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엎친 데 덮친…(2)
회사에서 잘렸다고 곧장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고 나온 종이박스를 보는 순간 어머니는 그대로 졸도할지도 모른다.
40년을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뼈가 굵은 아버지가 출판업계의 불황으로 부도를 맞고 거기에 더해 빚보증까지 잘못 선 덕분에 집안이 쫄딱 망한 후로 유일하게 돈 나오는 구멍은 지태였다.
아버지는 지난달부터 오랜 지기 한 분과 동업으로 출판 관련 사무실을 차렸다는데 아직 가 보질 않아서 사실은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도 있지만, 워낙 아버지가 무뚝뚝한 탓에 지태는 그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맛이 나지 않았다.
자식 사랑하는 속정이야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 보이는 아버지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위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회사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라면 아직 회사가 자리를 잡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판국에 자신까지 회사에서 잘렸다고 하면 어머니의 충격은 매우 클 것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지태는 친구 한 놈을 불렀다.
그에게 회사에서 가지고 나온 짐을 맡기려는 것이다.
“회사 잘렸음 얌전히 기어 들어가서 도나 닦을 것이지. 뭐 잘났다고 바쁜 사람은 불러내고 지랄이냐, 지랄이!”
강성원은 삼겹살집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툴툴거렸다.
이놈은 지태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시쳇말로 불알친구다.
말은 그리 했어도 전화를 받자마자 총알같이 달려온 걸 보면 녀석도 어지간히 마음이 짠했던 모양이었다.
“울 엄마, 마음이 여리고 유리처럼 약한 거 알지? 내가 이 박스를 들고 얼굴 들이밀었다간 그 순간 바로 초상 치러, 인마! 당분간 말 안 할란다. 천천히 분위기 파악해 가면서 말할 거야.”
“그걸 아는 새끼가 그 지랄을 떨고 잘려? 암튼 너는 사회생활 똑바로 하려면 그놈의 성질머리부터 죽여야 돼. 어휴, 이 똘끼 충만한 새끼!”
강성원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회식 자리에서 그걸 목격했다면 나 못지않게 돌아 버렸을 거다. 어쩌면 재고 말 것도 없이 그 새끼 대가리에 곧장 권총을 박았을걸!”
“내가 너냐? 난 불의를 보면 대체적으로 꾹 참는 사람이야! 시발, 취직도 어려운 때 졸라 힘들게 들어갔으면 더러워도 도 닦는 심정으로 얌전히 지내야지.”
“인마! 불의를 보면 대체적으로 꾹 참는 네놈이 봐도 열을 받았을 거라니깐. 진짜 권총 한 방 박았을 거다.”
“야, 광수대라고 아무 때나 권총 차고 다니는 줄 알아? 암튼 드라마나 영화가 사람들 다 버려 놨다니깐.”
강성원은 경대 출신으로 파출소에서 지난 3년을 뒹굴다가 작년에 광수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지태는 싸움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무슨 형사씩이나 하느냐며 강성원을 놀려 먹었었다.
“그럼 대놓고 성추행을 하는데 그걸 냅둬? 성질 같아선 그 자리에서 모가지를 확 비틀고 싶었는데.”
“그니까 그게 왜 너만 보이냐고, 인마. 다른 사람들은 봐도 못 본 척 넘어갔잖아. 네놈이 그 신입 여사원의 남친이라도 돼? 그 친구가 그렇게 이뻤어?”
“에라! 그게 경찰이라는 새끼의 입에서 나올 소리냐?”
지태가 못마땅하게 으르렁거리며 눈에 넣을 듯 쏘아보았다.
그러자 강성원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 대목에서 자칫 눈싸움을 벌이거나 엉뚱한 말대꾸로 응수를 했다간 지태 성질머리에 주먹이 날아오거나 탁자를 그대로 엎어 버릴지도 모른다.
중, 고딩 때 장난으로라도 한 번 맞아 본 놈은 지태의 주먹맛을 다시 맛보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지태가 초딩 때 또래들한테 얻어맞고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됐다.
그의 아버지는 그날로 지태의 손목을 잡고 합기도 도장에 데려갔고, 그 이후로 각종 무술을 꾸준히 연마하게 해 지금의 그를 만들어 놓았다.
각종 무술 도합 11단의 유단자였다.
게다가 군대는 또 어딜 다녀왔는가.
훈련의 강도가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해군특수전전단, 즉 UDT에 자원입대해 다녀온 놈이다.
그간 연마한 무술에 해군특수전전단의 무사트 시스템까지 더해진 지태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군 전역 후 복학생 시절 시내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깡패 여러 놈과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그때 지태 혼자서 그들 전부를 거의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태는 아주 무서운 새끼인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나랑 직업을 서로 바꿨어야 돼. 그랬담 벌써 우리 업계의 전설이 되었을 건데…….”
강성원은 몹시 아쉽다는 듯 쓴맛을 다시고는 소주잔을 비웠다.
“네놈 밥줄 끊어질까 봐 내가 꾹 참는 거다.”
“아이고, 뜨거운 우정에 졸라 눈물 나네.”
떨떠름하게 입술을 삐죽이는 강성원을 보며 지태가 쓰게 웃다가 문득 물었다.
“광수대 생활, 요즘은 어때? 이제 좀 할 만하냐?”
“할 만하긴! 차라리 지구대에서 순찰 돌면서 뽀댈 때가 천국이었다. 시발, 요새 아주 죽을 맛이라니깐. 오늘도 졸라 바쁜데 겨우 빠져 나온 거야.”
“뭐라고 핑계대고?”
“그야 뻔한 레퍼토리가 있잖냐. 오늘도 어김없이 친구의 아버지 한 분을 조용히 보내 드렸다.”
강성원은 불쑥 말을 던져 놓고는 사무실을 빠져나올 때를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는 모양이다.
“설마 염라대왕 면회하려면 아직도 한 30년은 더 남은 울 아버지 팔아먹은 건 아니지?”
“야! 나도 양심이 있지. 어떻게 내 유일한 불알친구 아버님을 팔아먹어. 그냥 없는 친구 하나 가상으로 만들어서 조용히 염라대왕님 면회시켜 드리고 왔다.”
뻔뻔하게 너스레를 떠는 강성원을 보다가 지태가 픽 웃자 그도 역시 덩달아 낄낄거린다.
서로의 빈 잔을 채운 다음 건배를 하면서 강성원이 물었다.
“친구 분하고 동업한다는 건 잘 되신대?”
아버지 쪽으로 화제가 옮겨 가자 지태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는 강성원이 인사치레로 물어왔다.
“몰라. 물어볼 새도 없었어. 그간 내가 좀 바빠서…….”
“바빠서는 무슨.”
지태가 자신의 아버지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어려서부터 보아온 지태의 아버지는 천성이 무뚝뚝하고 워낙 말수가 적어서 강성원 역시 뵐 때마다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았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설픈 변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지태는 쓰게 웃었다.
“부도에, 설상가상 빚보증에 모든 것 다 날리고 나니까 아버지가 더욱 말이 없어지셨어. 그러다 보니까 가끔 용돈 드릴 때 빼곤 거의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다.”
지태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다.
“그럴수록 네놈이 한 발짝 더 다가서야지.”
“그러게.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나도 그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라서.”
“그게 아주 자랑이다, 새꺄.”
강성원이 술병을 들며 고갯짓을 했다.
지태는 자신의 빈 잔을 내밀었다.
술을 채워 주면서 강성원이 지나가는 말투로 다시 물어 온다.
이번 화제는 앞으로의 계획이었다.
“어쩔 거냐, 이제?”
“어쩌긴! 내가 맘 편히 놀 형편도 아니고, 슬슬 경력 뽑는 데 있는지 알아봐야지, 뭐.”
지태는 나지막이 한숨을 토해 냈다.
말은 가볍게 던졌어도 앞날이 막연하고 암담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최소한의 자존심은 내세우고 싶었다.
“야, 그래도 내가 좀 유능한 놈이긴 했잖냐. 나 혼자 관리하던 해외 오더만 연간 1,500만 달러가 넘었다. 이 정도면 대단한 거 아니냐? 선우글로벌 같은 중견 무역 회사에서는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었으니.”
“야, 그러지 말고 그냥 경찰 시험이나 봐라. 광수대에 들어와서 나랑 파트너하면 좋잖아.”
“헛소리 마, 인마. 남자가 기왕 큰 뜻을 품었으면 세계가 알아주는 일류 장사꾼은 한번 돼 봐야지.”
“시발, 세계적이고 글로벌이면 뭐 하냐. 어차피 넌 월급쟁이 신세고, 돈주머니 차는 건 결국 오너 일가들일 텐데.”
“그래서 독립하려고! 물론 커리어 몇 년 더 쌓은 다음에 말이지. 네놈 말마따나 언제까지 남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잖냐.”
지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먹은 바가 있는 듯 거침없이 자신의 계획을 토해 내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이고, 그러셔? 그럼 미리 잘 보여야겠네. 이제 돈에 깔려 뒈질 일만 남은 예비 재벌님! 나중에 이 불알친구도 좀 챙겨 줘라.”
강성원의 짓궂은 너스레에 지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그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탁자 위에 올려놓은 지태의 휴대폰이 진동으로 요란하게 떨어댔다.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강성원을 바라보았다.
“엄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어지간히 급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절대 전화를 하지 않는 어머니였다.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혹시 너 잘린 거 눈치채신 게 아닐까?”
강성원이 낄낄거리며 농을 흘리자 지태는 입모양으로 ‘너 죽을래?’ 하며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예, 엄마!”
- 어, 지, 지태야!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몹시도 황망했고, 잔뜩 떨렸다.
듣는 순간 애써 격정을 삼키고 있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지태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엄마. 무슨 일 있어요?”
- 저, 그, 그게 말이다. 네 아빠가…….
그리고 겨우 말을 이어 가는 어머니의 말을 듣던 지태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져 갔다.
* * *
강성원의 승용차로 급히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응급처치는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신경안정제를 투약 받은 듯 링거를 꽂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건데요, 엄마?”
지태가 들어서자마자 물으니 어머니는 차마 그와 눈도 못 마주쳤다.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 보였는데 그게 지태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킨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어머니는 지태를 이끌어 응급실을 벗어났다.
응급실 현관 앞에 세워둔 앰뷸런스 뒤편으로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어머니가 어두운 밤하늘을 아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불안감이 급습하면 스멀스멀 피어나는 찜찜한 조바심도 덩달아 상승하는 법이다.
지태는 이런 게 싫었다.
“도대체 뭔데?”
그러자 어머니는 마음을 굳힌 듯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사실 네 아빠…… 친구 분이랑 동업으로 출판사 차렸다는 거, 거짓말이었다.”
아,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지.
그렇다고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애써 가다듬은 어머니의 의지를 흩트려 버릴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네 아빠 성격 탓에 친구도 그리 많지 않았잖아. 그나마 집안 몰락한 이후엔 있던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고. 한데 무슨 동업이겠니.”
“하면……?”
“고생하는 아들 녀석 볼 면목이 없다고 하시더라. 이렇게 마냥 놀 수만은 없다고 오래전부터 일자리를 찾아다니더니 지난달에는 어쩐 일인지 웃으면서 들어왔어. 어렵게 일자리 하나를 찾았다는 거야.”
“거기가 어딘데요?”
“부경물산!”
지태는 흠칫 놀랐다.
부경물산이라면 한때 부경그룹의 지주사였을 만큼 거대한 회사로 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종합상사와 건설 부문을 합병해 연 매출 10조가 넘는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서울의 일류 사립대 출신인 지태조차 취업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게 했던 회사인데 고졸 출신에 평생을 인쇄업에 몸 담았던 아버지가 그런 곳에 취직을 하셨다고?
지태는 의아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겨, 경비원으로 말이다.”
“경… 비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