머잖아 신선호나 이창우에 못지않을 젊은 재벌이 될 놈이야. 괜찮아, 뭐든 맘껏 시켜!”

그러자 김아름이 메뉴판에 꽂아 두었던 시선을 들어 강성원을 쳐다보았다.

“신선호, 이창우가 누군데요, 강 경위님?”

“70년대를 풍미했던 율산그룹의 신선호랑 제세그룹의 이창우를 몰라?”

“그분들이 재벌이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김아름의 표정이 어찌나 귀여운지 강성원은 히죽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70년대 앙팡테리블, 즉 무서운 아이들로 불리던 20대 청년 재벌들이었어. 물론 반짝 떴다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럼 앞에 계신 한 사장님이 앞으로 그렇게 되실…?”

“그렇지, 그렇지. 그 두 사람 못지않게 무서운 아이로 불릴 새끼!”

“어휴! 친구한테 새끼가 뭐예요!”

김아름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얼씨구! 두 사람, 북 치고 장고 치고!’

지태는 티키타카를 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주문한 와인과 안주 등이 나오자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강성원은 처음엔 지태와 김아름을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이면서 애써 연결시키려는 모습을 보이더니 점차 취기가 오르자 본래의 목적은 어느새 잊고 말았다.

자리도 은연중 김아름의 옆으로 옮겨 앉았고, 화제 또한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예전 지구대 이야기로 뒤바뀌어 있었다.

지태는 그야말로 꿰다놓은 보릿자루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지태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연신 그려졌다.

‘새끼! 이제 보니 서로 밀당하는 처지였구먼.’

그랬다.

소개팅이니 뭐니 한 것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수단에 불과했고, 결국은 지태를 이용해 자신의 흑심을 채우려는 강성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다행히 김아름도 같은 생각인 듯싶었고, 강성원을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아서 지태는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기왕이면 자신을 핑계 삼아 성사된 이 자리가 부디 썸을 타고 밀당을 하던 간에 두 사람이 비로소 하나의 연인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지태는 속으로 바랐다.

바로 그때였다.

바(Bar) 안쪽에 반원의 벽을 쌓아 별실처럼 꾸며 놓은 테이블 쪽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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