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220화 (221/224)

#외전 12화. 여행(1)

“크, 좋구만.”

사과나무 언덕 아래, 금발머리의 사내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의 옷차림은 요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깔끔하고 곧은 라인의 무채색 수트가 아닌 십 년 전의 귀족들이나 입을법한 레이스와 장식이 주렁주렁 붙어 있는 셔츠.

그리고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치장된 나팔바지와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챙을 가진 밀짚모자까지.

아스텔리아의 패션을 선도하는 제국의 디자이너들이 사내의 옷차림을 봤다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뽑아버렸을 게 분명했다.

“좋아, 좋아….”

하지만, 이미 알코올이 주는 취기에 몸을 흠뻑 적신 사내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퍽!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가 그의 머리를 정확히 맞췄음에도, 사내는 실실 웃고는 아무렇지 않게 술병을 기울였다.

술병을 기울이다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다가.

또 술병을 기울이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길 수차례.

그의 눈에, 어느샌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과 그 뒤로 어렴풋이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순간.

“…이안.”

미넨 아슈타르.

아슈타르 공작령 전 공작대행의 입에서, 먼 길을 떠난 의형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먼 길을 떠났다는 말이 죽음을 은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의 의형제이자 본체는 중간계라 불리는 이 행성을 떠나 얼마나 먼 곳에 있을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중이었으니까.

“짜식, 살아는 있는지 모르겠네.”

어쩌면, 저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별들 중 하나가 녀석일지도 모르지.

아삭

미넨은 조금 전 머리를 강타한 사과를 안주 삼아 한 입 베어 물었다.

풋사과의 찌르는듯한 산미를 씻으려 술 한 모금. 씁쓸한 알코올 향을 누르려 사과 한 입.

병에 반쯤 남아 있던 난쟁이제 보리위스키가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야, 비었잖아?”

술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미넨은 엄지를 세운 채 웃고 있는 난쟁이 그림이 새겨진 술병과 반쯤 베어먹은 사과를 바닥에 대충 집어 던지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왕토벌자 이안의 육체를 그대로 복제했기 때문일까.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얼굴이 벌게지긴 했지만,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는 미넨의 걸음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곧, 미넨은 언덕 아래 마을에 위치한 여관에 도착했다.

[서부해안 최초의 여관, 바닷 노을]

“강줄기도 없는데 바닷 노을은 무슨.”

잠시, 반만 드러난 태양이 그려진 간판을 바라보던 미넨은 코웃음 치며 문을 밀었다.

술 냄새와 구운 고기 냄새,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또 술이야? 하여튼, 작작 쳐마시라니깐.”

옛 방식 그대로 거대한 솥에 담긴 수프를 젓던 여관주인이 혀를 차며 미넨을 반겼다.

“거, 술을 마셨으면 얼마나 마셨다고.”

“요 앞에서 위스키 세 병 사 간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니 살 거면 우리 여관에서 사 가면 될 것이지….”

“모르겠고, 그 수프나 하나 방으로 좀 갖다 줘요. 먹고 한숨 자야겠으니까.”

여관주인의 태도는 사흘 전에 처음 만난 사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친근했지만, 미넨은 대강 대꾸한 다음 금화 하나를 여관주인에게 튕겨주었다.

“아, 아이쿠!”

번쩍이는 황금빛에 눈이 돌아간 여관주인을 뒤로한 채 미넨이 올라선 곳은, 방으로 향하는 2층의 계단.

“거 참, 청소나 좀 할 것이지.”

방문을 연 미넨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방에 있는 가구라곤 천이 누렇게 뜬 침대 하나와 옷걸이 하나, 나무판을 뜯어 만든 것 같은 탁자 하나와 나무로 만든 양동이 하나가 전부. 그나마도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먼지가 한가득하다.

한 때나마 아슈타르 공작령의 모든 것을 관할했던 사람이 묵을 숙소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허름한 모습.

하지만 미넨은 인상을 살짝 쓸 뿐, 아무렇지 않게 얼룩진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내일은 슬슬 떠나야겠어. 시작부터 너무 오래 머물면 곤란하지.”

돌처럼 딱딱한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미넨은 아슈타르를 떠나기 전 세워둔 여행계획을 잠시 점검했다.

오랜만. 아니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여행인지라 첫날부터 뭉그적거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딱히 정해진 것도 없는 여행이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돈이 좀 나가긴 했지만, 성의 금고에서 한 주먹 퍼왔으니 모자랄 일도 없고.’

아마 이 사실을 베티가 알게 된다면 칼을 들고 쫓아올 게 분명한 일이었지만, 드넓은 서부 어디에 미넨이 있을 줄 알고서 찾아오겠는가.

“좋아. 그럼 내일 해 뜨는 대로 떠나야지.”

미넨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미넨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저녁 식사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똑똑

“들어와요. 문은 열려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저녁 식사를 가져온 종업원의 노크라 생각한 미넨은 별 의심 없이 침대 위에서 소리쳤다.

끼익

하지만, 문 뒤에서 등장한 것은 종업원이 아니었다.

“…이것 봐라?”

얼굴에는 눈구멍 두 개가 뚫린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손엔 몽둥이와 칼을 쥔 사내 둘.

“아니, 어떻게 대놓고 들어온 거야?”

지금은 저녁 시간.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도 않은 시간이다.

누가 봐도 강도처럼 생긴 사람들이 한밤중이나 새벽도 아닌 지금 안으로 들어오다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미넨은 고개를 갸웃하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강도들을 바라봤다.

“입 안 닥쳐?”

물론, 돌아온 것은 강도들의 쌍소리였지만.

“살고 싶으면 그 돈주머니를 내놔. 허튼짓하면 바로 뒈질 줄 알아.”

칼을 든 강도가 낮은 목소리로 미넨의 허리춤에 찬 돈주머니를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았다.

왼손으로 자기 목을 베는 제스쳐를 취한 강도의 눈에서 탐욕스러운 눈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거?”

툭 툭

하지만 미넨은 서슬 퍼런 칼날을 앞에 두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곧, 그는 허리춤에 매어둔 돈주머니를 풀고는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다.

“허튼짓 하지 말라고…!”

칼을 들이밀었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미넨을 보며 강도들은 내심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가득 찬 욕심은 돈주머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상대는 맨손인 데다 혼자야. 딱 봐도 어디서 굴러먹다 온 귀족 아들래미 같은 녀석이 우릴 어쩌겠어?’

욕심은 용기를 만들었고, 용기를 얻은 강도들은 왠지 모르게 움츠러드는 자신을 달랬다.

“자, 받아.”

미넨이 손에 쥔 돈주머니를 앞으로 집어 던지기 전까지는.

퍽!

무거운 금화로 가득 찬 돈주머니는 흉기나 다름없다.

강도들이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기사가 아닌 이상에야, 가죽으로 싼 금덩이를 얼굴에 정면으로 맞고도 멀쩡할 리 없지 않은가.

“어억…!”

“이 자식이!”

주머니를 맞은 강도가 손에 쥔 칼을 놓치며 쓰러지자 옆에 있던 강도가 누워있던 미넨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미넨은 바닥으로 몸을 굴려 몽둥이를 가볍게 피하고는, 빈틈 투성이인 강도의 뒷무릎을 앞발로 찍어눌렀다.

“끄윽…!”

제압당한 강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고통스러운 비명뿐.

“참, 겁도 없지. 나 같으면 분위기 파악했을 때 바로 나갔겠다.”

순식간에 두 강도를 전투 불능에 빠트린 미넨은 강도의 얼굴에 처박혀있던 돈주머니를 회수하곤 혀를 끌끌 찼다.

어느새, 미넨의 오른손엔 강도가 들고 있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미넨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끄으으….”

“그래, 누가 보냈냐?”

“끄으으… 그게… 무슨….”

미넨의 입에서 나온 뚱딴지같은 소리에, 무릎이 반쯤 꺾인 채 신음하던 강도가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향해 미넨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아슈타르의 공작대행이었던 나를 공격한 게 우연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아, 아슈타르?”

미넨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강도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슈타르.

아스텔리아의 2대 강국 중 하나인 연합공국을 구성하는 일곱 공작가 중 하나이자, 가장 강력한 가문의 이름.

거기다, 십 년 전 신계의 만신들과 싸워 이긴 마왕토벌자 이안이 있던 가문이지 않은가.

아무리 서부 촌구석에서 강도질이나 하고 있는 인생이라지만, 아스텔리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손색이 없는 가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다.

“오, 오해입니다. 배후, 배후 같은 건 없습니다. 정말이라고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강도의 눈을 가득 채웠던 탐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공포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하지만 미넨은 덜덜 떠는 강도를 향해 고개를 젓고는 입술을 비틀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누군가의 사주도 받지 않고 벌건 대낮에 강도질을 한다? 네가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 그건 그냥….”

“잘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인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기억력이 좋아지는 마법을 몇 개 알고 있으니까 말야.”

말을 마친 미넨의 단도가 번쩍, 하고 빛났다.

순간, 강도는 먼저 기절한 동료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미넨이 직접 고문을 가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미넨이 무언가 손을 쓰기도 전, 공포에 질려버린 강도는 자신이 아는 것, 모르는 것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대답했다.

그리고.

“…진짜 있다고?”

강도의 대답을 들은 미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도는 미넨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저희 갱단의 두목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저는 그저 시켜서 한 죄밖에 없습니다!”

“…허.”

심심한데 시간이나 때울까 해서 으름장이나 한번 놓아봤던 미넨에겐 뜻하지 않게 일이 생겨버린 셈이었다.

“너희 갱단의 두목이 누군데?”

“블랙라이온 마고스입니다. 저희 라이온 갱단을 이끄는 자인데…….”

“라이온…?”

“네?”

“너희 갱단 이름이, 라이온이라고?”

“네, 그렇습니다만…….”

갱단의 이름 따위가 대체 왜 중요하단 말인가.

갑자기 끼어든 미넨의 질문에, 강도는 의아해하면서도 선선히 답해 주었다.

“라이온… 라이온이란 말이지.”

강도의 말을 듣고, 미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너희 본거지로 안내해.”

“…네?”

“왜, 싫어? 칼날 맛 좀 볼래?”

“아, 아닙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서슬 퍼런 칼날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강도를 보며, 미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