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물고 물리는 게임(3)
진행하던 화물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곳은 반군의 공격이라든가, 기타 긴급에 준하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검문소가 잘 설치되지 않던 지역이었다.
한데 갑자기 정부군들이 길을 막고 섰으니 어찌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빠앙, 빵, 빵!
그때 화물차의 뒤편에서 광대뼈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경적을 울려 대며 외쳤다.
“야, 시발 놈아! 어서 가. 빨리 앞으로 차를 빼란 말이야!”
그러나 화물차 운전자는 뒤차의 협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검문소를 약 100여 미터쯤 남겨두고는 완전히 차를 세우고 말았다.
“하, 저 새끼! 굳이 여기에다가 뼈를 묻겠단 말이지?”
광대뼈 사내가 비릿하게 내뱉고는 독한 눈빛을 한 채 옆을 돌아보았다.
칼자국 사내는 벌써 권총을 꺼내든 채 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광대뼈 사내가 얼른 뒤따랐다.
SUV에서 내린 두 사내가 권총을 들고 다가오자 화물칸에 올라타 있던 현지의 일꾼들이 겁에 질린 채 두 손을 번쩍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칼자국 사내에게 일꾼들을 맡겨둔 광대뼈 사내는 권총을 앞세우고 거침없이 트럭의 보조석 쪽으로 다가갔다.
타다다다닥.
예상치 않게 화물차가 중간에서 멈추자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의 보디가드와 1개 분대 규모의 무장군인들이 황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타앙!
그때 광대뼈 사내가 허공에 대고 권총 한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다시 보조석으로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어서 기어 나와, 이 새끼야!”
그러자 짙은 선글라스에 챙 넓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지태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다 수건으로 눈 밑까지 가리고 있는 터라 겁에 질린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반항할 의지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광대뼈 사내가 총을 겨눈 채 차문을 열자 지태가 냉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사이 어느새 다가온 네 명의 보디가드 중 하나가 얼른 지태의 손에서 권총과 보석 상자를 빼앗았다.
“얀마! 어제처럼 다시 한번 설쳐 보시지, 엉?”
광대뼈 사내가 비릿하게 웃고는 지태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홱 벗겨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동시에 수건까지 거칠게 벗겨 냈는데,
“허, 이런!”
지태가 아니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오리지널 필리피노였다.
“이 새끼! 너 누구야?”
광대뼈 사내는 세상의 모든 황당함을 모두 긁어모아놓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난 그저 돈 받고 시, 시키는 대로…….”
사내는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처럼 겁먹은 표정으로 겨우 대답을 했다.
“누가, 어떤 새끼가?”
“하,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어젯밤 늦게 급히 부탁을 받았고, 난 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야, 이거 가짜 총인데? 어린애들 장난감!”
권총과 보석 상자를 빼앗아갔던 녀석이었다.
광대뼈 사내가 장난감 권총 따위는 상관없고 보석상자나 열어서 확인해보라는 듯 턱짓을 해 보였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한 그대로였다.
상자 안에는 쓸모없는 돌멩이들만 가득 차있었다.
“그놈이 찾는 새끼가 아냐? 가짜야?”
정부군 대위가 광대뼈 사내에게 물었다.
“제대로 속았는데요.”
광대뼈 사내가 힘없이 내뱉고는 칼자국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것도 한번 확인해 봐!”
칼자국 사내가 품속에서 날이 잘 별러진 단도 한 자루를 꺼내 종이 박스에 대고 죽 그었다.
상자의 배가 갈라지며 그 안에 들었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루왁커피가 아니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다 말라비틀어진 커피콩의 껍데기들이었다.
“아, 이 시발 놈!”
탕, 탕, 탕, 탕!
광대뼈 사내가 환장하겠다는 듯 고함을 내지르고는 허공에 대고 권총을 마구 쏘아댔다.
* * *
한편 그 시각 지태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
25톤짜리의 선박이었는데, 이래봬도 예전엔 필리핀 해군의 경비정이었다고 했다.
건조한 지 30년 가까이 되어 퇴역한 것을 공매를 통해 싼값에 사들여 전면 수리하고 개조한 후 주로 해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유람 목적에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국이 불안한 탓으로 뚝 끊긴 관광객 때문에 선장은 날마다 울상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2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배를 쓰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터라 선장은 지태가 마치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노후가 되어 퇴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배는 아직 꽤 쓸 만했다.
전속으로 RPM을 높이면 최고 30노트까지는 나온다고 선장은 장담했다.
지태는 그에게 너무 속도를 높이거나 무리하진 말라고 했다.
가뜩이나 연식이 오래되어 불안한 마당에 바다 한가운데서 엔진 고장이라도 일으킨다면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으니까.
두 시간가량을 달려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파도가 조금 높게 일었다.
그러자 배가 많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멀미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은 아니다.
선장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후안이 선수 쪽에 서있던 지태에게로 다가왔다.
“미스터 한! 이 속도로 반나절만 가면 말레이시아 영해랍니다.”
지태가 바다 저 멀리에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후안!”
동문서답하듯 돌연 날아든 지태의 감사인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후안은 두 눈만 멍하니 깜빡였다.
지태가 인사의 의미를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그림자처럼 지켜 준 거 말입니다.”
“……!”
그제야 후안 안토니오는 맑은 잇속으로 머쓱하게 웃었다.
“모든 필리피노가 다 나쁜 놈들은 아니지요.”
그러자 지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어느 나라나 뒤통수를 후리는 놈들은 존재하니까. 그건 우리 대한민국 역시도 예외는 아니고.”
지태는 이야기 말미에 쓴웃음으로 도리질을 해댔다.
호의를 내보이듯 후안은 지태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아직 방심할 때는 아닙니다, 미스터!”
후안이 정색하고 말했다.
“지금쯤 객실 안에 내버려 두었던 두 놈을 발견했을 겁니다. 그리고 속았다는 것도 알아차렸겠지요. 그렇다면 미스터 한의 흔적을 찾아 벌써 뒤를 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태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망칠 퇴로야 뻔했다.
어차피 비행기를 이용하지 못할 거라 예상할 테니 그들은 육로와 바닷길, 두 곳을 수색해올 게 틀림없다.
그중 육로 쪽은 뛰어 봤자 벼룩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설령 육로로 도망친다 해도 정부군이나 혹은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라면 그들의 협조를 얻어 도로를 막으면 될 것이기 때문에 신경을 덜 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유력한 퇴로는 바닷길뿐이다.
그거야 항구에 수하들을 풀어 수소문하면 지태가 어떤 배를 타고 나갔는지 금방 답이 나올 거다.
지태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선장에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카를로를 피해 필리핀을 빠져나가려는 것을 알았다면 선장은 선수금으로 받은 액수보다 몇 배 더 많은 금액을 제시했어도 단칼에 거절했을 테니까.
돈이 아무리 좋아도 자신의 목숨보다는 소중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카를로의 행동이 조금만 더 굼뜨기를 기대할 수밖에!”
지태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곧 신음처럼 낮은 한숨을 토해 냈다.
흘깃 바라본 후안이 전염된 듯 그 뒤를 이었다.
* * *
“이 쥐새끼 같은 놈!”
카를로는 분노가 치민 얼굴로 씩씩거리며 쾌속정에 올랐다.
삼보앙가에 남아 있던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은 직후 카를로는 곧바로 이 쾌속정을 수배했다.
자신 소유의 보트도 빠르긴 했지만, 레저 목적용이어서 먼 바다까지 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연료통이 거기에 미치지도 못한다.
더구나 이미 두 시간 전에 바다를 가로질러 가고 있는 지태의 뒤를 쫓으려면 그보다 좀 더 빠른 배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 쾌속정은 최고 속도 50노트까지 낼 수 있어서 서너 시간 후면 대충 따라잡을 것 같았다.
카를로는 가짜 지태에 속아 한바탕 소동을 피워댔던 보디가드들을 거세게 다그친 후 곧바로 지태의 흔적을 뒤쫓게 했었다.
육상의 모든 길의 차단은 정부군 대위에게 일임하고 보디가드들에겐 항구로 달려가게 한 거다.
당장 눈에 띄는 선원 몇 놈을 다그치자 해답은 금세 나왔다.
놈들이 벌써 두 시간 전에 물건을 싣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들은 곧장 해경의 협조를 얻어 지태가 탄 배의 GPS를 확인했고, 지금 현재 판투타란 섬을 지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출력을 최대로 높여라. 그 새끼 놓치는 날엔 몽땅 다 상어 밥으로 내던져 버릴 테니까 내 말 똑똑히 명심해!”
카를로의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쾌속선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물살을 갈랐다.
* * *
“헤이, 미스터!”
후안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선장이 큰소리로 지태를 불렀다.
지태와 후안이 다가가자 선장은 돌연 인상부터 써 댔다.
“왜 그러시오?”
후안이 대신 나서며 선장을 훑었다.
“이 배에 싣고 있는 게 대체 뭡니까?”
“말했잖소, 루왁커피라고! 왜, 무슨 문제라도?”
그러자 선장은 볼멘소리로 불만을 터뜨렸다.
“근데 왜 회항하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누가 말이오?”
“방금 해경으로부터 무전이 왔소. 이 배에 커피로 위장한 마약이 실려 있다는 제보가 있으니 당장 회항하라고 말이오.”
“별거 아니오. 괜한 핑계 대서 돈이나 뜯어내려는 수작일 겁니다. 그냥 달리시오.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당신이 무슨 책임을 진다는 말이오? 모든 책임은 선장인 나한테 있는데.”
선장이 선뜻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태가 나섰다.
“책임을 진다고 해봤자 결국 돈 몇 푼 쥐어주는 것 아니겠소. 그 돈을 내가 대신 물어드리지.”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럼 신경 쓰지 말고 무작정 내달려요. 목적지에 도착하는 대로 합의금 명목으로 2천 달러를 더 얹어줄 테니까!”
지태의 약속에 선장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해경 몫으로 5백 달러만 찔러 줘도 놈들은 입이 쫙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면 되는 것이니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돈으로 선장의 마음을 돌려놓은 지태는 후안과 함께 다시 뱃머리로 나왔다.
짐을 나르게 할 요량으로 배에 태운 세 명의 뱃사람이 고물 쪽에서 간식을 먹고 있다가 그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까는 선장이 있어 말을 못했는데, 해경이 무전을 날려 왔다면 놈의 추격은 이미 시작됐다고 봐야 합니다.”
후안은 얼굴 가득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쫓아온다고 해봤자 이미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잖습니까.”
지태가 괜한 걱정이라는 듯 가볍게 받아들이는 눈치이자 후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카를로가 바실란에 있을 거라고 했죠?”
“예.”
후안의 물음에 지태가 자신의 추측을 섞어 대답했다.
“그럼 일단 삼보앙가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짧게는 한 시간 가까이 거리가 단축됩니다. 게다가 이사벨라항구에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쾌속정이 두어 척 있습니다. 만일 그걸 타고 쫓아온다면 우린 금세 따라 잡히고 맙니다. 결코 안심할 수가 없어요!”
“빠르다면 어느 정도나……?”
“아마 50노트 이상은 될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 배는 최대로 출력을 높여도 30노트도 안 나옵니다. 선장은 30노트는 무난하다고 했지만, 그건 새것이었을 때나 가능한 소리고…….”
50노트면 시속 90km가 넘는 속도다.
물 위에서는 가히 제트기나 마찬가지.
이 옛 경비정보다 거의 두 배 가깝게 빠른 속력이었다.
그제야 지태는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인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