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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9화 (9/272)

009화. 신장까지 떼었는데(1)

한편 지태는 문병을 온 강성원을 데리고 병원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곳에는 환자와 가족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휴게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저기 앉자.”

지태가 원형으로 만든 화단 너머로 보이는 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강성원은 아직은 거동함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지태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자 지태가 손을 내저었다.

“얀마, 나 한지태야.”

“누가 모르냐, 새꺄! 너 졸라 센 놈인 거 다 알아. 아는데 이럴 땐 그냥 형이 하자는 대로 해주라.”

“아, 됐어. 진짜 멀쩡해. 어디 그뿐이냐? 몸의 일부를 떼어 냈더니 오히려 날아갈 것처럼 가볍기만 하다. 그냥 저절로 다이어트가 됐어. 그니까 너도 시간 나면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지 말고 별로 써먹을 데도 없는 그거 그냥 확 떼서 없애버려.”

지태는 제 말끝에 강성원의 아랫도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강성원이 손을 번쩍 쳐들었다.

“어휴, 이걸 그냥 확! 니가 몰라서 그래, 인마. 지금도 내 소중이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알았어. 인정해줄게.”

둘은 곧 나무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성원이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캔커피 두 개 중 한 캔을 지태에게 내밀었다.

“언제 퇴원하라대?”

“한 이틀 더 있어 보라는데, 그냥 낼 퇴원할까 한다. 누워만 있으려니까 너무 갑갑해. 몸이 더 뻐근한 거 같다.”

“내일 퇴원한다는 놈한테 오늘 기껏 문병을 온 나는 뭐냐, 그럼?”

“그냥 골대 앞에서 알 깐 거고, 달리 말하자면 삽질한 거지.”

지태가 피식 웃자 급기야 강성원은 장난스럽게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내렸다.

“누워 있는 동안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들더라.”

“여친도 없는 놈이 여자 생각했을 리는 없을 테고. 혹시 내 생각 했냐?”

강성원이 슬쩍 농을 날리는데도 지태가 정색하자 그 또한 덩달아 정색했다.

그저 가볍게 내뱉어 본 소리가 아닌 듯했다.

“무슨 생각들을 했는데 그래?”

“좀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뭐 그런? 그냥 어리바리 살았다간 이 경쟁사회에서 결코 생존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들……. 특히나 동일선상에서 똑같이 출발을 한다 해도 이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들하고 경쟁해봤자 나 같은 놈은 몇 발자국 떼어보지도 못하고 금세밑바닥으로 도태될 건 뻔한 거고.”

“시발, 세상이 원래 다 그렇게 엿 같은데 당장 뭘 어쩌겠냐…….”

딱히 대꾸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은 강성원은 그런 식으로 투박하게 날리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공정하다는 거, 올바른 생각이나 양심 따위가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없다면 과감히 버려야 할 것도 같고…….”

얘가 점점.

오늘 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지태를 강성원은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좀 더 독하게 살아보려고!”

지태가 고개를 돌려 강성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불타는 것처럼 강렬했지만, 강성원은 피하지 않았다.

지태의 색다른 의지를 보는 것 같아 그 눈빛을 제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똑바로 눈빛을 받는 것을 자신이 응원하겠다는 뜻으로 받아 주길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다 좋아. 하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독하게 굴지 마, 새꺄! 너와 나의 개 같은 우정!”

강성원의 멋대가리 없는 응원에 지태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 * *

지태는 강성원에게 공언한 것처럼 다음 날 오전이 되자 곧바로 퇴원 수속을 밟았다.

어머니에게는 해외 출장이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했지만, 하루 앞당겨 귀국했다고 둘러대면 된다.

문제는 병원 생활 5일 만에 출장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그래서 지태는 이러저러한 궁리 끝에 한 가지 꾀를 냈다.

정장으로 갈아입으러 집에 들어가기 전 화장품 가게에 먼저 들러 남성용 쿠션파운데이션을 하나 샀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난생처음 얼굴에 화장을 했다.

정성스럽게 골고루 찍어 발랐더니 확실히 효과는 좀 있는 듯했다.

푸석푸석하고 윤기 없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이래서 화장발, 화장발 하는 거로구나.’

지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을 나선 다음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에서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던 아버지가 푹 꺼진 눈망울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출장은 잘 다녀왔냐?”

“예, 아버지.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매양 누워서 놀고먹는데 좋고 나쁠 게 뭐 있어.”

“무슨 말씀을 그리 하셔요. 그간 열심히 사셨으니까 이제는 좀 쉬신다 생각하고 편하게 마음먹으세요. 아버지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잖아요.”

“허헛. 그 자식…….”

“만병은 마음에서 연유한다잖아요. 이제 근심 같은 건 다 내려놓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기! 아셨죠?”

“그래, 그렇게 하마. 그나저나 애비가 돼서 참으로 면목이 없다. 네 엄마, 그리고 특히 너한텐 더더욱…….”

순간 지태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던 아버지가 이렇듯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지태는 가슴 아팠다.

지태는 울컥해지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웃었다.

“그런 말씀 마시래도 그런다. 저요, 한지탭니다. 아버지의 든든한 아들, 한지태요.”

그때 병실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던 지태가 환하게 웃었다.

“엄마, 어디 갔다 와요? 아들 안 보고 싶었어?”

평소와는 많이 다르게 능청스러운 지태의 반김에도 어머니는 그저 살짝 미소를 지어 주고 말 뿐이다.

그 미소마저 측은지심과 연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왠지 좀 이상했다.

“우리 아들, 밥은?”

“회사에서 먹고 왔어요. 공항에서 곧장 회사 들렀다가 오는 길이거든.”

어머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그 고갯짓에서는 어쩐지 진정성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잠시 출장을 다녀온 이야기를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누던 중, 아버지는 약 기운에 취해 졸린다며 눈을 감았다.

지태는 어머니를 밖으로 이끌었다.

들고 있던 통장을 불쑥 내밀자 어머니가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 귀국해서 확인해 보니까 출장 간 사이에 입금됐더라고요. 대출금 8천만 원에서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빌린 돈 갚고 나머지 7천 2백이야.”

“애썼다.”

딱 그 한마디였다.

지태는 좀 의아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자식에게 짐을 다 떠안긴 부모로서의 자괴감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 * *

“예, 어머니!”

강성원은 지난 새벽 강남 유흥가에서 벌어진 조폭 간의 격렬한 패싸움을 수사하던 중에 지태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강성원의 응답이 건너갔지만, 지태 어머니는 몇 초간 말문을 닫고 있었다.

쉬이 말문이 열리지 않아 혹시 끊겼나 싶어 강성원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여보세요? 어머니, 어머니!”

- 듣고 있다… 얘, 성원아.

“예, 어머니.”

- 너 지금부터 하나도 숨김없이 솔직히 말해야 한다.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야.

왠지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강성원은 동료 형사들을 피해 몇 걸음 옮겨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어머니?”

- 오늘 지태한테서 대출금이라고 7천만 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

“아, 그거요? 저한테도 얘길 해 줬는데요, 회사 부장님이 보증을 서 줘서 쉽게 대출을 받았다고…….”

- 얘, 성원아!

지태 어머니는 강성원이 늘어놓는 거짓말을 차갑고도 엄한 목소리로 냉큼 끊었다.

속인 죄가 있으니 강성원은 제풀에 기가 꺾인 투로 얌전히 대답했다.

“예, 어머… 니.”

- 지태가 회사에서 잘렸다는 얘기, 나도 이제 알고 있다. 내가 회사로 전화를 해 봤어.

“아!”

알고 있다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강성원은 신음성 같은 대답을 흘렸다.

- 그런데도 돈을 구해 왔더라. 이게 어떤 돈인지 알고 싶어서 너한테 전화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미 뭔가 눈치를 채고 묻는 듯해서 강성원은 식은땀이 다 흘러나왔다.

* * *

아버지는 수액을 갈아 끼우는 간호사의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병실 안에서 식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릴 때 출입문 쪽에 있던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답을 주었다.

“아주머니하고 아드님은 아까 밖에 나가셨어요. 혹시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그냥 좀 안 보여서…….”

“부인되시는 분께서 왠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아까 복도에서 살짝 우시는 것 같더니 아드님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신 것 같았어요.”

이 정도 되면 참으로 넓은 오지랖이다.

굳이 뭐 그런 상세한 사족까지 붙이는지.

아버지가 어두운 표정으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살가운 모자지간이다.

애틋한 정이 넘치는 두 사람이니 사소한 일로 다퉜을 리는 없고, 행여 문제가 있다면 그 자신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비와 엄청난 약값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발생했나 싶어 그는 몹시 괴로웠다.

아버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침대 아래에 놓인 슬리퍼를 발에 끼운 다음 밖으로 나왔다.

* * *

옥상의 화단 주변에 있는 나무벤치였다.

나란히 앉아있는 중에 어머니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속인 건 죄송해요, 엄마. 그리고…….”

지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변명도 씨알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강성원을 통해 모든 것을 알아 버린 어머니였다.

실직 후 매일 피씨방으로 출근해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취업 사이트를 뒤졌던 일상부터 신장을 떼어 팔기까지의 전 과정을 모두 털어놨다고 했다.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소리까지 늘어놨느냐고 목청을 높였지만, 사실 강성원을 탓할 수도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아들이나 다름없이 대해주었던 강성원인지라 차마 어머니에게 거짓말로 일관할 수는 없었으리라.

“부모가 못나서 아들의 장기까지 팔게 만들었다. 이 못난 부모 잘못 만나서…….”

어머니의 흐느낌은 더욱 격정적으로 변하며 끝내 오열로 번져갔다.

“엄마…….”

지태는 어머니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콩팥 하나 없다고 세상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요. 그나마 엄마가 튼튼하게 만들어 놔서 이렇게라도 효도할 기회가 있는 거야. 그거에 그냥 감사하게요, 엄마.”

어머니의 몸을 제 어깨로 바짝 끌어당기며 지태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

그럼에도 어머니의 흐느낌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일각.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 한쪽에 기대어 서있던 아버지가 무너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그날 밤 지태는 어머니의 요청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 같았으면 한 번쯤 사양하거나 어머니 대신 병실을 지키겠다고 우겼겠지만, 그럴수록 어머니의 마음만 아프게 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군소리 없이 따랐다.

등을 돌리고 창 쪽으로 누운 아버지는 주무시는 것 같아 인사 없이 병실 문을 나섰다.

비록 부득불 우겨서 퇴원은 했지만, 아직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몸은 오늘 하루 고단하기만 했다.

지태는 간단히 세수만 하고 침대에 누웠다.

수많은 생각들이 희뿌연 안개처럼 머릿속을 뒤덮는 것 같더니 이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잠에 빠져든 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머리맡이 요란스러워 지태는 잠에서 깼다.

스탠드를 켜고 스마트폰을 들어 먼저 시간부터 확인했다.

새벽 3시를 겨우 넘긴 시각이었다.

뜻밖에도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순간 지태는 불길한 느낌이 왈칵 밀려들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해올 정도면 보통 급한 일은 아닐 거라는 불안감이 뒤통수를 후렸다.

지태는 정신이 번쩍 들며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예, 엄마.”

지태의 목소리는 벌써 긴장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

그러나 대답이 없다.

대답 대신 폰 너머에서 먼저 들려온 것은 어머니의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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