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씨앗(10)
통칭 신마대전이라 불리는 대전쟁의 서막이 오른 지도 어느덧 다섯 해가 지났다.
아스텔리아 대륙을 양분한 마경과 인계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맞서 싸운 전쟁에서, 인계의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요정족을 포함해 인계 전체에서 모여든 여섯 영웅과 제국의 최정예 전력이 마경과의 경계에서 쉴 새 없이 피를 흘렸지만, 마족들의 기세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마경을 지배하는 마왕 중 하나가 2년 전 인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인계는 채 5년도 버티지 못하고 마족들의 공세 앞에 무너져내렸으리라.
마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사로 손꼽히는 디아블로의 배신 덕분에 마경과 인계의 힘은 균형을 이루었고, 그 균형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유지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이제 끝났군.”
아슈타르 공작령이라 불리는 마르센 제국의 변경.
그중에서도 가장 외딴곳에 자리 잡은 섬, 리아나.
수많은 소용돌이가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은 고립된 섬에서, 한 사내가 자신의 앞에 세워진 석조건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뒤틀려있었다. 입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 한켠에 담긴 분노는 사내의 감정이 어떤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페르소나라…. 이름은 나쁘지 않아.”
사내, 레온은 자신이 만들어낸 최후의 역작을 바라보았다.
연인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손이 마족의 피로 더럽혀진 그 날, 레온은 귀환을 포기했다.
귀환에 대한 열망 대신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운 것은 마족에 대한 복수뿐.
‘벌써 5년이나 지났나.’
5년 동안, 레온은 마법의 신 갈리우스와 손을 잡고 신마전쟁에 끼어들었다.
연합의 표준규격 AI 세이렌이 가진 연합의 기술과 갈리우스의 마법지식을 빌릴 수 있었던 레온은 그동안 중간계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병기들을 차례로 내놓았다.
마법의 힘으로 비행하는 전함이 마력포로 마족의 머리통을 꿰뚫었고, 옛 거인족을 흉내 낸 거대한 강철갑주가 휘두른 검이 마수들을 두 동강 냈다.
마력을 동력으로 한 기계병기들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음에도 마족들이 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을 저지하기에는 충분했다.
행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켓은 마력으로 작동하는 인공위성을 하늘에 올렸다.
그리고 탈출 수단을 만들던 레온의 거주지는 이제 마키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온갖 마법병기들을 생산해냈다.
물론 레온이 소속된 인류연합법에 따르면 이는 중범죄였지만, 그가 연합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뒤로 인류연합의 법 따위는 그를 구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제작자란 별명을 얻은 레온은 마족을 대륙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는 병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거라면, 충분히 놈들을 끝장낼 수 있어.’
베가본드호에 설치되어 있던 물질융합기와 마법의 신이 전수한 수많은 마법의 결합체.
거울마법에 의해 복제된 소형 물질융합기는 사용자와 교류하면서 사용자가 상상하는 형태의 병기를 현실에 구현해낼 것이다.
설사 그게 전설이나 신화 속에나 나오는 무기라 할지라도.
신화와 전설, 상상의 힘을 사용하는 무기를 마족 따위가 감히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다.
‘신시아, 조금만 기다려 줘.’
복수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레온은 굳은 표정으로 5년 전의 다짐을 되새겼다. 곧,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프레이야.”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대 북유럽신화의 여신 중 하나의 이름.
파아앗-!
그와 동시에, 자신이 구현의 방이라 이름 붙인 시스템의 출입구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입구를 막고 있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림과 동시에, 레온의 눈을 부시게 만들던 빛이 사람의 형태를 이루어나갔다.
정령사들이 부리는 정령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레온이 마력으로 육체를 만들고 세이렌이 인공지능을 심어놓은 인공정령이란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곧, 하얀빛으로 이루어진 나신의 여인이 레온 앞에 눈을 떴다.
[시스템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제작자님.]
프레이야라 이름 붙여진 시스템의 제어 정령이 레온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레온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을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작자는 무슨. 아버지라고 불러.”
[네, 아버지.]
그 말에, 프레이야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하지만 레온이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할 일이 나타났다.
‘이건….’
복수할 준비를 끝마친 레온의 앞에 나타난 것은, 연인이었던 신시아가 그에게 넘겨준 예언의 힘이었다.
단순히 미래를 보여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수많은 화면들의 연속이었다.
마치 CCTV실의 모니터들처럼 서로 다른 시간대와 장소를 비추어주는 화면들이 가진 의미를 차근차근 읽어나가던 레온은, 곧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곧, 죽겠군.’
그것도, 마족이 아니라 신들에게 배반당하고 죽을 운명.
‘설마, 신과 마왕이 서로의 멸망을 원하지 않을 줄이야.’
레온은 혹시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싶어 수많은 화면들을 일일이 확인했지만, 그의 미래를 비춰주는 화면 어디에도 배신당하지 않는 결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복수가 머지않았는데.’
자신의 죽음과 복수의 실패.
두 가지가 바뀔 수 없는 필연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레온은 절망에 빠졌다.
미래를 엿본다고 한들, 미래를 바꿀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 같아서는 신과 마왕 모두를 이 세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가 가진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꿈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모든 것을 포기한 레온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체념하던 순간.
팟!
그를 둘러싼 수많은 화면이, 일제히 다른 것을 비추기 시작했다.
절망에 빠진 레온의 시선이 수많은 모니터 중 하나로 향했다.
‘이건….’
곧.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화면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다름 아닌 한 사내였다.
‘이건… 고대 지구를 닮은 것 같은데.’
고대의 지구에서 쓰인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의 지하에서, 한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광경.
어째서 예언이 고대의 지구를 보여주는 것인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쓰러진 사내를 비추던 곧 화면은 다른 곳을 보여주었다.
‘아슈타르… 인가?’
아슈타르 공작가의 사자문장을 코트에 새긴 사내.
외모도 나이도 완전히 달랐지만, 레온은 이 사내가 조금 전 지구에서 쓰러진 사내란 사실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수많은 적과 싸우고 있었다.
적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인간부터 괴수와 마수, 마족과 강철의 거인들.
오러마스터인 현 아슈타르 공작과 달리 사내가 사용하는 것은 고대 지구에서나 사용했을 법한 화약병기들이란 게 조금 이상했지만, 중요하진 않았다.
‘신….’
이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신과 마주 본 채 무기를 겨누는 장면을 본 순간.
‘이건, 언젠가 있을 미래다.’
레온은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래를 비추는 모든 화면이 그가 신들과 대적할 거란 사실을 가리키고 있어. 그렇다면….’
준비해야 한다.
결단을 내린 레온의 시선이, 이름모를 신을 향해 당당하게 무기를 겨눈 사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레온이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기로 결심한 이후,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시스템과 거주지를 유지해야 해.’
미래의 사내가 기계병기를 이용해 신과 대적하는 것을 확인한 레온에게, 그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시스템은 페르소나를 수여 받은 사내에게 힘을 줄 것이며, 거주지는 사내가 부리는 기계들을 유지보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이를 위해, 레온은 시스템에 자신과 비슷한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관리자의 권한을 새롭게 집어넣었다.
마키나라 이름 붙여진 다른 대륙의 임시거주지는 앞으로 수백 년, 길면 천 년까지도 버틸 수 있도록 완전히 뜯어고쳐졌다.
신과 마족을 이 행성에서 몰아내겠다는 그의 뜻을 후대에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인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포섭해 조직을 구성했다.
아스텔리아가 익숙하지 않을 사내를 위해 지침이 담긴 책을 만들어 영원한 삶을 누리는 용족에게 맡겼고, 그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인류연합의 각종 지식을 지하의 데이터저장소 안에 담았다.
레온이 계획한 모든 안배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네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사실을 이해해다오.]
레온에게 끝이 도래했다.
어느 날 정신세계 안에서 깨어난 그를 맞이한 것은, 두 명의 신이었다.
“마르콘과 갈리우스라. 인간 하나를 상대하기엔 너무 거창한 조합인데.”
보기만 해도 전해지는 위압감에 레온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레온은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부러 정신세계까지 들어온 걸 보니, 부끄러운 줄은 아나 보네? 하긴, 인계의 영웅을 신들이 죽이려 한다니, 부끄러울 일이긴 하지.”
건방진 표정으로 레온이 이죽이자, 빛의 신과 마법의 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레온에겐 여유가 없었다.
‘나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어.’
저들이 신이 아닌 신이라 사칭하는 사기꾼이긴 하지만, 인계의 주민들이 정보생명체인 그들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앙은 놈들에게 신적인 힘을 안겨주고 있었다.
결국, 레온은 예언대로 이 자리에서 신들에게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다.
“겁쟁이 같으니.”
하지만 그는 일부러 허세를 부렸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복수를 방해한 자들에게 굽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겠군.]
[건방진 인간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 주마.]
레온의 말이 두 신을 자극했는지, 말을 마친 갈리우스와 마르콘이 자신들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죽는다.’
전 대륙인의 의지가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힘 앞에서, 레온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어.’
마키나는 그가 관리를 맡긴 세이렌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다.
일곱 용이라 이름 붙여진 자신의 조직은 인계의 지하에 숨어 영웅이 나타날 때를 기다릴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의 손을 떠났으니,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보고 싶은걸.’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 레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