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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2화 (22/272)

022화. 첫 오더부터 목숨을 건다(5)

아길라가 소개해 준 동료의 이름은 레이였는데, 그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개인 소유의 창고를 빌릴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이틀을 사용하겠다고 했는데, 하루에 500달러씩 도합 1,000달러를 불렀다.

너무 비싼 게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자 레이가 씩 웃었다.

“치안이 불안한 이곳에서 여기보다 안전한 곳은 또 없을 거요. 왜냐, 이 창고의 소유주가 바로 이곳 삼보앙가의 경찰서장이기 때문이지.”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물품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그쯤은 충분히 감수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지태는 아길라와 라이안을 데리고 11층짜리 호텔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일단 방 두 개를 체크인 한 다음 그중 한 곳에 두 사람을 머물게 하고 지태 혼자 로비로 나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카를로에게 전화를 넣었다.

“후우!”

통화가 연결되는 걸 기다리는 동안 지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신음이 5초쯤 달려간 뒤였다.

이윽고 카를로가 전화를 받았다.

지태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좀 더 당당하게 말문을 열었다.

“한지태요!”

- 어떻게, 내가 지금 바로 배를 보내 드릴까?

“내가 알아서 그곳으로 갈 거요. 바실란으로 출발하는 배 시간을 알아본 후 출발하기 직전 다시 전화를 드리지.”

아주 짧게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카를로 쪽에서 되받아치기 전에 지태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객실 쪽으로 올라온 지태는 아길라와 라이안의 방을 노크했다.

“바실란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그쪽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말입니까?”

아길라가 우려를 잔뜩 새긴 눈빛으로 말했다.

“시간이 없을뿐더러 바이어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도 직접 가서 내 눈으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너무 위험합니다.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보스!”

라이안이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두 사람은 여기 남아 있어요.”

“예?”

둘은 동시에 깜짝 놀라며 두 눈을 치켜떴다.

위험으로부터 지태를 지키기 위해 고용된 자신들이다.

그런데 따라오지 말라는 것은?

“보스! 그럼 우린 자동으로 해고가 되는 겁니까?”

아길라가 정색하며 묻자 지태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바실란엔 나 혼자 다녀오겠다는 거요. 두 사람은 여기에서 쉬고 있으라는 뜻이고.”

“그건 안 됩니다.”

“괜찮아요, 아길라! 물건은 놔두고 몸만 갈 거니까 날 어쩌지는 못할 거야. 그냥 편하게 쉬고 있어요. 오늘 내로 다시 올 거니까.”

지태는 두 사람을 방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을 나선 지태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트라이시클에 올랐다.

트라이시클은 필리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운송수단으로 오토바이를 변형해 만든 것이다.

항구에 도착한 지태는 운이 좋았다.

마침 30분 뒤에 바실란으로 출발하는 페리가 있었다.

바실란 해협을 가로질러 가는 페리 안에서 지태는 다시금 카를로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금 페리에 올랐소. 곧 도착할 거요.”

- ?

카를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차린 것 같았다.

한국에서 넘어온 물품들을 배에 싣고 넘어오는 시간치고는 너무도 빠른 거다.

지태가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재차 부르자 그제야 카를로가 대답을 해왔다.

- 그럼 이사벨라 항구에서 보십시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소.

지태는 전화를 끊고 푸르게 펼쳐진 바다에 시선을 떨궜다.

적도의 무풍지대를 지나는 곳이어서 물결은 호수처럼 잔잔했고, 배는 거침없이 파도를 가르고 있었다.

긴 뱃고동과 함께 페리는 이사벨라 항구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배에서 내려 항구 밖으로 나오자 돼지털 같은 콧수염을 기른 사내 하나가 알은체를 해온다.

하기는 페리에서 내려 밖으로 나온 사람 중에 필리피노와 확연하게 비교되는 사람은 지태가 유일하니 금세 알아본 것 같았다.

“미스터 한?”

지태는 사내의 눈을 들여다보며 끄덕였다.

“미스터 카를로?”

“예, 반갑소.”

카를로가 악수를 청해왔다.

지태가 즉각 악수에 응하자 손을 흔들어 대면서도 두 눈은 지태의 등 뒤쪽에 꽂혀 있었다.

“그런데 물건은?”

아무리 살펴봐도 지태 혼자인 거다.

뒤 따르는 사람도 없고 물건도 보이지 않으니 점차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일단 나 혼자 왔소. 나도 이곳에서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으니 먼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이래야 피차 공평하지 않느냐는 눈빛을 카를로에게 쏘았다.

카를로가 혀를 차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부하들인지 보디가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상 험한 여섯 명의 사내들이 허리에 찬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지태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댔다.

노골적으로 보내오는 협박이었다.

까닥하면 이 자리에서 쏘아 죽이겠다는 듯 살기를 띠었다.

“지금 장난해, 미스터!”

카를로가 이를 으르렁거리며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지태가 조소를 섞은 미소를 흘렸다.

“그러는 당신은? 이게 상도의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나?”

“웃어?”

“웃지 않으면?”

“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왔지? 그런데도 웃음이 나와? 조용히 머리에 구멍 내서 상어 밥으로 내던져 줄까?”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근데 나를 죽여서 얻어낼 건 있겠나. 정부군하고의 전투에서 총상 입은 병사들 많지? 지금 내가 가져온 약품들이 몹시 급할 텐데, 괜찮겠어? 당신 말고 윗선에서 가만히 있겠느냐고 묻는 거야, 지금!”

눈썹 하나 흩트리지 않고 당당하게 외치는 지태의 모습에 카를로는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한동안 눈싸움을 하듯 노려보더니 어느 순간 허공에 대고 껄껄 웃어댔다.

“미스터는 남자야, 남자. 진짜 남자! 아주 맘에 들었어.”

돌연 카를로는 지태의 어깨를 양손으로 가볍게 움켜쥐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웃음을 토해 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그냥 농담 한번 해본 거야. 자, 이제 그만 기분 풀고 비즈니스를 해야지. 안 그렇소?”

“어설프게 장난질만 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지태가 끄덕였다.

카를로는 한쪽에 주차된 SUV를 가리켰다.

스펠링이 R로 시작되는 최고급 외제 차였다.

* * *

“혼자 있기엔 너무 썰렁한 거 아뇨? 형수님 불러다 함께 노시지.”

한스무역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강성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한 손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 든 내용물의 모양이 투영된 것을 토대로 추측컨대 분식점의 일회용 그릇처럼 보인다.

데스크톱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던 조현민이 고개를 들며 씩 웃었다.

“그러잖아도 시어미 노릇할 며느리가 없어서 심심했는데, 지태 대신으로 니가 왔냐?”

“난 며느리 같은 거 취미 없수. 미운 시누이 캐릭터라면 몰라도…….”

강성원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앞자리를 가리켰다.

“위문공연 왔으니 앉아요, 형님. 내가 오늘 분식점의 매대에 있는 걸 몽땅 다 쓸어 왔수.”

그는 봉지를 열어 그 안에 든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 놨다.

떡볶이, 김밥, 순대, 튀김 등이 일회용 그릇에 담겨 아직 식지 않은 온기를 피워 올렸다.

“와이프가 오늘 저녁 메뉴는 동태탕이라고 했는데, 우리 부부 금슬 조지려고 이리 많이도 싸 왔냐?”

조현민이 씩 웃으며 강성원의 앞자리에 앉았다.

“형님은 모태솔로 속 긁는 소리 좀 제발 날리지 마쇼. 그냥 확 다시 싸갈까 보다!”

강성원이 펼쳐 놓은 것들을 주섬주섬 챙길 태세를 보이자 조현민이 그의 손목을 탁 후렸다.

“치워, 인마! 그러잖아도 출출하던 참이었어. 어떤 놈 걱정하느라 신경을 썼더니 아무리 먹어도 배가 금세 꺼진다.”

지태를 말하는 거다.

그 말뜻을 알기에 강성원은 풀썩 웃었다.

“별일 없답니까, 형님?”

강성원이 묻자 조현민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뭘 봐요? 형님하고는 몰라도 나한텐 문자 한 번 없었수. 암튼 그 새끼, 의리라곤 조또 없어!”

악의 없이 내뱉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지태를 걱정하는 마음이 자신보다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다.

조현민이 왼쪽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제 잠깐 통화한 것 말곤 오늘은 그놈 숨소리도 못 들었다. 지금쯤 삼보앙가에 도착했을 텐데…….”

말을 내뱉다보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다시 이는 듯했다.

강성원이 마침 잘됐다는 듯 조현민을 바라보았다.

“뭘 우거지상 하고 계셔요. 이쪽에서 먼저 전화를 해보면 되는 것을.”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조현민을 부추겨 지태의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겠다는 꼼수였다.

조현민이 털털하게 웃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 *

지태는 잠깐 카를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이사벨라 항구에서 차로 약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카를로 소유의 개인 창고였다.

번잡한 시내에서 떨어져 있고 창고부지가 작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누구 한 사람 죽어 나가도 모를 만큼 음습해 보이는 곳이다.

“형님, 죄송! 내가 전화하는 걸 깜빡했습니다. 좀 복잡하게 얽힌 일들이 있어서…….”

조현민의 잔소리가 터져 나올까봐 지태가 미리 멋쩍은 웃음을 날리며 선수를 쳤다.

- 너 암튼 한국으로 돌아오기만 해 봐. 너 거기서 애써 살려 나온 목숨, 나한테 바쳐야 할 거다.

“한번만 봐줘요, 형님. 돌아갈 때 좋은 술로 한 병 사 갈게.”

- 술은 니미! 야, 그나저나 지금 어딘데?

“여기 바실란이에요. 카를로 만나러 지금 막 넘어왔어요.”

- 뭐, 뭣? 바실란? 야! 너 미쳤어?

조현민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버럭 외쳤다.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내 나름대로 잘 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태가 괜찮다는 듯 너털웃음을 날릴 때였다.

폰 너머에서 대뜸 욕설부터 내뱉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 야, 이 새끼야! 정신 차려, 인마. 아이고, 이 새끼를 정말!

반가운 목소리다.

“네 구수한 욕을 들으니까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이 팍 든다. 벌써 이 형아가 보고 싶어서 떼쓰는 거냐?”

- 시끄럽고! 암튼 너 이 새끼, 거기서 혹시라도 잘못돼서 죽게 되면 나한테 두 번 뒈질 줄 알아!

“알았다. 길게 통화 못해. 나 바로 들어가 봐야 돼.”

그러자 조현민이 바로 배턴을 넘겨받았다.

- 카를로하고 협상 끝나는 대로 바로 전화 줘!

“예, 형님!”

지태는 전화를 끊고 뒤통수가 가려운 느낌에 뒤돌아보았다.

카를로의 부하 중 하나가 감시하듯 나와서 지태를 지켜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금세 딴청을 피웠다.

지태가 창고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카를로가 방금 포트에서 내린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창고 안에 가득 쌓인 루왁커피로 뽑은 커피.

“이건 사육장에서 사향고양이한테 억지로 먹여서 얻은 게 아니라 순수 자연산이오. 아주 귀하고도 귀한 물건이지.”

지태는 카를로의 자랑을 귓등으로 흘리며 커피를 음미했다.

과연 그 맛은 훌륭했다.

깊고 그윽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부드러우면서도 독특한 맛은 혀끝을 살살 녹이고 있었다.

국내 전문점에서 한 잔 가격이 무려 3~5만 원 선이니 가히 커피의 귀족이라 할 수 있다.

지태는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카를로가 만족한 듯 씨익 웃었다.

“한 박스에 100kg씩, 미스터 한이 가져갈 수량이 총 다섯 박스요.”

박스 당 20만 달러씩 친다고 해 봤자 도합 1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골드웰에서 넘겨준 의약품의 총액이 800만 달러였으니 현물로 맞교환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나머진?”

지태가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면서 물었다.

진주를 말하는 거다.

“그걸 손에 들고 다닐 수야 없잖아. 사무실 금고에 따로 보관돼 있으니 바로 가봅시다.”

카를로는 지태가 커피를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안내했다.

차에 오른 그들은 카를로의 사무실이 있는 시내로 곧장 달려갔다.

사무실 앞에 이르자 보디가드들을 밖에 세워두고 지태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를로는 들어서자마자 한쪽에 세워둔 견고한 금고를 열어 그 안에 있던 보석 상자를 꺼내 소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자, 미스터 한! 확인해 보시오.”

카를로가 소파에 지태를 앉게 한 다음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 안은 반으로 칸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쪽엔 매혹적인 색채의 흑진주가, 다른 한쪽엔 핑크빛이 살짝 감도는 백색 진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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