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씨앗(5)
“뭐야, 네가 여긴 어떻게….”
아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일까.
용병들을 마주한 신시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자연히, 그녀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레온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신시아.”
자연스럽게 마법사의 이름을 꺼낸 금발머리 사내는 레온과 신시아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너랑 저 불청객이, 우리 가문의 숲에 들어와 있는 거지?”
“너희 가문의… 숲?”
그 말에 신시아는 순간 말문이 닫혀버렸다. 그녀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어, 음, 그럼 여기가… 마경의 경계가 아니란 거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마음이 조금 진정된 신시아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지금껏 마족들을 두려워 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럽기는 했다.
하지만 이곳이 마경과의 접경지대가 아니라면, 자신들의 안전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신시아의 말을 들은 비르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경의 경계는 맞지.”
“뭐?”
“우리 가문의 영지가 마경 바로 앞에 붙어 있으니까. 빌어먹을 황제 같으니. 카악, 퉷.”
말을 마친 비르켄은 욕지거리와 함께 땅바닥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어냈다.
“어….”
“음….”
땅바닥에 달라붙은 침자국을 가죽신발로 벅벅 문지르는 비르켄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다행히도, 비르켄의 짜증이 신시아나 레온에게 미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둘은 아슈타르 공작가의 저택에 초청받을 수 있었다.
‘이 통나무집을 저택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저택의 벽면을 이루는 나무의 껍질을 손으로 훑던 레온이 입맛을 다셨다.
이 근방의 땅을 다스리는 권력자의 거처라기보다는, 주변의 재료들을 얼기설기 쌓아놓은 임시거처에 가까운 형태.
“저택이 굉장히… 아름답군요.”
물론, 레온은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레온의 칭찬을 들은 비르켄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 움집에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붙인 사람은 댁이 처음이군. 정말이지 놀라운 심미안이야.”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귀는 멀쩡한 거 같은데, 눈은 요정족의 것인가 보지? 그 요정놈이 좋아하겠는걸.”
입을 다문 채 어깨를 으쓱하는 레온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비르켄은 나무벽에 붙은 우둘투둘한 나무껍질을 만지작거렸다.
“여하튼,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면 고맙겠네. 이 숲에서 사람처럼 지낼 만한 곳은 이 통나무집밖에 없으니 말이야.”
“개척이 생각만큼 잘되지 않나 봐? 천하의 비르켄이 우는 소리라니.”
가만히 비르켄의 말을 듣고 있던 신시아가 물었다. 비르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마족이 짐승보다 흔한 곳에 정착하러 오는 놈들이 얼마나 있겠어? 그중에서 제정신 박힌 놈들은 또 얼마나 될 거고.”
결국, 자신이 영지까지 데려온 가신들을 제외하면 비르켄이 이곳에서 구할 수 있었던 인력이라고는 변방까지 쫓겨난 범죄자나 떠돌이뿐.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솔직히, 내 생전에 개척을 끝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제명에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말을 마친 비르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만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썩 좋지는 않다는 의미이리라.
“결국, 필요한 게 뭔데 그래? 그냥 노동력이 필요한 거라면 어중이떠중이들을 써도 되는 거잖아.”
“일할 사람은 문제가 아냐. 이 근방에 깔리고 깔린 게 제국에서 쫓겨난 놈들이니까. 문제는.”
신시아가 턱을 긁적이며 묻자 비르켄이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채 답을 마치기도 전.
“그 사람들의 통제를 맡을 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없단 말이군요?”
순간 신시아와 비르켄의 시선이 갑작스레 대화에 끼어든 레온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이 보내는 의문 섞인 눈빛을 받아넘기며 레온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사람을 썼다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겠죠.”
레온이 말을 마친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반란이라는 단어는,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뭐, 반란? 얘가 영주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네? 미안, 얘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레온의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신시아가 비르켄을 향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사과는 됐어.”
그러나 비르켄은 사과를 받는 대신 고개를 젓고는, 레온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흡.’
비르켄의 눈을 정면에서 맞닥뜨린 레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사람의 눈이….’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은 살기가, 마경을 마주한 영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레온의 학식이 아무리 깊다지만, 그의 육체와 정신은 평범한 사람일 뿐.
강자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앞에서, 레온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숨에 심장이 멎어버릴지도 모르는, 패도적인 기세.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맨몸이 아니었다.
[심장의 이상반응 감지. 강심제와 아드레날린을 투여합니다.]
세이렌의 목소리가 귓전을 타고 흘러내림과 동시에, 그의 팔뚝으로부터 따끔한 통증이 전해져 내려왔다.
설계단계에서부터 신체에 작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위험 요소를 방어하고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호복의 수많은 신체보호기능 중 하나.
주삿바늘을 통해 주입된 고농도의 약물이 혈관을 타고 심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처럼 불규칙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초.
제대로 피가 돌지 않아 하얗게 질린 레온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까지는 약 5초.
“허억, 허억.”
그제야, 레온은 정신을 차리고 한동안 멎었던 호흡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지?’
단순히 상대와 눈빛을 교환했을 뿐인데 의식을 잃어버리다니.
레온이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주인의 상태가 회복된 것을 확인한 AI가 레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함장님께서 상대와 눈을 마주친 뒤, 심장에 알 수 없는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심장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레온의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쯤은 황당함에서, 반쯤은 분노에서였다.
‘지금, 말실수 좀 했다고 사람을 죽이려 든 거야?’
이 행성이 발전되지 않은 위험한 곳이란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연합법 92조 2항에 따라, 현재 상황은 함장님에 대한 외계생명체의 위협 및 살해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당방위 프로토콜을 실행할까요?]
만약 레온이 정당방위 프로토콜을 실행한다면, 방호복에 장착된 호신용 병기들이 작동할 것이다.
그리고, 방호복과 연결된 함선의 AI인 세이렌의 제어에 의해 사용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게 될 터.
하지만 레온이 세이렌의 제안에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갑옷이나 껴입은 샌님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꽤 잘 버티는걸?”
비르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놈이라면 그런 말을 할 만한 자격이 있어. 그래, 충분하고말고.”
말을 마친 변방영주의 눈빛은 살기가 아닌, 자신의 진심을 담아 쏘아낸 살기를 버텨낼 수 있는 상대를 향한 감탄과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할 수 있겠지, 샌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던 조금 전과는 360도 달라진 비르켄의 태도에, 레온의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하마터면 당신 덕분에 죽을 뻔했는데, 일단 사과부터 하시죠?”
물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네놈이 내게 저지른 무례와 비긴 것으로 하지. 일단 살아 있으니 된 것 아닌가?”
“말 한마디와 목숨을 바꾸는 건 좀.”
“과연, 배포만큼 욕심도 큰 녀석이군.”
자신의 진심을 담아 쏘아낸 살기를 견뎌낸 레온이 제법 맘에 들었던 것일까.
비르켄은 틱틱대는 레온을 향해 작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이 황무지에서 줄 수 있는 게 딱히 없긴 하다만.”
이만한 배포를 가진 자라면, 이름뿐이나마 공작의 작위를 가진 자신이 조금 양보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 말을 들은 레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요구사항을 말했다.
“일자리나 하나 주시죠.”
“일자리…?”
비르켄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물이나 돈 따위를 요구할 거라 생각했던 공작에게, 일자리를 달라는 레온의 요구사항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하지만, 레온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 어중이떠중이들을 통제하는 자리, 절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레온이 이 저택에 방문한 순간부터 생각했던 계획의 열쇠 중 하나.
하지만 레온의 제안을 들은 비르켄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네놈의 뭘 믿고?”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믿는 아슈타르의 가신들에게도 쉽게 맡길 수 없는 임무.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샌님에게 맡길만한 일은 분명 아니었다.
그 말에, 레온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를 믿지 못하겠다면, 이쪽을 믿는 건 어떨까요?”
“뭐? 나?”
레온이 갑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놀란 신시아가 눈을 끔뻑였다.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쪽 분하고 친한 거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너랑 친한 건 아니잖아!
갑자기 자신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는 레온을, 신시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신시아가 채 입을 떼기도 전.
“신시아라면 믿어줄 만하지. 제법 오랫동안 얼굴을 봐왔으니까.”
레온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든 것일까.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비르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릉!
등 뒤에 메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뭡니까?”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자신을 향해 사람 몸뚱이만 한 장검을 겨누자, 레온은 말을 하다 말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아닌가?’
자신이 입은 방호복이라면 인간이 휘두르는 검 정도는 막아낼 수 있겠지만, 현지의 지적생명체-논문주제-와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비르켄이 검을 뽑아 든 이유는 레온을 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충성 맹세 처음 봐?”
“충성… 맹세요?”
“그 일을 맡고 싶다면, 일단 내 가신이 될 생각을 먼저 해야 하는 게 순서 아냐? 긴말 필요 없으니까 거기 무릎이나 꿇어.”
물론, 레온이 원하는 방향도 아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