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첫 오더부터 목숨을 건다(2)
정각 8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지연 없이 3시간 30분을 날아 필리핀 마닐라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자 미리 연락을 받은 현지 바이어가 영어로 ‘Han’이라고 대충 휘갈겨 쓴 종이팻말을 들고 지태를 맞았다.
지태가 다가서며 가벼운 눈인사를 던지자 사내가 히죽 웃었다.
“미스터 한?”
“한지탭니다.”
“반갑습니다. 골드웰 현지 대리인을 맡고 있는 파울로라고 합니다.”
파울로라는 사내는 사람 좋은 얼굴로 다시금 히죽 웃었지만, 지태는 그에게서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화물은?”
“어제 통관 절차를 다 마치고 반출해서 항구 쪽에 있는 잘 아는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여기에서 얼마 안 멀어요.”
“그럼 우선 거기부터 가십시다.”
“지금 말입니까? 식사 먼저 하면서 한숨 좀 돌리시지?”
파울로는 한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태가 표정을 읽듯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내가 싫다고 한다면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내 말대로 합시다. 물품이 제대로 도착했는지 확인을 해야 나도 본사에 보고를 할 테니.”
“그래요, 그럽시다. 오케이!”
파울로는 앞장서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공항 1터미널 앞으로 나오자 그의 똘마니인지 부하 직원인지 모를 한 사내가 밴을 대기시키고 있었다.
제법 우람한 덩치를 가진 걸 보면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 같았다.
파울로의 말대로 창고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약 20분 정도를 차로 달려 항구에 인접한 어느 창고 앞에 멈췄다.
임대를 전문으로 하는 창고 같지는 않았다.
전체 크기는 약 100여 평정도 돼 보였는데 파울로가 잘 아는 지인의 개인 소유 창고인 듯했다.
“어차피 곧바로 삼보앙가로 이동할 건데 굳이 비싼 돈을 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태가 좀 미심쩍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파울로가 잽싸게 내뱉은 변명이었다.
골드웰 측에서는 창고 보관료까지 파울로에게 계산해 주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인의 창고를 이용해 그 수수료를 빼먹든 말든 자신이 그것까지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한국에서 넘어온 물건만 고스란히 보관돼 있으면 된다.
지태는 단단하게 봉인된 의약품 상자를 꼼꼼하게 살폈다.
뜯거나 훼손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확인을 마친 지태가 창고에서 나오자 파울로가 다시 문을 잠그며 묻는다.
“삼보앙가엔 언제쯤 이동할 생각입니까? 거긴 요즘 정국이 시끄러워서 부정기로 비행기를 띄우는 형편이라 정확한 운행 상황도 알아봐야 하고 해서…….”
“내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 그러니 이삼 일 후에나 출발합시다.”
“아, 이삼 일 후…….”
파울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자신의 밴을 가리켰다.
지태가 뒷좌석에 올라타자 그는 보조석 쪽으로 올랐다.
“이제 식사를 해야죠? 먼 데서 오신 손님인데 주인 입장에서 내가 통 크게 한턱 쏘겠소.”
아침도 굶었고, 기내식으로 나온 도시락은 별로 입맛에 안 맞아 손도 안 댔던 터라 배가 고프긴 했다.
지태가 군말 없이 끄덕이자 파울로는 똘마니에게 식당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단골로 자주 다니던 곳인 듯 똘마니는 금방 알아듣고 이내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아갔다.
파울로가 데려간 곳은 아도보(Adobo) 전문 식당이었다.
잘 절인 돼지고기나 닭을 베이스로 하는 요리인데, 우리나라 찜 요리와 비슷한 형식을 띠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입맛에도 잘 맞아 지태는 요리가 만족스러웠다.
후식으로 나온 필리핀 전통 차, 바나바티를 한 모금 입에 물었을 때 파울로가 문득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다.
지태가 왜 그러느냐는 듯 멀건이 바라보자 파울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창고에 있는 의약품들이 누구에게 전달되는지는 알고 있죠?”
뜬금없이 그건 왜 묻나 싶다.
지태가 그의 의중을 몰라 말없이 바라보자 파울로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뭐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녜요. 따지고 보면 나도 공범 아닙니까.”
“뭐가 궁금한 겁니까? 내가 왜 목숨 걸고 이번 일을 맡았는지가 궁금한 거요?”
파울로는 대답 대신 픽 하고 웃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내거는 이유야 뻔하지 않겠소. 바로 돈 때문이지.”
지극히 당연하고도 원초적인 답변이라 파울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어차피 삼보앙가에 물건이 도착할 때까지는 나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으니까.”
지태가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파울로가 그리 말을 해 주니까 고맙소. 그래서 개인적으로 뭔가 하나 부탁할까 하는데.”
“뭐든!”
파울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삼보앙가에 갔다가 마닐라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와 함께할 두어 사람을 구했으면 합니다만.”
“보디가드?”
“물론 이것도 함께!”
지태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권총 모양을 만들어 파울로를 겨누는 시늉을 했다.
“쏠 줄은 아시고?”
“내가 이래봬도 대한민국 특수부대 출신이오. 어지간한 건 다 만질 줄 알지.”
“오호!”
파울로는 적잖이 놀랐다는 듯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불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러잖아도 현지안내 겸 경호를 해줄 사람을 권할 생각이었소. 아무래도 미스터 한은 이곳 현지 사정에 어둡잖습니까. 더구나 삼보앙가 같은 지역은 이곳 사람들도 웬만해선 가기를 꺼려하는 지역이라서…….”
“어중이떠중이 말고 기왕이면 괜찮은 친구들로 부탁합시다.”
“그건 아무 걱정 마시오.”
파울로는 믿어달라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 * *
지태를 호텔까지 태워다 주고 파울로는 곧 돌아갔다.
출국하기 일주일 전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 놓은 마닐라 공항 인근의 호텔이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올라온 지태는 스마트폰부터 꺼내들었다.
조현민에게 잘 도착했다는 안부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몇 번의 발신음 뒤로 이내 조현민이 전화를 받았다.
- 어, 한 대표야! 잘 도착했어?
“예, 형님! 정시 도착해서 물건 확인하고 식사한 다음 이제 막 호텔로 들어오는 길입니다.”
- 또다시 잔소리하는 거 같지만, 진짜로 몸조심해야 한다.
“햐, 정말 시어미 한 분 모신 거 같네. 눼에, 눼!”
- 그나저나 그 친구와는 아직 연락 전이지?
돌연 정색하며 묻는 조현민이었다.
“여긴 별로 위험한 게 없으니까 삼보앙가로 넘어가기 전에 연락하려고요. 마닐라에서 한 이틀 있으면서 현지 소식도 좀 들을 겸……. 근데 그 친구는 믿을 만합니까?”
- 내가 5년 넘게 동남아를 담당하면서 만난 바이어 중에 최고로 믿음이 갔던 친구야. 그 친구가 자신 있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니까 절대 실망시키진 않을 거다.
조현민이 그렇다고 한다면 믿어야 한다.
지태는 자신의 기우를 털어내듯 머쓱하게 웃었다.
“일단 수고하시고요, 삼보앙가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 그래, 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예, 예! 몸조심.”
지태는 이제 그만 잔소리를 하라는 듯 앞질러 선수를 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가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삼보앙가에 있는 바이어와 연락을 취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조현민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던 거다.
지태는 골드웰에서 넘겨준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예, 카를로요!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폰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한국에서 온 한지태라고 합니다. 골드웰의 대리인!”
- 아, 미스터 한! 반갑소. 마닐라에 도착했습니까?
“도착해서 지금 호텔입니다.”
- 그럼 삼보앙가엔 언제쯤 오실 거요?
“조금 볼일이 있어서 이틀 뒤에나 넘어갈 겁니다.”
- 여기 사정이 좀 급하긴 한데……. 암튼 알겠소. 넘어오기 전에 다시 한번 연락 주는 것 잊지 마시고!
카를로라는 사내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새끼! 예의라곤…….’
지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오늘은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남은 시간은 맘껏 여유를 부려도 되었다.
샤워부터 하고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어둑해지면 근처나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다.
그러고는 적당한 술집을 찾아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현지 소식을 귀동냥으로 얻어듣기에는 술집만한 곳도 없으니까.
지태는 앉아있던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 * *
날이 어둑해질 무렵 호텔 밖으로 나온 지태는 노트북이 든 가방 하나를 어깨에 맨 채 거리를 걸었다.
선우에서 근무하던 시절 중동 쪽 출장은 몇 번 다녀왔지만, 동남아 지역에의 여행은 처음이었다.
놀러온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사업을 하다 보면 그 나라의 문화라든가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들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으로 일부러 대로변을 피해 조금은 후미진 곳으로 돌아다녔는데, 날이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왠지 모를 암습한 분위기만 띨 뿐이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떼처럼 자신을 힐끔거리는 모습에 지태는 자꾸만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치안이 불안한 나라이니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지태는 다시 큰길가로 나왔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누군가 돌연 지태의 팔짱을 자연스럽게 끼며 붙들었다.
코를 찌르는 싸구려향수와 함께 화장을 진하게 한 여성이었다.
혼혈처럼 보였는데 그 미모가 그럭저럭 봐줄 만은 했다.
그녀는 지태를 향해 아이스크림을 핥는 것 같은 시늉을 해보였는데, 그 보디랭귀지는 만국 공통어로 통하는 거다.
“노우!”
지태는 팔을 거칠게 빼내면서 짧게 내뱉었다.
그러자 젊은 여성은 갑자기 표독스럽게 변하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쭉 뽑아 들어보였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리며 쓴웃음을 내뱉는 순간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파울로였다.
- 미스터 한, 어디십니까?
“산책 중입니다. 생각할 것도 있고 해서…….”
- 아, 그래요? 지금 좀 만났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특별한 스케줄은 없는데… 무슨 일로?”
- 부탁하신 보디가드들을 소개시켜 줄까 하고요.
지태가 픽 웃었다.
‘이 자식 보기보다는 성질 급하네.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놈 아냐?’
지태는 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지금 호텔로 들어오시겠소?”
- 그보다는 밖에서 보십시다. 미스터 한이 묵는 호텔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곳에 ‘카라반’이라는 바(Bar)가 있습니다. 맥글라스 햄버거 매장 지하에! 거기에서 한 시간 후에 보는 걸로.
지태는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 구글 지도를 이용해 맥글라스 햄버거 매장을 검색했다.
현재 지태가 서있는 위치에서 약 2백 미터 거리에 있었다.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10분 만에 카라반 앞에 다다른 지태는 주저 않고 지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카라반은 바(Bar)라기보다는 가라오케에 가까운 것 같았다.
가게 정면으로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작은 무대가 설치돼 있었는데, 짧은 끈 소매 원피스를 입은 현지 필리피노 여성 하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태는 테이블을 지나쳐 바의 스탠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맥주 한 병을 시켜 놓고 건성으로 주위를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초저녁임에도 홀 안은 벌써 수많은 남녀 손님들로 꽉 찬 느낌이었다.
대부분 현지인들로 보였지만, 개중엔 서양인들도 몇몇 눈에 들어왔다.
지태가 아무런 감흥 없이 고개를 돌려 맥주병을 입에 넣고 한 모금 들이킬 때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살짝 찔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