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씨앗(1)
한 줄기 불꽃이 검푸른 하늘을 갈랐다.
어지간한 별똥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빛줄기가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장면은, 흡사 신의 강림이라 생각될 만큼 강렬했다.
지상에서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봤다면, 필시 고개를 조아렸을 것이다.
물론.
[경고, 대기권 돌입을 시작합니다. 외부역장 출력 62%로 감소.]
“빌어먹을.”
불타오르는 유성, 아니 탐사선에 올라탄 레온의 입장은 조금 달랐지만.
“세이렌, 역분사엔진 전부 가동해!”
[현재 역분사엔진 모두 고장으로 인한 작동정지상태입니다. 정상 가동까지 앞으로 31분.]
“31분? 장난해?”
31분은 무슨.
이대로 3분만 지나면 이름 모를 행성에 충돌한 그와 우주선, 그리고 우주선의 AI인 세이렌은 형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박살 나버릴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이름 모를 행성과의 충돌로 끝내고 싶은 사람은 은하 어디에도 없다.
“세이렌, 함선 상태 띄워봐.”
어떻게든, 예정된 죽음 앞에서 도망칠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픽!
세이렌의 대답과 동시에, 홀로그램 하나가 레온의 눈앞에 떠올랐다.
레온이 타고 있는 우주선, 베가본드호를 반투명하게 축소해 놓은 듯한 형태의 홀로그램 주변으로 수많은 그래프가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레온은 직접 설계한 함선의 정보와 오랜 항해를 통해 쌓인 경험을 종합했다.
그리고 곧 눈앞에 떠오른 수많은 그래프와 수치가 가진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멀쩡한 게 어떻게 하나도 없어?”
순식간에 해석을 마친 레온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엔진을 가동할 만큼 함선의 상태가 멀쩡했다면, 이런 변방 행성의 중력권에 끌려올 일도 없었을 터.
‘정체불명의 운석만 아니었다면….’
레온은 대기권에 돌입하기 전 함선으로 날아든 운석을 떠올렸다.
마치 누군가 우주선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온 거대한 운석.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외부역장을 활성화 시켜놨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레온과 베가본드호는 이미 갈기갈기 찢겨 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 충격으로 반파되긴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함선의 동력을 책임지는 핵융합로의 출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엔진을 가동할 수 없는 덕에, 레온은 팔자에도 없는 강제 대기권 돌입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뒤집을 순 없다.
‘일단, 어떻게든 살고 보자.’
반파가 아니라 박살이 나더라도, 살아남아야 내일의 해를 마주할 수 있다.
행성에 다가갈수록 서서히 강해지는 중력과 관성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레온은 온통 기능 고장을 뜻하는 붉은 색으로 도배된 함선의 홀로그램을 샅샅이 훑어나갔다.
반파된 함선의 기능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려야만, 그의 생존확률도 조금이나마 늘어날 테니까.
‘별수 없지.’
재빨리 판단을 마친 레온의 입이 열렸다.
“세이렌!”
[네, 함장님.]
“역장 해제해.”
[대기권 돌입 중 외부역장을 해제할 경우, 선체에 손상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역장을 유지할 것을 권고합니다.]
세이렌의 판단은 타당했고, 상식적이었다.
함선의 외부를 보호하는 역장 없이 맨몸으로 대기권에 진입할 수 있는 함선은 그리 많지 않았고, 베가본드호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자신의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해제합니다.]
구구구궁!
AI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선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기와의 마찰을 막아주던 역장이 사라지면서, 선체가 대기와 직접 접촉하면서 발생한 충격.
삐- 삐-
[경고. 대기와의 마찰로 인해 선체가 손상되고 있습니다.]
사이렌의 붉은 빛이 우주선 내의 조종실을 붉게 물들였다.
“윽….”
진동과 중력 때문에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부여잡으면서, 레온은 함선 전체에 분배된 융합로의 출력 수치를 확인했다.
함선의 중앙에 위치한 융합로와 연결된 네 개의 엔진이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 순간.
“됐어.”
레온은 눈을 빛냈다.
“세이렌. 1번, 3번 엔진 가동해. 최대출력으로.”
[가동합니다.]
구구궁-!
레온이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베가본드호의 함체가 왼쪽으로 급격하게 쏠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레온의 몸이 함체의 회전 방향과 반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레온이 함교 안에 장착된 조종 콘솔을 단단히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선실의 벽 어딘가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으리라.
“우욱….”
사실, 지금도 딱히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함선의 급격한 기동으로 인해 발생한 관성이 레온의 몸을 제멋대로 짓눌렀다.
안구의 실핏줄에 모인 혈액들이 그의 시야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조금만, 조금만….’
하지만 레온은 이를 악문 채 양손으로 붙들고 있던 조종 콘솔을 뚫어질 듯이 바라봤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찾아내기 위해서.
곧.
‘지금.’
콘솔의 화면에 떠오른 기수의 방향이 정확히 추락하는 방향의 반대쪽을 가리킨 순간.
“2번, 4번 엔진 가동. 최대출력으로.”
기회를 잡은 레온의 입에서, 한 마디 명령이 흘러나왔다.
[가동합니다.]
구구궁-!
곧,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던 함체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벌겋게 물들어 있던 시야가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면서, 레온은 함선의 상태를 살폈다.
“엔진 추력 조절하면서 방향 유지해.”
[알겠습니다.]
“휴.”
함체의 자세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레온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대기권 돌입용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베가본드호가 유성처럼 불타지 않고 무사히 착륙하기 위해선, 메인엔진을 이용해 낙하 속도를 줄이는 법밖에 없었으니까.
“그나마 메인엔진이 무사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베가본드호와 세이렌, 그리고 레온의 운명도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물론, 착륙에 성공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베가본드호는 행성 재돌입을 위해 만들어진 우주선이 아니었고.
그 말인즉슨.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레온과 베가본드호는 이 행성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
대지를 가득 뒤덮은 거대한 숲.
쿠구구궁-!
조용히 잠들어 있던 숲을 깨운 것은, 숲의 중앙에서 들려온 굉음이었다.
굉음과 함께 진동이 땅을 뒤흔들자, 숲에서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놀라 바깥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으으….”
[비상착륙을 완료했습니다, 함장님.]
“나도 알아. 이런 거 두 번 했다간 뼈도 못 추리겠네.”
베가본드호를 통제하는 AI, 세이렌의 말에 레온은 고통에 찌푸려진 얼굴로 툴툴댔다.
지면에 떨어지기 전부터 그의 몸을 마구 두들겨댄 관성과 중력의 영향 덕분인지, 온몸의 뼈를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은 고통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아프다고 끙끙대고만 있기엔, 그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함선의… 상태는?”
말이 좋아 비상착륙이지, 조금 전의 비행은 추락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대기권에서의 그 거친 비행을 견디고도 우주비행 전용으로 설계된 우주선이 멀쩡할 리 없지 않은가.
‘세이렌이 살아 있는 걸 보니 융합로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피해 상태를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레온이 묻자 세이렌은 천천히 답했다.
[융합로의 출력은 51%로 비교적 정상입니다.]
“그건 알고 있고, 다른 건?”
[생명유지장치를 비롯한 함선 내부의 전자 장비들은 무사합니다만, 외부장갑의 파손이 심각합니다. 재돌입 시 발생한 열로 인해 외부장갑의 82%가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재돌입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역장의 보호 없이도 함체가 두 동강 안 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반쯤 죽을 각오를 했던 레온이었으니, 그 정도의 손해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지만.
[메인엔진 4기는 모두 완파되었습니다.]
“…뭐?”
그런 레온도, 세이렌의 다음 말을 듣고는 평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메인엔진이… 박살 났다고?”
그 말은 곧, 레온이 이 행성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의미와 동일했으니까.
[대기권 내에서의 장시간 사용으로 과부하가 걸린데다, 비상착륙 시의 충격으로 엔진의 주요 부품들이 손실되었습니다.]
“재가동 가능성은?”
[0%입니다.]
“하….”
온몸을 쿡쿡 쑤시던 통증도 잊은 채, 세이렌의 사형선고를 들은 레온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내 인생 계획에, 어딘지도 모르는 변방 행성에서 여생을 보내는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말야.”
[행성의 거주적합도는 표준 거주 행성 대비 98%입니다.]
“위로해 줘서 고맙긴 한데, 전혀 위로가 안 되거든?”
세이렌의 대답에 한숨을 내쉰 레온은 흐릿하게 보이는 함선의 홀로그램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평생을 살 순 없어….”
전도유망한 우주 고고학자인 그가 삶을 마감하기에, 이 행성은 어울리지 않았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현실 부정과 탈출 방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와중.
툭
신발을 툭 치고 지나간 감촉에, 레온의 시선이 저절로 발밑을 향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로켓역학]
우주력 이전에 사용하던 고대어로 적힌 학술서적 한 권.
함선의 저장고 안에 고이 모셔둔 보물이 어떻게 함교까지 굴러들어왔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
책의 표지를 장식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발견한 그의 눈이, 순간 번쩍 빛났다.
“…세이렌.”
[네, 함장님.]
“여기 행성의 중력은 어떻지? 표준중력 수준인 것 같긴 한데.”
[측정 결과, 표준중력과 동일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세이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레온의 눈은 바닥에 떨어진 고서적의 표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표지에 쓰인 사진은, 인류가 지구를 떠나기 수백 년 전의 것.
그곳에 찍혀있는 것은, 초기의 인류가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사용한 장비였다.
“로켓.”
성계간 여행이 숨 쉬는 것만큼 편해진 현대의 우주선에 비하면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기 그지없었지만….
“이거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절망에 빠져있던 레온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끄으으.”
전신을 두들기는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 레온은, 천천히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상착륙 시의 충격으로 굳게 닫혀있던 문들이 활짝 열린 덕에, 레온은 멈추지 않고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멀쩡하네.”
목적지인 저장고에 도달한 레온은 내부의 상태를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온 은하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고서적들이, 그곳에 있었다.
착륙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한 두 장이 찢긴 채 저장고의 바닥을 어지럽게 굴러다니고는 있었지만,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세이렌.”
[네, 함장님.]
함장의 부름에 함선의 AI가 조용히 대답했다.
레온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책들 모두 스캔해서 데이터화 해. 지금 당장.”
구명줄을 발견한 레온의 눈에, 희망의 불꽃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