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씨앗(6)
3개월이 지났다.
처음 레온의 예상과는 달리, 그에게 충성맹세를 받은 비르켄은 레온에게 딱히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영지민이 될 개척민들을 문제없이 통솔만 한다면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온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함장님, 세 명의 개척민이 수상한 동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의 AI인 세이렌이었지만.
‘그래?’
[감시드론을 이용한 감청 결과입니다.]
보고를 확인한 레온이 되묻자, 세이렌은 대답과 함께 녹음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창고 열쇠는 챙겼나?
-물론. 결행은 내일이겠지?
-이미 뜻이 맞는 친구들 몇을 모아놨으니, 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을 게야. 나눠줄 몫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명색이 공작 전하씩이나 되는 귀족의 창고를 앞에 두고 그렇게 쪼잔하게 굴 필욘 없잖아? 창고 안에 든 보물을 털어내기만 하면…….
‘더 들을 필요도 없겠네.’
녹음한 내용을 듣다 말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은 레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통의 제국민이라면 공작씩이나 되는 대귀족의 창고를 턴다는 발상은 시작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맡은 개척민들은 보통의 제국민이 아니다.
개중의 절반 이상은 언제든 마족이 되거나 마족에게 죽임당할 위험을 감수한 도망자들.
그가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일어난 온갖 음모와 모략에 비하면, 창고 도둑쯤은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부탁할게, 세이렌.’
[자경단에 지시하겠습니다.]
세이렌의 대답을 들은 레온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사실, 이 시점에서 레온이 직접 지시해야 할 일은 없었다.
거주지에서 공수해 온 드론을 보내 용의자들의 인상착의를 전달하고 나면, 나머지는 그녀가 직접 선발한 자경단원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세이렌이 부리는 드론을 마법의 일종으로 해석한 비르켄과 영지민들 덕분에, 레온은 거리낌 없이 드론을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제 진짜 마법을 배워야 할 시간이지만.’
생각을 마친 레온의 시선이 탁자 건너편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수업하다 말고 딴생각하는 거야, 지금?”
“영지에 일이 생겨서요. 저도 여기서 먹고 살려면 업무는 처리해야죠.”
“아, 그 정령?”
“세이렌이 어지간한 일은 다 해결해 주긴 하지만, 그래도 명령을 내리는 건 저니까요.”
레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뭐… 그렇다면.”
그의 뻔뻔한 표정을 앞에 둔 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지난 3개월 동안, 영지의 개척민들을 관리하는 자리에 앉은 레온이 막아낸 폭동과 반란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내 시간이야. 남의 귀한 시간을 뺏어 쓴다는 자각 정도는 가지고 있지 그래?”
“저만큼 훌륭한 학생이 또 어디 있다고.”
“수업 시간에 딴생각하는?”
“그래도, 이제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화륵!
말을 마친 레온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는 9급의 마법 중에서도, 견습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화염계마법.
하지만.
‘고작 3개월 만에 불꽃을 피워낼 수 있다니…….’
순간, 신시아는 레온의 손 위에서 타오르는 마법의 불꽃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에 입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년.
마법의 천재라 불리는 자라도 마법에 입문하는 데 못해도 6개월은 필요하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레온이 이뤄낸 성취는 문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견습마법 하나 배운 것 가지고 자꾸 유세 부릴래? 앞으로 배워야 할 게 얼만데…….”
하지만 벌써부터 제자에게 기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신시아는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고는 코웃음 쳤다.
“뭐, 그렇긴 하죠.”
레온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법을 배우는 목적은, 고작 담뱃불이나 당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마법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고, 겸사겸사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방호복이 있기는 하지만, 만약을 대비하긴 해야 하니까.’
모종의 이유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될 때, 마법은 레온의 몸을 지킬 유일한 수단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럼, 선생님? 오늘 배울 마법은 뭡니까?”
신시아를 향한 레온의 눈빛은 마법에 대한 갈망으로 반짝였다.
조금 전과는 너무도 다른, 누구보다도 진지한 학생의 모습을 마주한 신시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그 부담스러운 눈 좀 치워줄래?”
“네.”
“이제 화염속성을 다룰 수 있게 됐으니, 다음은 빙결속성이야. 빙결속성은…….”
곧, 신시아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장난스러웠던 레온의 눈빛이 진지한 학생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아슈타르 공작령.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명예나 위엄에 비해, 공작령이라 이름 붙여진 대지의 가치는 대단치 않았다.
대지의 삼분지 이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거대한 숲이었고, 나머지 삼분지 일은 평야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자갈투성이의 황무지.
거기에, 마기의 영향을 받은 숲의 안쪽에는 이름조차 정확히 지어지지 않은 수많은 종류의 마수들이 저마다의 영역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숲의 원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마수들이 새롭게 등장한 불청객인 인간에게 호의적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대륙의 절반을 손아귀에 쥔 마르센 제국이 마족과의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전쟁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이 황무지를 사람 사는 곳으로, 나아가 마족을 막아낼 거대한 요새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이만하면 사람이 살 정도는 되겠어. 그렇지 않나?”
그 황무지의 주인들 중 하나, 비르켄 폰 아슈타르 공작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군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간 레온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레온이 바라보는 방향에 펼쳐진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성벽이었다.
회색빛을 띤 바위가 겹겹이 쌓인 석벽이 지평선 대신 하늘과 땅을 나누고 있었다.
그 아래로, 제각기 다른 형태를 갖춘 건물들이 도로와 함께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는 성내의 건물들을 내성의 첨탑 위에서 처음으로 내려다보며, 레온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고작 일 년 만에 만들어진 거라니.’
일 년.
레온이 아슈타르의 땅에 들어선지 무려 일 년 만이었다.
아슈타르는 이 거대한 황무지에 조그맣게나마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부랑자나 범죄자들을 부려서.
물론, 이 업적을 이뤄낸 공이 온전히 비르켄의 것만은 아니었다.
“자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보다 배는 걸렸을 일이야. 첨탑에 올라 도시를 내려볼 때마다, 자네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다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저는 역할에 충실했을 뿐입니다만.”
비르켄의 입발림 소리가 영 적응되지 않는지, 레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과 처음 마주쳤을 때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 격세지감까지 느껴질 정도.
요즘 들어 부쩍 자신과 친한 척을 하는 것이 레온은 영 거북했다.
곧, 레온의 표정을 읽은 공작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직은 성벽뿐이지만, 곧 성벽에 온갖 방어용 마법들을 부여하게 될 거야. 마족녀석들이 저 성벽을 넘고자 한다면, 한두 목숨 바치는 것 정도론 턱없이 부족하겠지.”
비르켄은 성벽 위아래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기쁨과 자긍심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제서야, 우리는 마족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요새를 하나 얻은 셈이지. 다른 용사들도 곧 저마다의 요새를 세우겠지만 말이야.”
“그러면, 당분간 마족들이 침략할 걱정은 덜었군요.”
레온에겐 정말이지 다행인 일이었다.
비르켄의 말은 곧, 레온이 할 일이 전보다 줄어들었다는 이야기와 같았으니까.
‘거기다, 행성을 탈출할 수단 역시 완성되었고.’
얼마 전, 세이렌은 이 행성에 불시착할 때부터 준비하던 프로젝트를 마쳤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언제든지 이 행성을 떠날 준비를 마친 순간부터, 레온의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물론, 당분간은 여기 있어야겠지만.’
처음과는 조금 계획이 달라졌지만, 레온이 불시착한 이 행성은 그토록 바랐던 귀환을 늦추고도 남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인류와 지적생명체들, 그리고 초능력까지.’
박사학위를 눈앞에 둔 레온의 눈에, 이곳은 그야말로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원래 전공과 조금 다른 분야이기는 했지만, 뭐 어떤가.
남는 시간을 활용해 제국의 수도에서 역사책 몇 권만 구한다면, 그깟 학위 논문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학계에 내 이름을 남긴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레온의 두 뺨이 저도 모르게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레온의 행복한 상상은 첨탑을 내려와 내성의 문을 나설 때 즈음 막을 내렸다.
“여기 있었구나, 레온.”
“신시아?”
성문의 아치를 통과한 레온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금발머리 여성을 보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던 남녀가 사랑에 빠지기에 반년은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
퇴근길에 연인을 마주친 레온의 마음이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신시아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레온은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레온의 물음에 신시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온, 잠깐 시간 있어?”
대답 대신 평소라면 물어보지도 않을 것을 질문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는 걸 직감한 레온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있으면 말만 해. 지금의 나라면 어지간한 건 처리할 수 있으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레온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옆 대륙의 거주지는 이미 완성단계에 도달해있다.
자원의 채굴부터 가공과 조립까지 모든 과정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는 거주지의 시스템을 활용한다면, 강철의 군대를 만들어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다.
수백 광년 떨어진 연방의 법과 학자로써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았을 뿐.
레온은 원한다면 우주 진출조차 하지 못한 인류와 아인종으로 가득한 이 대륙을 얼마든지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연인의 불편함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결할 능력이 있었다.
레온의 호언장담에 담긴 진심을 느낀 신시아는 저도 모르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얼굴을 굳히고는 감정을 절제했다.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자신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곧, 신시아의 입이 열렸다.
“마법의 신이, 당신을 찾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