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여행(2)
미넨이 아슈타르 공작령의 공작대행이라는 자리를 걷어차고 나온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나도, 이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 대가로 자유를 줄 것이다.
이 약속은 다름 아닌 의형제 이안의 제안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기꾼 자식.’
모든 일을 마친 이안이 중간계를 떠나 우주로 날아오른 지도 어언 1년이 지났다.
하지만 미넨은 약속대로 자유를 얻는 대신, 아슈타르 공작령의 공작대행이라는 지위에 얽매여 살아야만 했다.
‘미넨, 이안의 의형제인 당신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어요. 딱 1년만 부탁해요.’
공작령의 2인자인 베티가 자신에게 무릎 꿇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1년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1년이 지난 어느 날.
‘미넨.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딱 1년만 더 이 자리에 앉아줄 수는 없을까요? 부디….’
다음 날, 미넨은 금화 주머니를 들고 아슈타르 성을 뛰쳐나왔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말야. 이만큼 해 줬으면 됐지 뭘 더 해달라고.”
미넨이 지난 일 년간 공작대행으로써 처리해 온 수많은 서류 더미들을 생각하면, 성을 나오면서 챙겨온 금화 주머니 정도는 그냥 성과급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나도 좀 쉬자고, 좀.”
“네?”
“아냐. 길이나 안내해. 네 친구 녀석이나 안 굴러떨어지게 조심하고.”
마차를 끌다 미넨의 혼잣말을 들은 강도. 아니 한스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설명하는 대신 대충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비행기가 다니는 세상에 아직도 마차라니, 확실히 개척이 덜 되긴 했어.’
미넨은 바닥의 굴곡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기적의 서스펜션에 감탄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차가 기관차로, 기관차가 자동차로 변해오는 데 백 년 가까이 걸린 지구와는 그 발전과정이 다르기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중간계에서 기계와 과학이 문명의 일각을 차지하게 된 지는 고작해야 십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부유하거나 지체 높은 사람들은 누구보다 빨리 마법과 기계공학의 융합체인 마공학의 혜택을 빠르게 받아들였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차차 해결될 문제겠지만.’
물론, 미넨은 그 사실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불균형하다고는 하지만, 고작 십 년 만에 이만한 변화를 이뤄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공작대행이란 직함도 버리고 황야로 떠난 자신에겐, 세계니 문명이니 하는 이야기가 별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고.
‘그나마, 지금이라도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 옛날 같았으면 발을 디디자마자 썩어 문드러졌을 텐데.’
십 년 동안 수많은 신관과 재화를 퍼부었음에도 마기를 완전히 정화시킬수는 없었는지, 여전히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사막 꼴이 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과거 마왕성이 있던 자리는 여전히 페르소나의 보호 없이는 진입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 아직 갈 길이 먼 땅이긴 했다.
거기에, 아주 극소수나마 숨어다니며 사람들을 노리는 괴수와 마수들까지.
최근 마경의 몇몇 곳에서 난쟁이들이 금광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여전히 버려진 땅으로 남아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여행하는 맛이 있는 거지만.’
그것이, 미넨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야말로, 과거 미국의 대서부시대에서나 볼 법한 무법과 낭만의 땅이지 않던가.
“그래봐야 이안 그놈만은 못하겠지만.”
망할 자식. 데려갈 거면 나도 좀 데려갈 것이지.
지금쯤 저 넓은 우주 어딘가에서 신나는 모험을 즐기고 있을 이안을 상상하니, 미넨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아냐. 마키나도 그렇고, 이안이 남기고 간 건 그대로 있으니까, 여기도 한 20년 뒤면 우주 밖으로 떠날만한 기술이 갖춰져 있지 않을까…?”
물론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는, 기약 없는 일이었다.
중간계의 사람들은 당장 마경과 같은 버려진 땅이나 신대륙을 탐험하고 개발하는 데만 해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물론 이안이 우주 밖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중간계의 사람들도 우주에 관심을 보이겠지만, 이 사실은 대륙의 최고위층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다.
‘그때가 되려면… 못해도 백 년은 잡아야 할 것 같은데. 나도 지금부터 오러마스터나 해 봐?’
이런저런 잡생각들을 떠올리며 미넨이 헛웃음을 짓고 있던 그때.
“저… 미넨님?”
“어, 왜?”
“그… 도착했습니다.”
“벌써?”
마차를 세운 한스의 말을 듣자마자, 미넨은 곧장 마차 문을 열어젖히고 튀어나왔다.
“저기, 저기입니다. 저희 갱단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죠.”
갑자기 미넨이 마차 밖으로 튀어나오자, 한스는 약간 겁에 질린 표정으로 황야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지만.
“…지금 장난하냐?”
미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스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에 있는 것이라곤, 한때 마경의 마기를 빨아먹던 식물들의 말라비틀어진 시체들 뿐이었으니까.
갱단 본거지의 입구처럼 보이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 미넨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누,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마법으로 숨겨져 있으니까요.”
“마법? 요즘 갱단은 마법도 쓰나 보지?”
규모가 커 갱단이라고 불러주기는 하지만, 실상은 상단의 앞길을 막고 통행료를 받던 도적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콧대 높은 마법사들이 도적질 따위나 한다고? 푼돈 좀 벌자고?’
마법사들이 어떤 작자들인지 경험으로 잘아는 미넨은 한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시겠지만, 요즘 마법사들의 벌이가 예전 같지 않잖습니까. 난쟁이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이상한 물건들이 마법물품을 밀어내니, 그 고고한 마법사님들이라도 별수 없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마법사들이 돈을 좀 많이 쓴답니까?”
말을 마친 한스가 저도 모르게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본 미넨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말은, 너희 갱단이 제법 수입이 된다는 말이로군? 마법사 한 둘 정도는 쉽게 고용할 정도로 말이지.”
“두목이 나름의 사업수완이 있는 덕분이었습죠. 마법사님들과 같이 일할 만한 인맥도 있었고요.”
“…그래?”
그 말에, 미넨은 눈을 빛냈다.
마법사와 연줄이 있는 자라면, 평범한 범죄자는 아닐 터.
그렇다면….
‘뜯어먹을 게 제법 되겠는데?’
“이쪽으로 오십쇼. 마법을 해제하고 나면 출구가 보일 겁니다.”
한스의 안내에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대강의 계획을 세워놓은 미넨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고.
“그런데, 저기 묶어놓은 네 친구는 어쩌고? 여기 햇빛이 제법 따가운 거 같은데.”
“친구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운이 좋으면 살겠죠, 뭐.”
그렇게, 마차에 묶여져 있던 강도의 운명도 정해져버렸다.
***
라이온 갱단을 이끄는 두목, 마이클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그거,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소파에 기대어 있던 마이클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로브 쓴 사내에게로 향했다.
“이걸 보십시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주먹만 한 구슬을 마이클에게 보여주었다. 곧, 주먹만 한 구슬 위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오….”
구슬 위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확인한 마이클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영상에 나타난 것은, 불길한 보랏빛을 가득 머금은 바위가 지면에 반쯤 박혀있는 모습.
‘마석, 그것도 최소한 후작급이야.’
꿀꺽.
마석의 영롱한 자태를 멍하니 바라보던 마이클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석은 예로부터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물건이다.
마석에 담긴 것이 다루기 극히 위험한 마기이기는 하지만, 잘 가공하기만 한다면 막대한 마력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마족이 사라진 지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에 와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만큼 귀한 물건.
“요즘 시대에 이 정도 크기의 마석을 발견하다니, 대체 어디서 발견한 겁니까?”
말 그대로, 대어를 물고 온 마법사에 대한 태도도 정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마법사가 갱단이 벌어들이는 수입의 20%를 가져가는 돈 먹는 하마라 할지라도, 이만한 건수를 물어왔다면 밥값 이상은 해 준 셈이 아닌가.
분위기 변화를 눈치챈 듯, 마법사는 턱을 슬쩍 치켜들며 수염을 쓸어넘겼다.
“아직 정화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서부 끝자락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지요. 과거엔 마왕의 성이 있었던 곳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만한 크기의 마석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렇군요. 역시 마법사님과 손을 잡은 건 제 평생의 행운인 것 같습니다! 크하하!”
마법사의 말을 들은 마이클은 광소를 터뜨렸다.
‘저 마석을 처분한다면, 서부의 다른 갱단들을 무릎 꿇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지.’
지금은 그저 황무지일 뿐이지만, 이 황량한 땅에도 언젠가는 사람과 도시로 가득 들어차게 되리라.
그때, 거대한 서부의 뒷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 될 것이다.
두목의 눈앞에, 자신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수많은 조직원들이 아른거렸다.
“크흠, 그, 마석을 처분하게 된다면, 제 몫도 당연히 처리해 주는 것이겠지요?”
“그럼, 물론입니다. 이 모든 게 마법사님의 덕이니, 대가는 확실하게 지급해야죠. 깔끔하게 세탁해서, 탈 날일 없게 처리해 놓겠습니다.”
그제야 마법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재수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의도치 않게 큰돈을 만지게 된 마이클은 그조차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콰아앙!
“…뭐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군요. 제가 처리하고 오지요.”
“아, 그래 주신다면 정말 고맙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법사는 두목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인 다음, 자기 키만 한 지팡이를 쥔 채 문밖으로 나갔다.
곧, 홀로 남게 된 마이클은 코웃음을 쳤다.
“어떤 미친놈이 환영마법을 뚫고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살기 싫은 녀석인가 보군.”
본거지를 지키는 자신의 부하들만 약 백 명.
거기에, 방금 나간 마법사는 5급의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고위마법사가 아니던가.
‘곧 끌려와서는 살려달라고 빌고 있겠지.’
물론, 살려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감히 자신들의 본거지를 침입한 녀석에게 보여줄 자비 따위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쾅!
두목의 방과 바깥을 나누는 나무 문이 굉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상상도 못 한 일.
“이런 미친놈이…!”
하지만 황무지에서 꽤 오래 굴러먹어 온 보스의 판단은 재빨랐다.
그의 품속에 숨겨져 있던 다섯 개의 투검이 문을 박살을 내버린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푸푸푹! 털썩!
곧, 투검이 살가죽을 뚫어내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문 앞에 서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짜식, 여기까지 온 건 칭찬하겠다만….”
적을 확실하게 무력화했으리라고 생각한 보스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칭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쓰러진 누군가의 뒤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순간, 마이클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투검을 맞고 쓰러진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마… 마법사님…?”
자신의 투검을 온몸으로 받아낸 것이 조금 전 문밖으로 나간 5급 마법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꿀꺽
침을 삼킨 마이클의 목울대가 꿀렁댔다.
“야.”
공포에 질린 라이온갱단의 두목을 향해, 미넨은 짧게 말했다.
“너희 갱단, 라이온이더라?”
“네, 네?”
“내가 아슈타르 사람인데, 너희 갱단 좀 내가 가져도 되지? 혼자 여행하려니까 심심하더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지만 마이클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기엔, 상대의 왼쪽 가슴에 달린 사자의 문양이 너무나 선명했으니까.
‘아, 아슈타르가 여긴 왜…!’
그저, 자신의 불운함을 탓할 수밖에.
“무,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속으로 눈물을 머금은 채, 마이클은 미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젠장, 이안처럼 깽판은 안 치려고 했는데, 쩝.’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신거리는 두목을 보며, 미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막 나가는 형제, 이안을 추억하고 있던 그 순간.
[우주선을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걸?]
“…뭐야, 저 악어대가리는?”
우주를 떠돌던 이안은 처음 마주친 외계생명체, 악어인간의 우주선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