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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8화 (18/272)

018화. 첫 오더부터 목숨을 건다(1)

“하나뿐인 목숨을 걸겠다는 심정으로! 그 결심 하나는 남달리 거창하시구먼.”

“어떤 오더든 맡겨만 주시면 지옥 불에라도 뛰어들겠다는 각오입니다. 저흴 한번만 믿고 맡겨 주십시오. 결코 실망하시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지태는 부탁한다는 듯 앉은 채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안상호의 입술에서 이윽고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 대표의 결의만 놓고 본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믿고 맡겨도 될 거 같구먼, 그래.”

“결코 제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이사님께 꼭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지태가 안상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제 결의를 새겨 넣었다.

“그래요, 그래. 한 대표의 패기와 결의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줄 오더가 어떤 것인지는 우선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 예.”

지태는 안상호의 미소에서 언뜻 풍겨 나오는 뉘앙스로 보아 8부 능선은 넘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짐짓 설레는 눈빛으로 안상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안상호는 여기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는 듯 옆을 돌아보았다.

동행한 부하 직원에게 브리핑을 맡기는 뜻.

“반갑습니다, 두 분. 저는 골드웰 관리팀 이준석 부장입니다.”

이준석이 앉은 채 목례를 해오자 지태와 조현민이 목례로써 받았다.

“우리 골드웰에서 의뢰하려고 하는 오더를 설명해 드리기에 앞서 우선 수수료부터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선수금으로 귀측에 20만 달러를 드릴 겁니다. 그리고 성공 후 보수로 30만 달러, 도합 50만 달러입니다. 우리 측 제안이 마음에 드십니까?”

50만 달러라면 환화로 5억 7천여만 원이나 되는 돈이다.

만족하다마다.

문제는 보수가 높은 만큼 지금 내려주려는 의뢰의 무게감이다.

뭔가 해결하기 어려운 오더이거나 위험성이 큰 의뢰일 게 분명했다.

물론 더 들어 봐야 알겠지만, 성공 수수료로는 아주 대만족이어서 지태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이만한 수수료를 보장하는 걸 보면 의뢰하고자 하는 일이 결코 손쉬운 건 아니겠군요?”

지태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묻자 이준석 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한 걸 새삼스럽게 묻고 있냐는 눈빛.

하기야 손쉬운 일 같았으면 벌써 회사 자체 내에서 처리하고도 남았을 거다.

골드웰은 난다 긴다 하는 상사맨들만 거의 오백 명에 육박하는 중견기업이었다.

“한 대표가 맡아서 해줄 일은 물건배달입니다. 해당국은 필리핀이고 배달물건은 의약품이 될 겁니다. 참고로 이번 오더는 현금 거래가 아닌 현물 교환 방식입니다.”

“현물이라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커피입니다, 루왁커피. 그리고 진주!”

루왁커피는 사향고양이가 먹고 배설한 커피를 말한다.

향이 그윽하고 깊은 맛이 있어서 고급 커피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루왁커피가 아무리 고급에 비싼 물건이라고는 하나 그 물량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 보전 부분은 진주로 받아낼 생각인 듯했다.

문제는 물건을 배달해야 하는 나라가 필리핀이라는 점이다.

지태는 머릿속을 언뜻 스치는 게 있어서 이준석 부장과 눈을 맞췄다.

“혹시 물건을 배달해야 하는 지역이 반군의 출몰지역입니까?”

그러자 이준석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뜻 보기에 냉소 같았다.

“그래서 우리 골드웰이 선뜻 배달을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겠죠?”

역시 냉소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너희 한스무역한테 맡기려는 게 아니냐.’하는 표정만 봐도 이젠 알 수 있다.

지태는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이번 오더는 금세 무역업계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한스무역은 어쩌면 간판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하하핫!”

지태가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나 까다로운 오더군요. 내심 그럴 거라 짐작은 했습니다. 예, 저희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정확히 배달해주고 그쪽에서 지급해주는 현물을 고스란히 받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큰소리를 치는 지태를 보며 이준석 부장은 조금은 놀란 눈빛으로 안상호 이사를 돌아보았다.

안상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나머지 디테일한 브리핑은 이준석 부장에게 천천히 들으시고, 오늘 계약까지 마무리하는 걸로 하십시다.”

말을 마친 안상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태와 조현민이 잽싸게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상호 이사가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두 사람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이준석 부장이 곧 뒤따라 나갔다.

그러자 지태가 웃음기를 띤 얼굴로 조현민을 돌아보았다.

조현민은 지금 이게 웃음이 나올 상황이냐는 듯 혀를 끌끌 찼다.

* * *

그 이후 좀 더 디테일한 브리핑을 듣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마친 다음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조현민은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요?”

“왜애요? 인마, 지금 그걸 몰라서 묻냐?”

“어차피 각오한 일 아닙니까. 그런 위험부담이 있으니까 오더가 주어지는 겁니다. 안 그러면 미쳤다고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오더를 줍니까.”

“알아! 나도 아는데 거기가 어디냐? 전쟁터나 마찬가지야, 거긴! 페인트 총알 쏘아대는 서바이벌 놀이터가 아니라고, 이 친구야!”

이준석 부장은 물건을 전달해야 하는 곳이 필리핀 삼보앙가라고 했다.

그곳은 현재 이슬람 반군에다가 인근 동남아 국가에서 몰려온 IS 추종 세력들이 합세하여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형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을 때부터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아요. 난 이미 목숨을 걸었다고.”

“그거야 알지. 아는데 빤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간다는 게 말이 되냐? 니가 무슨 구르카 용병이라도 돼?”

“우리 한스무역이 자립할 기반을 닦을 때까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일단 여유 자금이 만들어지면 정식으로 해외 영업에 나서자구요, 형님. 그리고 용병이라고 해도 이건 고급 용병이잖습니까. 단 한 번 목숨 거는 값으로 거의 6억 가까운 돈이 들어오는 건데.”

지태가 재차 자신의 포부를 밝히며 조현민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의 우려 섞인 잔소리는 회사에 복귀해서까지 계속 되었다.

“이 거래 자체가 위험하다는 거야, 내 말은! 자칫 잘못하면 필리핀 정부로부터 반군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돼. 툭 하면 총살시켜 버리는 그 골 때리는 대통령을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 친구야!”

“내가 북한을 상대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반역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반군한테 전달해줄 물건을 떠맡았다고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의 의약품이에요. 총기 같은 무기를 팔아먹는 것도 아니고…….”

“이거야, 원! 도대체가 귓구멍을 아예 꽉 막아 놓은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려니 내 입만 아프고 속만 터지네.”

조현민은 책상 위에 놓인 머그컵을 들고 휑하니 정수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연거푸 두 잔을 가득 따라 마셨다.

그사이 지태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현민에게는 괜찮다, 자신 있다고 설득했지만 그 자신이라고 어찌 두렵고 불안하지 않겠는가.

골드웰 측에서 거의 6억에 가까운 금액을 제시하면서 오더를 준 것은 다분히 현지의 내정불안 탓만은 아니었다.

조현민의 말마따나 이번 거래는 반군 측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혹시라도 잘못될 경우 그 책임을 온전히 한스무역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필리핀 당국에 적발이 돼 궁지에 몰리는 것은 물론 무서운 처벌이 뒤따르더라도 골드웰 측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발을 빼려는 수작.

물론 아까 계약서를 작성할 때 골드웰은 그 조항을 분명히 밝혔고, 지태는 서슴없이 사인을 했었다.

“야, 한 대표! 지금이라도…….”

“형님! 지금쯤이면 선수금이 입금됐을 겁니다. 골드웰 측에선 아마 호구를 물었다고 얼싸 좋다! 발 빠르게 입금을 했을 거라고요.”

그러자 조현민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선수금이 입금됐다면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만일 계약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하거나 불이행했을 경우 상대에게 위약금으로 다섯 배를 물어야 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한 까닭이다.

“젊은 나이에 장가도 못 가보고 기어이 죽으러가겠다면 이제 더는 안 말려. 대신 나를 원망하진 마. 난 퇴직금 챙겨서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까.”

“예에. 우리 형님 퇴직금 주는 게 아깝고 배가 아파서라도 기어이 살아올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건 그렇고, 형님!”

“왜?”

조현민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결정이 났으니까 기분 좀 푸시라니깐!”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근데 왜 불렀어?”

“형님은 선우에서 동남아 쪽을 주로 담당하셨잖아요.”

그쯤만 운을 띄워도 벌써 알아들은 조현민이다.

“걱정 마! 거래하던 필리핀 쪽 바이어들 연락처를 아직 갖고 있으니까. 그 친구들이든, 그쪽 인맥들이든 총동원해줄 테니까.”

이렇게 말할 정도면 그도 이미 결심이 굳어졌다는 이야기다.

그의 말마따나 모든 인맥을 동원해 자신이 현지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실히 어드바이스해줄 것이다.

그제야 지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필리핀의 현지 상황을 체크하는 등의 기초조사에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지태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법인 명의로 리스 차량 두 대를 구입했다.

대형승용차 한 대는 나중에 혹시 모를 접대를 위해 업무용으로, 중형승용차 한 대는 조현민의 출퇴근용으로 쓰게 할 참이다.

* * *

의약품 컨테이너는 골드웰 측에서 화물기를 이용해 지태보다 하루 먼저 필리핀으로 보냈다.

통관절차는 거래하던 필리핀 내 바이어가 전부 다 알아서 진행할 것이므로 지태는 나중에 보세창고에서 화물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반군 측과 직접 거래를 할 수 없는 관계로 그쪽의 소규모 오퍼상을 대행으로 내세운 거였다.

출국을 하루 앞둔 지태는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와 쉬고 있었다.

회사 창업 후 첫 해외 출장이라고 어머니는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지태가 말렸다.

모처럼 외식이나 하자면서 집 근처에 있는 소고기전문점을 찾았다.

“출장 간다는 나라는 어디냐?”

고기 한 점을 집어 지태의 앞접시에 올려주면서 어머니가 물었다.

필리핀에 간다고 하면 지레 걱정부터 앞세울 것 같아 나라 이름은 아직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 담당 지역이 중동이었잖아. 제일 자신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이번에 가는 곳은 요르단이에요, 엄마.”

“아, 요르단.”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두어 번 출장을 다녀온 곳이어서 그녀는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내일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아들이 피곤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지태는 발을 쭉 펴고 쉴 수가 없었다.

강성원으로부터 바로 튀어 나오라는 전화가 걸려온 탓이었다.

“얀마, 이틀 전에 봤으면 됐지, 뭐 하러 또 불러내?”

“너 뒈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이 자식은 말을 해도 꼭!”

지태는 눈을 흘겼지만, 감정을 실은 것은 아니다.

“그니까 몸조심하라고, 인마!”

그러면서 강성원은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뭐냐?”

“혹시 모르니까 갖고 가. 현지에선 꼭 입고 다니고!”

자꾸만 모를 소리를 한다.

지태가 쇼핑백 안을 흘깃 살펴본 뒤에 털털하게 웃었다.

안에 든 것은 방탄복이었다.

“웬 거야?”

“광수대에서 훔쳐온 건 아니니까 걱정 마라. 쇼핑몰에서 특별히 하나 주문했어.”

“암튼 이 새낀 엉뚱한 쪽으로 사람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다니깐.”

지태는 강성원의 섬세한 마음씀씀이에 그만 울컥했다.

“아, 오늘 하루는 어지간하면 금주를 하려고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 가자, 한 잔 꺾으러!”

지태가 어깨동무를 하듯 이끌자 강성원은 당연히 그걸 기대했다는 듯 반겼다.

내일 오전 8시 첫 비행기로 출발해야 하는 까닭에 강성원과의 술자리는 1차로 마감했다.

여섯 시간가량 숙면을 취한 지태는 알람을 맞춰 놓은 오전 5시가 되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씻고 나온 지태는 지난 밤 미리 꾸려 놓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드디어 대망의 첫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지태는 어떤 긴장감과 기대감이 마구 뒤섞인 표정으로 마음을 다스리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지태의 몸을 잠시 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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