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씨앗(2)
인류가 지구를 떠나 은하로 진출한 지도 벌써 천 년이 넘게 흘렀다.
당연히, 은하를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지금의 인류가 가진 과학기술은 천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그것은 우주선에 사용되는 엔진 역시 마찬가지.
한 번 쓰고 버릴 미사일에도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융합로가 들어가는 시대에, 고작해야 산화제와 화학연료 따위를 사용하는 로켓엔진 따위는 고대인의 유물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레온의 행성탈출계획은 그곳에서 시작했다.
고대 기술로 우주공간까지 화물을 나를 수 있는 엔진과 로켓을 만들어낸 다음, 베가본드호를 다시 우주공간으로 쏘아 올리는 것.
항성 간 여행에 사용되는 하이퍼드라이브엔 문제가 없으니, 어떻게든 대기의 간섭을 받지 않는 우주공간으로 우주선을 쏘아 올릴 수만 있다면 하이퍼드라이브를 이용해 가장 가까운 거주행성 근처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 구조신호를 사방에 뿌리면 누군가는 난파된 베가본드호를 구조하러 올 터.
그것이, 레온이 세운 행성 탈출계획이었다.
“그런데….”
하지만.
“왜 못 만든다는 거야?”
그 사실이 레온에게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온은 치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여성체의 홀로그램, 세이렌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부품 생산을 위한 설비와 자원이 부족합니다.]
세이렌은 함장을 향해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레온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고대 인류도 잘만 만들어냈잖아? 고대인들이 우리보다 설비가 뛰어나기라도 했단 거야?”
말을 마친 그의 검지손가락이 함선 내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 자리한 것은, 쇠를 녹이는 고로를 연상케 하는 원통 형태의 기계였다.
“저 물질융합기는? 저거면 어지간한 부품은 전부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냐?”
고대의 인류가 사용했던 3D프린터의 발전판이라 할 수 있는 물질융합기라면, 고대 기계의 부속품 따위는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말에 세이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엔진용 부품의 생산을 위해선 연료의 연소반응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내열성을 가진 합금이 필요하며, 안정적인 결합상태의 합금을 생산하기 위해선 최소 2급 이상의 물질융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본 함선에 탑재된 물질융합기의 등급은 4급으로, 합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임계출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뭔 소리야?”
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들은 레온은 벙찐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우주사를 전공한 레온은 AI의 전문적인 설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이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대의 지식수준에 맞는 답변 도출중…. 엔진에 필요한 부품을 생산하기에, 함선에 장비된 물질융합기의 출력이 부족합니다.]
“진작 그렇게 설명해 줄 것이지. 누구 놀리나.”
그제야 설명을 이해한 레온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중간 끼어 있는 노이즈 때문인지 세이렌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당장 만들어낼 수는 없단 거네?”
중요한 것은, 은하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변방행성에 생각보다 더 오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렇습니다.]
“젠장, 돌아가면 블랑카 교수님이 날 죽일 게 분명해. 아직 논문도 제출 못 했는데.”
충실한 박사과정 대학원생을 잃은 교수의 마음이 어떨지 잠시 상상해 본 레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는 것이, 그의 남은 삶을 위해 도움이 되리라.
“그럼,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그건 아니지?”
레온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세이렌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원획득과 부품생산을 위한 설비를 갖추는 것은 함 내에 보유한 물질융합기로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 말을 들은 레온의 절망한 눈동자에, 다시 희망의 불씨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세이렌이 입을 열었다.
[시뮬레이션 결과, 함장님의 지시에 의해 입력한 고대의 인류가 사용한 기술을 이용한다면 98.2%의 확률로 물질융합기를 이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부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담담히 계획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AI의 어조는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데.’
너무나 자신감에 차 있는 세이렌의 태도를 마주한 레온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걸리는데?”
[32,028,369번의 시뮬레이션 결과, 최소 1년에서 최대 5년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레온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미친.”
이름도 모를 변방행성에서 수년 동안 처박혀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레온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세이렌.”
[오늘부로 행성에 착륙한 지 365일째입니다.]
“빌어먹을.”
베가본드호와 레온이 지나가던 운석에 맞고 이름 모를 행성으로 추락한 지도 벌써 1년.
잠에서 깨자마자 욕설로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한 레온은 천천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행성 착륙 1주년 기념으로 알데란 성계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식당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기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기념할 게 없어서 그런 걸 기념하고 있어?”
세이렌의 말에 레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곧 콧속으로 스며드는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세이렌, 진행 상황은 어때?”
식탁에 앉은 레온은 알데란식으로 조리된 닭-과 거의 동일한 행성의 토착생물-다리를 크게 베어 물며 물었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금일 부로 엔진생산공정의 완성도가 50%를 돌파했습니다.]
“오, 정말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반쯤 감긴 눈으로 닭 다리를 뜯던 레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세이렌이 입을 열었다.
[현재의 진행 속도대로라면, 약 400일 이내에 공정이 완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부품 생산 및 조립에 약 100일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500일… 이란말이지.”
세이렌의 답을 들은 레온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년에 가까운 시간을 이 변방행성에서 보내야 한다는 의미이긴 했지만, 레온은 이미 1년이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좀 길기는 하지만… 그래도 돌아갈 수는 있겠는걸.”
중요한 것은, 레온이 세워둔 행성탈출계획이 아무런 문제도 없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레온의 정신은 진작 무너져버렸으리라.
“어디,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는걸?”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린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나선 나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확실히, 베가본드호 보다는 지내기 편하단 말이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외부활동용 보호복을 입으면서, 레온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집’을 눈으로 훑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와 세이렌이 지난 1년 동안 만들어낸 이 거주지가 없었다면, 레온은 반쯤 박살 난 베가본드호에서 힘겹게 생을 유지해야 했을 테니까.
보호복을 모두 입고 헬멧까지 뒤집어쓴 레온은 외부로 향하는 문 앞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치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이 열리자, 레온은 천천히 행성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곧, 금속과 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사육장과 공장, 거주 구역 등으로 이루어진 회색빛의 도시.
“이게 1년 만에 만들어 낸 거라니,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단 말야.”
레온은 자신이 일궈낸 마을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혼자였다면 만들어낼 수 없었겠지만.
“세이렌, 넌 정말 대단해.”
이 마을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베가본드호에 탑재된 범용AI, 세이렌의 지분이 컸다.
아니, 사실상 이 마을을 만들어낸 것은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상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로봇들과 각종 생산설비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으니까.
[은하 표준규격을 만족하는 AI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겸손하긴.”
[사실입니다.]
함장의 칭찬에 세이렌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레온은 어쩐지 그녀가 기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레온은 천천히 마을을 돌며 산책을 시작했다.
“지금이 2단계라고 했나?”
[네, 함장님. 얼마 뒤 3단계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부품과 연료생산을 위한 자원탐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러면 저 나무들도 보기 힘들겠네.”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숲을 바라보며 레온은 입맛을 다셨다.
마을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는 거대한 나무들.
관광용으로 꾸며진 행성에서도 보기 어려운 웅장한 경관은, 이 행성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자원의 원활한 운송을 위해 대륙 전역에 교통로를 건설할 예정입니다. 그를 위해선 어느 정도의 벌목은 필요한 일입니다.]
“알아, 안다고. 그래서 지금 많이 봐 두려는 거 아냐.”
레온은 세이렌의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짓고는, 언젠가 사라질 숲을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삐-
[경고, 경고.]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풍경을 감상하던 레온의 눈앞이 붉은색으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행성에 추락한 이후 처음 듣는 AI의 경고에 레온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세이렌이 입을 열었다.
[거주지에 접근하는 인간형 생명체를 발견. 인공물질을 신체에 부착한 것으로 볼 때, 지적 생명체로 추정됨. 함장님께서는 안전을 위해 베가본드호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지적 생명체라고?”
하지만 세이렌의 경고를 들은 레온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숲이 존재할 만큼 인간이 거주하기에 좋은 조건의 행성이라곤 생각했다.
그러니, 인간과 유사한 지적생명체가 존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하지만,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지적생명체를 실제로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이렌, 그 지적생명체의 위치가 어딘데?”
[위험합니다, 함장님. 함장님의 신체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레온의 물음에 세이렌은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번 경고했다.
하지만 레온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이걸 입고 있는 거잖아?”
텅 텅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둔탁한 보호복.
어지간한 개인화기의 공격도 버텨낼 수 있는 이 녀석이라면, 설사 지적생명체의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으리라.
“설마, 이런 변방행성에서 자생하는 지적생명체가 이 보호복을 뚫을 수 있겠어?”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겠습니다.]
결국, 함장의 논리를 꺾지 못한 세이렌은 백기를 들었다.
팟!
그녀의 말과 함께, 레온의 시야 한쪽 구석에 원형의 지도가 떠올랐다.
“저기군.”
지도 안에서 반짝이는 붉은 점을 확인한 레온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세기의 발견을 할지도 모르잖아?’
우주로 진출조차 하지 못한, 변방행성에 거주하는 지적생명체.
우주사와 크게 관련은 없었지만, 학자로서 가진 지적호기심은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온은 지적생명체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리고.
“…뭐야.”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레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라고?”
그의 앞에 나타난 변방행성의 지적생명체는, 다름 아닌 인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