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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1화 (11/272)

011화. 최봉준의 빙의(1)

아버지는 고서들을 수집할 때마다 구입 날짜와 장소 등을 기록해 책갈피에 꽂아 두었는데 이것 역시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최봉준?”

지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지만, 무지 생소한 이름이었다.

자신의 역사적 지식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그 이름이 퍼뜩 떠오르질 않았다.

‘구한말의 무역왕이라는데 누구지? 유명한 사람이었나?’

지태는 여러 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에도 잘 모르겠다.

그러자 마음속에 잔뜩 품고 있던 흥미가 금세 사라졌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찾아보든가 하지, 뭐.”

지태는 대수롭지 않게 내뱉으며 아버지의 쪽지를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이번엔 족자를 펼쳐 그 안에 붓으로 써내려간 처세 10조를 눈으로 훑어 내렸다.

처세 10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2. 명확한 목표를 세워라.

3.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 해낼 수 있다.

4. 상대의 입장에서 행동하라.

5. 자기계발에 힘써라.

6. 기회는 역경의 시기에 찾아온다.

7. 성공은 냉철한 자기 분석에서부터 시작된다.

8. 경쟁보다 협력을 하라.

9. 실패를 귀중한 교훈으로 삼아라.

10. 하루하루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지태는 피식 웃었다.

처세 10조라고 해서 대단히 특별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라는 게 머리에 먹물깨나 든 사람들이 가끔 펴내곤 한다는 일반 교양서적의 소제목만 발췌한 것 같아서 그다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지태는 족자를 다시 둘둘 말아 한쪽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이한 것은 없는지 허리를 세워 고서 뒤편을 살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다.

족자가 세워져 있던 바로 옆모서리에 낡고 헤진 갈색 가죽으로 된 수첩 같은 게 놓여 있다.

두텁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겉표지를 살펴보니 ‘후세(後世)의 대상(大商)에게’라는 표제가 쓰여 있었다.

“후세의 대상? 거 제목 한번 거창하네!”

지태가 피식 웃으며 수첩의 첫 장을 넘겼다.

작은 붓으로 이 수첩을 남기는 목적 등을 서술한 수첩 주인의 서문이 보였다.

글씨를 너무 갈겨 쓴 탓에 한눈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어떤 글자는 보관자의 실수로 물기가 닿았는지 먹물이 번져 흐릿하기도 했다.

지태는 좀 더 자세히 글자를 들여다보기 위해 수첩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때 수첩의 책갈피 사이에서 돌연 작은 불개미 크기만 한 벌레가 한 마리 기어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벌레였다.

“뭐야, 이건!”

지태가 아무 생각 없이 벌레를 쳐내려고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이었다.

눈치를 먼저 채버린 벌레가 즉각 반응했다.

잽싸게 벼룩처럼 풀쩍 뛰어오르더니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지태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끔.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눈동자에서 기분 나쁜 통증이 일었다.

엉겁결에 손바닥으로 두 눈을 비벼 대자 이제는 송곳으로 눈알을 파내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점점 참을 수가 없었다.

자칫 실명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속에서 지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거실에 있던 어머니가 비명 소리에 놀라 달려왔다.

“왜 그래, 지태야? 너, 너, 왜 그래?”

“아, 아파. 눈 속으로 뭔가 들어갔는데 죽을 것 같아요. 아파, 너무 앞… 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태의 비명 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웬만해서는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지태였다.

그런 아들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덩달아 따라 죽을 것처럼 애가 닳았다.

“이를 어째…… 이를 어쩌면 좋아.”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는 사이 지태는 미친 듯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것도 잠시, 이제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사지를 쭉 편 채 바르르 떨어 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돌연 잠잠해졌다.

끝내 숨이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한데 아니었다.

뱃가죽이 살짝살짝 꿈틀대고 옅은 호흡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선 아직 숨을 거둔 것 같지는 않았다.

* * *

머리가 지끈거린다.

머릿속에 수박만 한 돌멩이를 서너 개는 얹어 놓은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눈꺼풀이 강력접착제를 붙여 놓은 듯 떨어지질 않는다.

지태는 급기야 끄응!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런 지태를 누군가 마구 흔들어 깨운다.

“이제 정신이 드니? 지태야, 엄마야! 어서 눈을 떠봐.”

어머니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죽은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그 와중에도 퍼뜩 들었다.

무섭고도 긴 여행이었다.

눈알을 파내는 것 같은 지독한 고통으로 정신을 잃었을 때 지태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눈을 떴었다.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짙은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한 줄기 작은 빛이 춤을 추어대는 듯했는데, 그것은 곧 도깨비불만큼이나 커지면서 지태가 있는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담대함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지태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이 왈칵 찾아들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 불빛은 어느새 사람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대가 내 수첩을 소유한 후대인(後代人)인가?”

마치 흑백텔레비전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보이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검은 마고자 차림의 초로였다.

“누, 누구십니까? 여긴 또 어디고……?”

“난 그 가죽수첩의 주인인 최봉준이라는 사람일세.”

최, 봉, 준?

구한말에 거부(巨富)로 명성을 떨쳤다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라고 한다면 이곳은 저승?

지태가 사색이 되어 쳐다보자 최봉준은 그제야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내 뒤를 이을 후대의 거상을 가리는 일인데, 어찌 얼굴 한 번 보지도 않고 선택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일부러 불렀다네.”

말하자면 면접이라는 이야기다.

하면 꿈속이라든가, 현실에 현신을 해서 만나면 될 것을 굳이 저승으로 부른 까닭은 무엇이냐.

이승에서 꿈도 펼쳐 보이기도 전에 저승의 상인이 되라는 말인가.

지태는 매우 불만스럽고 너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가진 게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를 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네가 담보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인 목숨일 테지. 그러기 전에 죽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 이렇게 한 번 죽어 봤으니 더는 죽음 따위를 겁내지 않을 게 아닌가.”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상황에서는 이 사람의 말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최봉준이라는 인물도 아버지의 유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가 살아온 생애나 업적도 전혀 알지를 못한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내뱉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뭔가 증거를 보여 줘야 맞는 거 아니겠나.

지태가 작심한 듯 물었다.

“전 어르신을 처음 뵙습니다. 함자를 접한 것도 오늘 처음이고, 어르신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습니다. 그런데 뭘 믿고 제가 어르신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건지…?”

그러자 최봉준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건 중요치 않네. 다만, 자네가 나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게 중요할 뿐……. 모든 건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켜보면 될 일이고.”

결국 그에게서 알아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최봉준은 일방적으로 아리송한 말만 내뱉더니 지태를 이곳으로 부른 본질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 체험했던 최봉준과의 미스터리한 기억을 지우며 지태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냈다.

그제야 사물이 또렷하게 시야에 잡혔다.

“아이고, 우리 아들. 엄마 얼굴 보이니? 이제 괜찮은 거야?”

눈을 뜬 다음 제일 먼저 시야에 잡힌 것은 눈물 그렁그렁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지태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승을 벗어나 비로소 현실세계로 돌아왔음을 어머니를 통해 확신하게 된 까닭이다.

“엄마, 나 괜찮아요. 이제 멀쩡한 거 같아.”

“아이고, 너마저 잘못됐으면 나도 뒤따라가려고 했다. 이 녀석아, 내 애간장이 얼마나 녹았는지나 알아?”

결국 어머니가 훌쩍거렸다.

아들이 다시 살아나 흘리는 기쁨의 눈물.

“울지 마요, 엄마! 액땜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근데 내가 얼마나 이러고 누워 있던 거예요?”

“꼬박 이틀이야, 인마! 암튼 이 새낀 사람 놀라게 만드는 데는 선수라니까. 아주 더러운 취미를 가진 새끼! 인마, 너 땜에 하마터면 내가 없는 살림에 부좃돈 깨질 뻔했잖아!”

훌쩍이며 눈물을 닦아 내는 어머니 대신 돌연 그 자리를 치고 나오는 목소리에 지태는 고개를 돌렸다.

강성원이 밉지 않은 눈길로 흘겨 대고 있었다.

이건 녀석 나름의 엄청 반갑다는 우정의 표시.

지태는 주먹을 쥐어 그의 허벅지 부근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이 또한 살갑지 못한 지태가 내보일 수 있는 우정에 대한 최고의 표현 방식이었다.

* * *

이틀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신장을 떼어낸 후유증이나 수술 자리에 염증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정밀검사를 진행했지만, 수술 부위는 빠르게 회복이 되고 있을 뿐 별 다른 이상 징후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참으로 희귀한 케이스라며 담당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별다른 이상 소견이 없으므로 지태는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얼마 안 있어 곧 퇴원했다.

꼬박 이틀간 병실을 떠나지 않았던 어머니를 집에 모셔서 쉬게 한 후에 지태는 강성원과 함께 집 근처 어린이공원의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너 요즘 내 심장 강화 운동시키냐? 왜 툭하면 심장 쪼그라들게 만들어, 새꺄.”

강성원은 발끝으로 지태의 종아리 부근을 툭 건드렸다.

“조폭 놈들 앞에서 쫄지 말라고 이 형님이 특별히 훈련시키는 거야, 인마!”

“니미, 훈련 두 번만 시켜줬다간 쇼크사로 내가 먼저 가겠다, 이 자식아!”

강성원이 입술을 비틀며 눈을 흘겨 댔다.

시발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녀석이지만, 이 또한 그 나름의 진한 우정의 표현이라서 지태의 귀에는 그 소리가 오히려 정겹게만 들렸다.

지태가 피식 웃더니 문득 정색했다.

“야, 이거 아주 골 때리는 경험인데, 너 한번 들어 볼래?”

“……?”

“사실 이게 아직까지 꿈인지 현실인지 도대체 분간이 안 가긴 하는데 암튼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 아버질 만났다.”

이 자식이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질 않았나?

강성원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무지 진지하고 정색하며 내뱉는 말이어서 이러쿵저러쿵 딴죽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들어나 보자.

강성원은 그가 무슨 말을 토해낼지 잠시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지태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지태의 입에서 더욱 기가 막힌 소리가 새나왔다.

“구한말에 동북아를 주름잡았다던 무역왕 최봉준이라는 사람을 먼저 만났다, 내가! 후후.”

자신의 말끝에 지태는 풀썩 웃었다.

말을 내뱉는 그 자신도 아직 믿기지가 않는데 제3자인 강성원이야 말해 뭐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 거다.

“……!”

하지만 강성원은 웃지 않았다.

이틀간의 혼수상태가 의학적, 과학적으로도 소명되지 못했으니 지태가 어쩌면 신비한 체험을 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성원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 그 최봉준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모셔왔냐?”

“내 말이 믿어지긴 하냐?”

“믿으려고 노력하니까 이렇게 묻는 거지!”

강성원이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피식 웃어 보인 지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최봉준 어른께서 아버지에게로 나를 데려가더라. 그곳이 뭐 중천이라던가 뭐라던가…?”

“중천?”

“망자가 염라대왕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49일간 대기하는 장소라더라.”

“최봉준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그랬다면 그런 것이고. 그나저나 뭐라 하시대, 아버지께선?”

“유서에 남겼던 말씀의 재탕이지, 뭐.”

“독하게 세상을 살고, 어머니를 잘 모셔라?”

지태는 미소를 그린 얼굴로 콧숨을 킁킁 내뱉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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