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적응기(2)
에이트리 보안청.
에이트리 보안청의 공식적인 역할은 에이트리 우주정거장의 치안유지였지만, 실제로는 우주정거장과 우주정거장이 속한 311-23행성계의 행정과 정책을 담당하는 성계정부에 가까웠다.
그 중, 연합의 영역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개척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내어주는 것 또한 보안청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
“여기 있습니다.”
인사와 함께 창구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네모난 단말기 하나를 내밀었다.
“연합의 시민데이터베이스에 등록은 끝났고요, 앞으로 은행 업무나 행정업무 등을 보실 때에는 그 단말기를 꼭 가지고 다니셔야 해요. 그 단말기가 이안님의 신분을 증명해 줄 테니까요.”
‘주민등록증 같은 거군. 기능이 좀 다양하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이안은, 직원의 말을 쉽게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 불편하시다면 인증칩 시술을 받으셔도 괜찮으시고요. 보안청에서 인증받은 병원으로 가시면 일정액을 할인받으실 수 있는데, 받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직원의 은근한 권유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내구성을 뛰어넘은 육체에 메스 따위가 먹힐 리도 없었지만, 몸에 칩을 박아넣는다는 행위 자체가 영 꺼림직했던 탓이다.
‘혹시나 그 칩에 추적 장치가 달려있을지도. 아니, 분명히 달려있겠지. 나라도 달았을 테니까.’
필요할 때 놓고 다닐 수 있는 단말기라면 모를까, 굳이 자신의 위치나 사생활을 누군가에게 노출시킬 생각은 없었다.
곧, 이안은 단말기를 손에 든 채로 보안청을 빠져나왔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한 블록 넘어 세워져 있는 한 은행의 지점.
[계좌 잔액: 2,000 데나르]
“개털이네.”
계좌를 개설한 다음, 지구의 스마트폰처럼 생긴 단말기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혀를 찼다.
조금 전 신분 증명을 위해 발급비는 물론, 뒷돈까지 먹여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만.
“빨리 일을 구해야겠는걸.”
생활이야 당분간 우주선 안에서 해도 문제는 없겠지만,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음식이나 생활용품과 같은 물자를 좀 채워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가르인지 하는 악어대가리의 우주선은 말 그대로 고철값밖에 받지 못하게 생긴데다, 그마저도 한참 뒤에 정산될 예정이었으니까.
[보안청 옆에 현상수배 전단을 붙여놓은 게시판이 있었다. 일단은 그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나?]
“안 그래도 그러려고.”
미미르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그 역시 봐두어 알고 있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보안청이 있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그의 눈앞에 현상수배자들의 얼굴로 가득한 게시판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이 살아 움직이다니, 이건 조금 신기하군. 낭비같기는 하지만….]
“이쪽 동네의 유행인가 보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표정을 짓고 움직이는 전단지 속 현상수배범들의 모습을 보며, 이안은 지구에서 봤던 판타지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신기해했다.
하지만 이안에게 중요한 건 그림들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사실 따위가 아니라, 그 그림 속 주인공들의 목에 얼마나 많은 현상금이 걸려있느냐였다.
“5천, 5천, 3천, 1만….”
제각기 위협적인 포즈를 취하며 도발하는 전단지의 그림들과 그 아래의 현상금을 번갈아 가며 살피던 이안은, 곧 마음에 드는 대상을 고를 수 있었다.
[안드레 헤닝]
[죄목: 살인, 폭행, 감금, 테러]
[현상금: 300,000데나르. 생사불문.]
‘음, 나쁘지 않은데?’
곱슬머리의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을 보며, 이안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현상금 뒤에 적혀있는 ‘생사불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숨이 붙어 있든 말든 그냥 날려버리면 된다는 거잖아?’
그것만큼 이안이 잘하는 일도 없지 않은가.
범인의 생존을 조건으로 달고 있는 다른 전단지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조건이었다.
“좋아, 그럼 이거로….”
마음을 정한 이안의 손이 게시판에 붙어 있는 놈의 수배 전단으로 향했다.
붙어 있던 전단지를 아예 뜯어버림으로써 잠재적 경쟁자들을 완전히 차단해버릴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응?’
이안은 뜯어간 전단지를 챙길 수 없었다.
“뭐야, 넌?”
이안의 눈이, 자신의 전단지 한쪽을 쥔 상대에게로 향했다.
여자였다.
허리춤에 권총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차고, 등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길쭉한 무언가를 짊어진 그녀의 표정은 살짝 일그러져있었다.
“이봐요, 당신. 지금 여기 그려진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예요?”
“아니.”
당연히,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을 이안이 알 리 없다.
이안이 고개를 젓자,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연합 중앙수사국에서도 2년 동안 못 잡고 있는 테러리스트라고요. 지금까지 놈한테 죽고 다친 사람만 천 단위인 악마같은 자식.”
전단 속 사내에 대해 설명하던 여자의 눈에 순간 분노의 빛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이안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생사불문이로군?”
“이미 사형판결이 난 지 오래니까요. 말이 생사불문이지, 그냥 저희 손으로 죽여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말을 마친 여자는 이안을 위아래로 슬쩍 훑어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개척민 같은데, 괜히 목숨 버리지 말고 저한테 넘기시는 게 어때요? 그냥, 저기 옆에 좀도둑들 같은 안전한 거나 노리시죠?”
[카렌 이리드]
[죄목: 절도]
[현상금: 2,000 데나르. 생포]
이안이 뜯어낸 전단지 옆의 현상수배범을 가리킨 그녀의 표정은, 좋게 말해도 비웃고 있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안의 심기가 뒤틀렸다.
“이봐, 하가르라는 놈은 얼마나 강한 거지?”
“그 우주선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오는 놈이요? 제법 상대하기 까다로운 편이긴 하죠. 물론 안드레에 비하면 좀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자식은 왜요? 오늘 잡혀갔다곤 들었는데.”
“그 악어대가리, 내가 잡아 온 놈이거든.”
“네?”
“내가 잡아왔다고.”
순간, 그녀는 말문이 막힌 채 두 눈을 끔뻑였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이안을 위아래로 훑어갔다.
“…몇 명이서?”
“혼자.”
“제법… 하는데요, 겉보기와는 다른 분이었네….”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그녀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혀가 꼬이고, 생각이 뒤엉켰다.
‘하가르를 혼자 잡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복잡하게 꼬인 생각의 실타래를 간신히 풀어나가던 그녀는, 간신히 생각을 정리하고는.
“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안에게 건넸다.
[줄리아 마이그레츠]
[마이그레츠 컨설팅사무소]
정체 모를 금속 소재로 만들어진 얇은 명함.
이안은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금속 특유의 한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명함이잖아요. 당신네 행성계에선 이런 거 안 써요?”
“그걸 묻는 게 아니란 건 너도 알 텐데.”
“당신이야 오늘 처음 왔으니 잘 모르겠지만, 저도 나름 이 바닥에선 좀 굴러먹던 사람이란 의미죠.”
이안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길게 늘어뜨린 흑발을 찰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드레 헤닝. 염동력과 발화력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다중초능력자. 2년 전 초능력자로 이루어진 특수부대, 사이퍼즈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탈영한 뒤 2년 동안 연방 전역에서 가진 초능력을 활용해 테러를 일으킴. 사상자 3,261명에 피해액만 60억 데나르. 완전 미친놈이죠. 최근에는 연방에서도 변경지역인 이곳 성계 근처까지 도망쳐왔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고.”
“정보 제공해 줘서 고맙군. 그래서?”
“난 놈의 위치를 알아요.”
‘거래로군.’
그녀, 줄리아가 무슨 말을 꺼낼지 눈치챈 이안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당신은 나만 따라오면 손쉽게 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챙길 수 있단 소리죠. 물론, 함께 활동한 저랑 나눠야겠지만.”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이제 막 현상금사냥꾼의 삶을 시작한 이안에게, 표적의 능력이나 위치 따위를 알려줄 정보원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 정보원이 전투에 도움이 된다면 금상첨화지.’
등과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달아 둔 병기들이 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녀가 제법 전투준비를 충실히 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정보와 전투력을 모두 가진 파트너라면,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6 대 4. 내가 6.”
만족할만한 조건이 나온다면 말이지만.
“7대 3. 제가 7이에요.”
“별로 구미가 당기지는 않는데.”
말을 마친 이안이 코웃음 치자, 줄리아가 발끈했다.
“그 테러리스트가 숨은 곳을 알고 있는 건 저뿐이라고요. 설마 잊어버린 거예요? 기억력이 그 정도로 나빠 보이진 않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보의 가치란, 가진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충분히 그만한 값어치를 할 게 분명했다.
“어차피, 그쪽도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상대의 제안에 따라줄 생각은 없었지만.
“혼자서 하가르를 잡아 온 건 인정하죠. 그 정도면 이미 어지간한 현상금 사냥꾼의 수준은 넘어섰으니까.”
의외로, 줄리아는 순순히 이안을 인정했다. 이안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 정도 수준의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거든요?”
“그래?”
“그, 그럼요. 저랑 일하는 현상금사냥꾼이 한둘이 아니라고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정보를 풀면 좋다고 달려들 녀석이 한 트럭이라고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이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
이안이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가 눈을 끔뻑였지만, 이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난 저 조건 마음에 안 드니까, 다른 사람 찾아보라고. 자.”
말을 마친 이안은 전단지에서 손을 떼버리고는, 몸을 돌려 게시판의 다른 의뢰를 둘러봤다.
“아.”
그러다가, 이안은 무언가를 깜빡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은 줄리아를 돌아봤다.
“내 우주선, 생각보다 성능이 괜찮거든?”
“네…?”
“탐지 능력도 제법 괜찮아서, 이 근방에서 움직이는 우주선 대부분은 추적이 가능하지. 그중 하나를 따라가는 건 일도 아니고.”
“지금… 무임승차를 하겠다, 그거에요?”
이안이 반쯤 협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줄리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안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아니면, 저 옆에 있는 술집에서 갑자기 소문이 떠돌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러니까, 음. 마이그레츠 사무소에서 30만 데나르짜리 현상범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소문이라거나….”
“자, 잠깐!”
순간, 얼굴이 흙빛이 되어버린 줄리아가 이안의 입을 막았다.
“아, 알았어요. 5 대 5. 됐죠?”
“6 대 4.”
“5.5 대 4.5. 더는 안 돼요. 내가 어떻게 얻은 정보인데.”
“좋아.”
“…젠장, 개척민 출신한테 이렇게까지 뜯길 줄은 몰랐는데.”
빙긋 웃음을 짓는 이안을 향해 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여기서도 네놈의 성격은 변함이 없구나.]
‘칭찬 고마워.’
미미르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댔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 금속구조물과 인공조명들.
새로운 모험이, 동료가,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도… 제법 재밌겠어.’
새로운 모험의 시작을 앞둔 채. 이안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