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비빌 언덕도 만들었고(1)
결국 어머니는 손을 들었다.
몇 번 만류하긴 했지만, 당신의 말이 먹혀들 것 같지 않자 그냥 아들에게 모른 척 져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여하튼 지태는 어머니가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새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사이 제 나름대로 바삐 돌아다녔다.
첫 번째 할 일은 우선 독립을 위한 둥지를 찾는 일이다.
역삼동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사무실을 알아보러 다녔는데, 임대료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보증금도 보증금이지만, 무엇보다 월 임대료와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관리비 등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컸다.
이제 막 시작하는 신생 회사가 처음부터 겉멋만 들어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태는 대로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빌딩의 사무실을 마음속으로 점찍어 두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요즘 불황이라서 그렇지 예전엔 이만한 가격엔 꿈도 꾸지 못할 곳이라고 했다.
매물로 나온 것은 50평이지만, 실 평수는 대략 30평정도 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아직은 1인 회사에 불과한데 이것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름 생각해둔 바가 있어서 지태는 결심을 굳혔다.
보증금 5천만 원에 관리비 포함 월세가 총 300만 원이었다.
사무실 임대가 끝나자 집기 등을 채워 넣은 다음 바로 법인 등록을 했다.
[한스무역.]
지태는 자신의 성 씨를 앞에 내걸고 한세상을 풍미해 보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담아 회사 이름을 그렇게 정했다.
얼추 준비를 마칠 때쯤 다행히 지하 셋방이 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지태는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가 찾아낸 새 집은 지은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빌라의 2층이었다.
하루 월차를 낸 강성원까지 달려와 도와준 바람에 이사는 비교적 수월하게 끝냈다.
하기는 낡고 오래된 가구 대부분을 전부 버리고 온 것이라서 실제로 그들이 손수 옮길만한 것은 몇 가지 안 되었다.
지태는 그 빈자리를 모두 새 가구들로 채울 생각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어머니!”
“그래, 고마워. 오늘 너무 고생이 많았다, 성원아.”
강성원의 축하 인사에 어머니는 눈으로는 웃어주면서도 전반적인 표정은 왠지 슬퍼 보였다.
어머니의 심정을 알기에 강성원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하자 퍼뜩 아버지가 생각났을 것이다.
그동안 마음 고생한 것들을 천천히 위로받으면서 살아가도 되련만, 뭐가 급하다고 그리도 일찍 세상을 하직했나 하는 안타까움도 들 것이다.
지태가 눈치껏 강성원의 팔뚝을 툭 쳤다.
“이제 얼추 힘쓸 거는 다 써먹었으니까 넌 그만 가 봐도 돼.”
“하, 이 자식 말 한번 되게 싸가지 없이 하네. 이삿짐 나르느라 진을 다 뺐으면 고기라도 한 점 사 줘야지. 나더러 그냥 가라고?”
지태가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강성원은 그렇듯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알았어! 고기가 듬뿍 들어간 간짜장으로 두 그릇 사 줄게 나가자. 엄마, 이놈 밥 한 그릇 사 먹이고 얼른 돌려보낼게요.”
“그래. 맛난 거 많이 사줘라. 우리 성원이 고생했는데 짜장면 같은 거 말고 꼭 소고기 사줘야 한다! 알았지?”
행여 진짜로 짜장면을 사 줄까 싶어 어머니는 노파심에 그리 당부했다.
“아이고, 참! 농담이야, 엄마. 걱정 마요. 맛난 거 사 먹일게.”
지태는 서둘러 강성원의 팔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울 엄마 청소 마무리하면서 우실 시간이다.”
“인마, 그래서 나도 더 이상 어머니께 말을 안 붙인 거야. 괜히 돌아가신 아버지 떠올리며 네놈 신장을 팔아서 집을 얻었네, 마네 하는 그런 말씀이 흘러나올까봐.”
“자식! 눈치 하나 빠삭해선. 암튼 잘했다.”
지태가 피식 웃고는 강성원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둘렀다.
“가자! 네놈 소원대로 소고기 사 줄게.”
그러고는 어깨동무를 그대로 큰길가를 향해 걸어 나갔다.
“회사 법인등록도 했겠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지?”
알맞게 구워진 소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 한 병이 거의 비워질 무렵 강성원이 문득 운을 떼었다.
“그래야지.”
“말만 주식회사고, 직원도 없이 너 혼자 북 치고 장고 치고 다 하려고?”
“그럼 내가 영업 뛰고 다닐 수 있게 네가 가끔 놀러 와서 우리 사무실을 좀 지켜 주던가. 너 광수대에서 별로 할 일도 없잖아.”
“하, 이 새낀 말을 해도 꼭!”
밉지 않게 눈을 흘기던 강성원이 소고기를 뒤집으며 물었다.
“뜻이 맞을만한 직원부터 뽑아야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신생 회사에 어떤 미친놈이 오겠냐. 너 같으면 올 마음이 생기겠냐?”
“내가 미쳤냐, 인마!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구멍가게에 뭘 믿고 내 미래를 맡기냐!”
“하, 이 자식 오버하기는! 아무리 급해도 너 같은 놈은 절대 안 뽑아, 인마. 하나를 뽑더라도 일당백으로 뽑을 거다.”
“그니까 어떤 골빈 놈이 거길 가겠냐고?”
강성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태는 심중에 무엇인가를 숨긴 눈빛으로 피식 웃었다.
그 묘한 표정을 강성원은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사실은 예전부터 점 찍어둔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누군데?”
“있어, 그런 사람이. 나처럼 골 때리는 성격에 똘끼까지 충만한 사람!”
지태는 마음속에 점 찍어둔 그 인물을 떠올리는 듯 입가에 미소 한 자락을 내걸었다.
강성원이 그런 지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퍽이나!’하는 의심이 담긴 눈빛으로 헛웃음을 토했다.
* * *
“이게 누구야? 너 한지태 아니냐?”
업소용 긴 앞치마를 두른 채 치킨을 튀기던 조현민이 이제 막 호프집으로 들어서는 지태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와는 반대로 지태는 무심한 척 가게 안을 건성으로 훑었다.
그러면서 짐짓 건방을 떨어댔다.
“이젠 그냥 한지태라고 부르면 섭섭하지요.”
“그럼 한지태를 한지태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냐, 인마?”
“모르시나 본데, 내가 조 과장님이 사표 쓰고 나가신 후로 이름 뒤에 대리라는 혹이 하나 더 붙었걸랑요!”
“하, 이 자식!”
조현민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빈정댔다.
“혹을 붙이나마나 이미 잘렸다면서, 뭘? 내가 회사를 때려치웠다고 얻어듣는 귀까지 없는 줄 아냐?”
“아이고, 그러셔요? 눼, 눼에.”
지태가 장난스런 몸동작으로 낄낄 웃자 조현민은 손을 까불어 댔다.
“흰소리 그만 하고! 일단 저기 테이블에 좀 앉아 있어. 이거만 튀기고 오늘 장사는 시마이 할 거다.”
그래서 일부러 이 시간을 택해 온 것이다.
한창 바쁠 때 찾아와 봤자 민폐만 끼칠 뿐이니까.
지태는 빈 테이블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이제 겨우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인데 홀에는 술손님이 하나도 안 보였다.
문 앞 보조의자에 중년 여성이 하나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지금 튀기고 있는 치킨의 주인인 모양이다.
치킨을 포장해 손님을 보낸 조현민이 앞치마를 벗어 던져 놓고는 지태 쪽으로 다가왔다.
“장사를 혼자 하세요?”
“혼자서는 무슨! 가끔 배달도 다녀야 하는데 가게 볼 사람은 있어야지. 원래 집사람이랑 둘이 하는데 초저녁에 몸살기가 있다고 해서 먼저 들여보냈어.”
“힘드시겠습니다.”
“가진 거 없는 놈들이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나마 장사라도 잘 되면 할 만 하겠는데 요즘엔 너무 경기가 없어서 이 짓도 못해먹겠다. 회사 잘린 사람들마다 별로 할 게 없으니 죄다 치킨만 튀기잖아. 너도 보다시피 한 집 건너 전부 치킨 가게 아니냐.”
조현민이 씁쓸하게 내뱉고는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모처럼 나랑 맥주 한 잔 해야지?”
“당연하죠. 그럴 생각으로 찾아온 건데!”
조현민은 영업 마칠 시각에 다시 치킨을 튀기는 게 지겨웠던 모양이다.
병맥주 세 병에 간단히 마른오징어를 구워 왔다.
“느닷없이 찾아온 이유가 뭐야?”
“치킨 생각이 나서 이곳까지 물어물어 왔는데, 이게 뭡니까. 겨우 마른 오징어라니.”
“쓰읍! 내가 너를 몰라? 뭐 잘난 얼굴이라고 이유 없이 네놈이 나를 보러 왔겠냐. 은근슬쩍 말 돌리지 말고 솔직히 안 털어놓을래? 이게 회사 때려치웠다고 옛날 호랑이 사수 알기를 개 뭣으로 아네!”
그랬다.
조현민은 선우글로벌 시절 해외영업팀의 과장 겸 지태의 사수였다.
성격이 워낙 불같고 지태의 말마따나 정의 앞에선 똘끼 충만한 것까지 그대로 빼박아서 둘은 직위와 나이를 떠나 죽이 아주 잘 맞았었다.
조현민이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물었다.
“그 새낀 아직 여전하지?”
“제 버릇 어디 남 주겠습니까? 그 꼴 못 봐주고 받아버리는 통에 나 역시 조 과장님처럼 짐 쌌습니다.”
“그니까 왜 남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게 우리 두 놈 눈에만 보이냐, 이거야!”
“똘끼가 넘쳐서 그런가 보죠, 뭐.”
두 사람은 잠시 선우글로벌의 허영만 상무를 화제로 쓰게 웃었다.
그러다가 조현민이 문득 정색하며 다시 물었다.
“너 진짜 여긴 왜 왔냐?”
이럴 때 자칫 농담을 흘렸다간 뒤통수를 얻어맞을 분위기였다.
지태는 자세를 바로 잡고 이내 정색하며 조현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예, 사실은 조 과장님께 용무가 있어 뵈러 왔어요.”
“나처럼 끈 떨어진 사람을 뭣 때문에?”
“그전에 하나 묻죠. 과장님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사십니까? 보람이나 성취감 같은 거 느끼며 사시는 건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이 자식, 겁나게 왜 이래? 나한테 마치 선전포고하러 온 놈처럼!”
“맞습니다, 이거 선전포고입니다. 사실 오늘 조 과장님하고 한판 뜨려고 왔거든요.”
“어쭈!”
“그전에 내 질문에 먼저 답부터 주세요.”
지태가 단호한 입장을 보이자 조현민의 입가에 살짝 걸려 있던 웃음기가 금세 사라졌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후회하며 사는 중이다. 나란 놈은 왜 남들처럼 융통성 있게 살지를 못할까. 왜 이기적일까. 내 똥고집 때문에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이후로 우리 와이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해. 지금 내가 아주 죄인이 된 심정으로 살고 있다!”
“……!”
“이놈의 장사라도 잘된다면 그나마 면목이라도 설 텐데 그것도 아니고 말이야. 요즘엔 아주 잘 팔면 하루에 약 20마리 정도 나간다. 평소엔 어림도 없는 소리고. 그 몇 푼 안 되는 매출에서 이것저것 떼어 주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니, 어떨 땐 가져가는 것 없이 오히려 적자야. 한 마디로 말해 요즘엔 그냥 마지못해 산다고나 할까?”
조현민은 제 말끝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지태가 아픈 눈길로 바라보자 조현민이 돌연 맥주잔을 들더니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뭐? 지금 이렇게 사는 내 꼬락서니나 살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뭐냐고? 연민 품을 사람이 궁했어. 그래서 찾아온 거야? 나한테 연민이나 동정을 던져주려고?”
“에이, 설마요! 선우 시절 조 과장님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던 분인데. 조 과장님은 내 마음속에 영원한 사수십니다.”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하고! 진짜 하고픈 이야기가 뭐야?”
조현민은 속으로는 뿌듯하면서도 이야기의 본질은 이게 아니어서 지태를 재촉했다.
“사실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나를 좀 이끌어 주십사하고!”
“무슨 말이야, 그게? 좀 알아듣게 얘길 해야지.”
“내가 아무래도 사고를 좀 친 거 같습니다, 과장님!”
“사고… 라니?”
“독립했습니다. 내가요, 겁 없이 회사를 하나 차렸단 말입니다.”
“허!”
순간 조현민의 입에서 아닌 게 아니라 기가 막힌다는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 회사라는 거는 오퍼상을 말하는 것일 테고?”
조현민이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예, 과장…… 아니지 조 전무님!”
“전무?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돌연 터져 나온 엉뚱한 호칭에 조현민이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지태는 기다렸다는 듯 슈트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조현민 앞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