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물고 물리는 게임(1)
진주중에서 가장 값비싸고 최상으로 쳐주는 것들만 모아놓은 듯했다.
“아무리 감정가를 낮게 잡아도 이 정도 상품이면 최하 800만 달러 이상은 나올 거요.”
지태는 끄덕이면서 상자 안에서 흑진주 하나를 들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이빨로 살짝 긁어 보았다.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면 모조품이다.
한데 까칠까칠한 진주의 생생한 표면이 그대로 느껴진다.
지태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는 카를로를 진중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물건은 진품이 맞는 거 같군요.”
“이건 양식 진주가 아니야. 순수 자연산 진품이란 말이지.”
카를로는 자부심이 흐르는 미소를 날렸다.
“좋소. 거래하십시다.”
지태가 거래의 완성을 뜻하는 악수를 청했다.
카를로는 손을 내밀면서 활짝 웃었다.
“그럼 내일 물건을 이쪽으로 가져오시겠소?”
“으음!”
지태는 입술을 닫은 채 짧은 묵음을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
카를로의 인상이 금세 또 구겨졌다.
“왜, 또 갑자기 딴소리야?”
“딴소리가 아니라 내가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미처 생명보험을 못 들어놓고 왔거든. 보험도 없이 이국땅에서 개죽음 당할 순 없잖아.”
카를로가 대뜸 거칠게 나오니 지태 또한 드세게 나갔다.
“삼보앙가는 당신의 말마따나 방귀만 뀌어도 다 들릴 정도잖아. 굳이 이곳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데? 뭔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면 그냥 내 말대로 해.”
“허, 이거 배짱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세상물정 모르는 또라이라고 해야 하나?”
카를로가 가뜩이나 험악한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노려보았다.
“인상 풀지! 그딴 거에 쫄 거 같았음 애초부터 이곳엔 발을 들이지도 않았어.”
“허허, 이거야 원!”
코웃음 치며 깡 좋게 나오는 지태의 태도에 카를로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미스터 말대로 하지. 그럼 내일 오후 2시에 삼보앙가에서 현물 교환하는 걸로!”
그제야 지태는 만족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카를로는 자신이 소유한 보트를 지태에게 선뜻 내주었다.
그걸 타고 삼보앙가로 돌아가라고 했다.
15인승 레저용 토네이도 제트보트였는데, 스피드가 장난이 아니었다.
삼보앙가에 도착해 호텔로 돌아오자 지태를 기다리며 로비를 서성이고 있던 아길라와 라이안이 반갑게 맞았다.
“보스!”
짧게 부르는 그 속에는 많은 것들이 함축돼 있었다.
지태는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쳐 보였다.
“보다시피!”
* * *
긴장감을 내려놓자 급하게 피곤이 밀려왔다.
지태는 이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조현민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형님! 이제 막 삼보앙가로 넘어왔습니다.”
- 별일 없이?
“별일이 있었다면 지금 전화드릴 수나 있겠어요?”
하기는 그렇다.
우문현답이라는 듯 피식 웃은 조현민이 잠시 뒤로 빠진 사이 강성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내가 준 조끼는 입고 다니냐? 거기 입고 간 거야?
“그래, 인마! 불량품인지 아닌지 시험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도무지 그럴 기회도 안 주던데!”
- 새끼, 말이라도! 그거 입고 있어도 총 맞으면 졸라 아파, 이 새끼야!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강성원은 더욱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너 거기서 개기고 안 들어갈래? 광수대 잘리면 내 원망 하지 마. 너까지 먹여 살릴 능력이 아직은 안 되니까!”
- 지랄하네! 암튼 네놈이 무사한 것 알았으니까 이제 들어갈란다.
강성원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조현민이 다시 메꾼다.
- 그래서 어떡하기로 한 거냐?
“내일 교환하기로 했어요. 받아올 물건들은 내가 직접 확인했고.”
- 끝까지 긴장 늦추지 마.
“예, 형님.”
- 아, 참! 그 친구와는 만났어?
“아뇨. 그냥 서로 모르는 체 하고 있어요. 그게 마음이 편한 거 같아서. 근데 한 가지 물어볼게요.”
- 뭘?
“혹시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부터 몰래 꼬리를 붙인 거 아뇨, 형님?”
- 왜?
“형님이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신다!”
- 눈치챘어? 너 눈치 못 채게 조심하라 했더니……. 흐흐. 이거 참 민망하네.
조현민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지태는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며 끝내 자뻑을 날렸다.
“내 촉이 어디 그냥 촉입니까? 나 정도는 되니까 알아챈 거지.”
냉장고 문을 열고 캔맥주 하나를 꺼내 뚜껑을 땄다.
“암튼 내일 거래하고 다시 전화 드릴게.”
지태는 티테이블 위에 폰을 내려놓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청량감이 몸속 깊숙한 곳에서 느껴진다.
“내일, 내일 하루만 그냥 무사히 지나가라…….”
기도하듯 내뱉는 지태의 입에서 가벼운 트림과 함께 한숨 한 자락이 쏟아져 나왔다.
* * *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길라, 라이안과 더불어 점심식사를 마친 직후 지태는 전화를 받았다.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할 것 같다는 카를로의 전화였다.
“슬슬 준비해야겠는데…….”
지태가 혼잣말처럼 내뱉자 두 사람이 기계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잣말이지만, 그들이 알아들으라고 영어로 내뱉은 말이니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스, 우린 준비가 다 됐습니다.”
아길라가 자신의 허리춤을 톡톡 쳐보였다.
지태가 끄덕이면서 자신의 왼쪽 가슴 부위를 두드렸다.
그 자신도 권총을 차고 있다는 뜻이다.
“어제 보니까 밀착 경호하는 보디가드가 여섯이었소. 다들 조심하고!”
지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아길라가 먼저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보이는 건 여섯이지만, 이곳은 카를로의 활동 무대입니다. 즉, 그가 기침만 해도 수십, 아니 수백 명이 우르르 몰려올 거란 얘기지요.”
“만약 일이 잘못 되면 나도 목숨 내걸고 싸울 생각이야. 걱정 말아요.”
지태가 아길라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강한 어조로 말한 후 앞장서 레스토랑을 나섰다.
배에서 내린 화물을 미리 대기시켜 놓은 트럭에 다시 싣고 카를로는 지태가 일러준 장소로 곧장 달려왔다.
바실란에서 보았던 여섯 명의 보디가드가 역시나 그를 밀착 경호하고 있었다.
지태는 의약품이 보관돼 있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카를로가 따라 들어와 지태가 내민 물품 목록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박스의 봉인을 뜯어내고 목록과 내용물들을 꼼꼼히 비교하며 살폈다.
한동안 확인을 거듭한 카를로가 지태를 보며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
“맞는 거 같군.”
카를로는 곧 뒤돌아 자신의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화물차에 싣고 온 루왁커피를 창고로 옮기라는 눈빛 사인이었다.
“참, 그리고 이거!”
화물 기사와 일꾼 몇 명이 커피를 내리기 위해 부산을 떠는 사이 카를로가 보석 상자를 내밀었다.
지태가 상자를 열어 수량을 체크했다.
“미스터 한! 삼보앙가로 넘어오기 전에 골드웰 이준석 부장과 통화를 했어. 이제 우리와 거래는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더군.”
카를로는 진주의 숫자를 세는 지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태가 눈동자만 치켜 올리며 흘깃 바라보았다.
그럴 것이다.
골드웰처럼 규모가 제법 큰 중견기업에서 이처럼 몇 푼 되지도 않고 위험한 거래에 결코 목을 매지는 않을 테니까.
이번 거래는 이미 구매해 놓은 의약품의 처리가 힘들어 아무런 이문도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진행시킨 거였다.
지태에게 줄 수수료를 빼고 나면 골드웰 측에서 가져갈 돈은 한 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미스터 한이 앞으로 우리와 거래를 하면 어떻겠나?”
지태는 수량 확인 끝난 보석 상자를 닫았다.
그러고는 카를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L/C 개설도 못하는 당신네와 거래를 하자고? 나더러 영양가도 없는 이 개고생을 또 하란 말인가?”
“개고생을 감안해서 값을 더 쳐주면 되잖아. 아무리 봐도 미스터 한처럼 목숨 거는 친구들이 없어서 그래. 다들 간덩이가 콩알만 해 가지고서…….”
카를로가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몇 천만 불씩의 큰 거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쉬운 거래 형식을 띠는 것도 아닌 이런 난잡한 거래를 어느 미친놈이 하겠다고 달려들겠는가.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계 유수의 무역 회사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지태가 피식 웃었다.
“앞으로 현금으로 거래를 한다면 혹시 또 모르지. 이런 물물교환 말고!”
“이번 같은 경우는 특별 케이스야. 사정이 좀 있어서 그렇지 우리도 이전엔 주로 현금거래를 해 왔어, 이 친구야!”
“여하튼 돌아가면 한번 고려해 보지.”
지태는 간단하게 말을 끊었다.
어차피 일부러 다시 찾을 곳도 아니어서 인사치레로 한 마디 던져주었을 뿐이다.
눈치를 알아챈 카를로는 쓴맛을 다셨다.
“거래가 끝났으니까 난 이제 그만 가네. 행운을 빌어, 미스터!”
아직 일꾼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지만, 카를로가 굳이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무슨 행운을 빌겠다는 거야?’
지태는 카를로가 남긴 말의 여운을 되새기다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 * *
우려했던 불상사가 없다는 점에 지태는 한시름을 놓았다.
기분이 한껏 고무된 지태는 아길라와 라이안에게 꽤 비싼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반주로 와인을 한 잔씩 돌리기도 했다.
“두 사람, 수고 많았소. 어차피 무역을 하다 보면 필리핀에 넘어올 일이 자주 있을 거야. 그때도 지금처럼 잘 부탁합시다.”
“별말씀을! 오히려 후한 대접을 해준 점, 저희가 감사드립니다.”
아길라가 대표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지태는 내일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까닭에 두 사람을 일찍 방에 들어가 쉬게 했다.
어느새 저녁 8시였다.
지태는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 내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와 캔맥주를 들고 티테이블에 앉았다.
휴대폰을 들어 조현민의 번호를 누른 다음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 어, 한 대표야!
조현민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사히 다 끝냈어요.”
- 고생했다. 참, 아직 방심하지 말고 진주 잘 챙겨! 그거 혹시라도 도둑맞았다간 우리 둘 다 인생 조지는 줄만 알고!
“걱정 말아요, 형님. 잠자리에서도 없는 여친 끌어안듯 꼭 안고 잘 테니까. 근데 혼자 뭐 하고 계셨수?”
지태가 맥주를 들어 두어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 왜? 너 혼자 고생하는데 나만 땡땡이치는 게 배 아프냐?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시나? 형님 혼자 따분할까 걱정돼서 하는 소리 아니오?”
지태는 눈앞에 있지도 않은 조현민에게 괜히 눈을 흘겼다.
휴대폰 너머에서 조현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그냥 이쪽저쪽 전화 돌리고 있다. 혹시라도 하나 얻어 건질 게 없나 해서.
“어디, 동남아 쪽 바이어들 말입니까?”
- 내 거래처들이 다 그쪽이었으니까! 근데 다 자잘해서 말이지.
“티끌 모아 태산 아닙니까. 아직 구멍가겐데 티끌이라도 황송하다고 해야지요, 형님.”
- 그러게 말이다. 벌써부터 배부른 소리 하고 자빠졌다, 내가!
“참, 형님!”
- 어!
“마닐라에서 한국 들어가는 배편 알아보라는 거 어떻게 됐어요?”
- 그쪽에 있는 선사하고 이야기 다 됐으니까 일단 가지고 마닐라로 올라와.
“예, 그래요. 내일 다시 통화하죠.”
지태는 전화를 끊었다.
넓은 통유리 너머로 항구의 불빛이 보였다.
총격전 같은 살벌한 풍경이 벌어진다면 어쩌나 짐짓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이곳은 아직까지는 평온했다.
여느 동남아 휴양 도시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어둠 저 너머 어디선가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무서운 음모의 싹이 꼬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긴장했더니 몸이 피곤하다.
지태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죽음보다 더 깊은 밤이 지나고 있었다.
객실 통유리창 너머에 짙은 어둠이 벗겨지면서 그 자리를 약간 푸르스름한 빛깔들이 차츰 먹어 들어오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는 중인 시각.
바로 그때였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적막을 흔드는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깊이 잠든 지태의 방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