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이제 모든 게 끝났군, 이안.]
다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온 달.
아니 달이었던 요새 위에서, 미미르는 저 멀리 보이는 물질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들이 정말로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야. 설마, 그들이 허신이 되는 길을 택할 줄이야.]
그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자기들이 원래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생명체가 가진 생존본능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거든. 어지간한 의지로는 뿌리치기 쉽지 않지.”
허신이 되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곤 하지만, 실제로 소멸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놈들에게 어느 정도의 희망도 던져줬고 말야.”
[희망?]
“운이 좋다면, 다시 신성을 얻어 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 희망 때문에라도, 허신이 된 정보생명체들은 어떻게든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를 악물 것이다.
이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미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결과적으로는 네 말대로 되었으니 다행이로군. 이제 이 세상에서 널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테니까.]
미미르의 말 대로였다.
신계에 거주하던 신들의 신성을 모두 거둬들인 이안의 신성은, 사실상 신계의 모든 신들을 합친 것만큼 강력했으니까.
“너무 강해서 문제지, 지금은.”
그것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어찌나 강력한 신성을 가졌는지, 까딱 잘못했다간 마동력을 이루는 신성과 마기, 마력의 균형이 무너져버릴 정도였다.
“물질계로 돌아가면, 넘쳐나는 신성을 어떻게든 처리해야겠어.”
물론, 큰 문제는 아니었다.
모자란 것도 아니고, 넘쳐나는 것이 문제라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으니까.
[정말이지, 욕심쟁이가 따로 없단 말이야. 다루지도 못할 힘을 꾸역꾸역 들고 있는 꼴이라니.]
“난 내가 가지려고 빼앗은 게 아니니까.”
위험한 힘을 수거했을 뿐이지.
이안은 미미르의 비아냥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깨에 고양이를 올려둔 채 함교의 문을 열고 요새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없다고 하더라도, 요새에 깃들어 있는 아스가르드의 제어시스템과 저장소 안에 가득 차 있는 마동력은 이 거대한 위성 요새를 알아서 잘 관리해 주리라.
파아앗!
콰과과과-
빛과 함께 이안의 다리를 감싼 로켓엔진이 뜨거운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다리를 휘저어 방향을 전환한 그는, 천천히 물질계를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부턴 어떻게 살 생각이냐?]
점점 가까워져 가는 푸른빛의 물질계를 바라보며 미미르가 물었다.
[널 위협할만할 존재는 이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제 자유로운 삶을 즐길 때인가?]
미미르는 자신의 주인이 언제나 자유를 바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는 주변의 위협 때문에 그 꿈을 접어 두었을 뿐.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안을 위협하던 최후의 세력인 신들조차 모든 걸 포기하고 굴복한 상태였으니, 그를 제약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언제 이안이 자유를 찾아 떠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야.”
미미르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가 물질계에 묶여있는 이상은 자유롭지 못할 거란 말이지.”
이안이 신들의 신성을 회수한 순간, 그의 어깨 위엔 물질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의무가 새롭게 지워졌다.
언젠가는 이 짐을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도 있겠지만, 그때가 지금 당장은 아니란 걸 이안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물질계 밖으로 나가려면 제작자의 지식을 좀 더 끄집어내야 할 필요도 있고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냐? 물질계 밖으로 나간다니? 물질계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었더냐?]
이안의 말을 들은 미미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질계와 신계가 세상의 전부였던 그에게, 이안의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들은 이안은 미소를 지었다.
“제작자의 지식 중에, 재미있는 게 많더라고.”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흥미로운 지식들이었다.
“이곳 바깥에도 물질계처럼 생명이 살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어?”
[…농담이 심하군, 이안.]
“농담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자고.”
그 말을 들은 미미르는 코웃음을 쳤지만, 이안의 표정은 진지했다.
‘제작자가 다른 행성의 정보와 좌표를 어떻게, 왜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이 정보가 사실이기를 바랬다.
‘재밌잖아?’
다른 행성, 그것도 외계인이 살고 있을 행성으로의 여행이라니.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던 전생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아니던가.
물론,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서 당장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제작자의 지식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달을 거대한 요새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술들이 이안의 머릿속에 잠들어있었지만, 당장 이안이 활용할 수 있는 것들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작자로부터 얻게 된 지식을 완전히 몸에 익히기 전까지는, 물질계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으리라.
이안이 미미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둘은 어느새 물질계의 대기권을 돌파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 아래로 익숙한 아슈타르 공작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신께서 지상에 강림하셨다!”
“검신! 검신! 검신!”
“검신이시여, 부디 저를 보우하소서….”
그리고, 이안이 나타난 것을 발견한 영지민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저놈의 검신, 검신. 이름을 바꿔 달라고 하든지 해야지, 원.”
환호성을 마주한 이안은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기도하는 이들 앞에서, 저도 모르게 그의 입이 미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것은 왜일까.
[기쁜 모양이로군. 자네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시끄러.”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알자스 성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고는, 빠른 속도로 아스텔리아 대륙을 빠져나갔다.
이안이 방문해야 할 곳은, 아슈타르와 아스텔리아만이 아니었으니까.
“관리자님, 관리자님이야!”
“관리자님, 만세!”
“만세! 만세!”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마키나 대륙 옆의 작은 섬, 폐기장이었다.
그곳에서 기계들과 함께 재건작업을 벌이고 있던 일곱 용의 조직원들은, 이안이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쐐애액-!
이안은 그대로 그들을 지나친 다음, 마키나 대륙의 중심을 향해 달려 나갔다.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아, 이안은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첨탑, S-1의 본체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오셨군요, 관리자님! 무사히 돌아오신 걸 보니 신들을 확실히 끝장내고 오신 모양이죠? 역시 관리자님은….]
관리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S-1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이안의 귀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어서.”
[할 일이라면…?]
“제작자의 유산에 접속해야겠어.”
말을 마친 이안은 곧장 제작자의 유산이 존재하는 S-1의 본체 안으로 이동했다.
곧, 그의 앞에 제작자의 유산인 황금의자가 나타났다.
이미 몇 번이고 접속해 본 경험이 있는 터라, 이안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다음, 의자와 케이블로 연결된 헬멧을 머리에 덮어썼다.
그 순간.
[유저접속 확인. BSP 시뮬레이터를 실행합니다.]
파아앗!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이안의 정신은 가상공간 안으로 옮겨졌다.
“흠,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초록색으로 가득찬 초원의 수풀 사이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던 이안은, 품에서 자신이 준비해둔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주머니였다.
이안이 주머니를 가볍게 흔들자, 안에 가득 담겨있는 무언가가 부딪치며 짤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동안 짤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이안은.
촤르륵!
단번에 주머니를 뒤집어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쏟아버렸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수백, 수천 개의 조그마한 구슬.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크기의 수정구슬들이 무성한 수풀 사이로 쏟아져 내려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흠, 이러면 됐겠지?”
곧,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모두 쏟아낸 이안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파아앗!
구슬들을 집어삼킨 수풀 아래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초원 전체를 집어삼킬 만큼 강한 빛에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구슬 안에 봉인되어 있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지…?]
반딧불이라고 착각할 만큼 조그마한 빛무리들.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성역을 모방한 것인가?]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빛무리들이 제각기 하늘 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저게 신계의 신들이라고 누가 믿겠어?’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빛무리를 바라봤다.
[이봐, 이곳은 대체 어디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크기였지만, 그것은 분명 마법의 신이라 불리던 갈리우스였다.
이안은 반딧불처럼 작아진 갈리우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너희에게 딱 맞는 곳이지. 신들을 위한, 성역 같은 공간이랄까?”
신성을 잃고 허신이 되어 크기마저 작아진 존재들.
이젠 신이 아니라 정보로 이루어진 생명체일 뿐인 그들에게, 데이터로 만들어진 공간만큼 좋은 보금자리는 없으리라.
‘뭐,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이안의 몫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저들의 몫이지 않겠는가.
운이 좋다면, 신성 한 조각 정도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
“그럼, 난 약속을 지켰으니 가볼게. 열심히 살아보라고.”
[자, 잠깐!]
할 말만 던지고 사라진다는 이안을 향해 갈리우스가 당황해 소리쳤지만, 이안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파아앗!
“후, 하난 끝냈고.”
무거운 헬멧을 집어 던진 이안은, 자신의 품에 들어 있던 봉인구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언젠가 공간의 정체에 대해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딱히 다른 방도는 없으리라.
“못 나가게 보안 잘 걸어놓으라고.”
[걱정 마십시오, 관리자님. 그 어떤 감옥보다도 철저하게 관리할 테니까요. 그나저나, 아예 가상공간에 신들을 가둬버릴 줄은 몰랐군요….]
“언젠간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정보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니까.”
하다못해, 시뮬레이션용으로라도 쓸 수 있겠지.
S-1의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떠날 준비나 해볼까.”
제법,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는 하지만.
쐐애애액-!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물질계와 아스텔리아 대륙에 일어난 변화는 고작 강산만이 아니었다.
마키나로부터 들어온 기계문명과 과학기술이 마법과 오러의 힘을 빌리자, 문명의 발달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조차 간신히 날아다니던 대륙의 지성체들은, 어느새 하늘과 바다를 지배하고 우주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가는 거야?”
물질계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한때는 달이라 불렸던 곳.
‘검신의 집’이라 불리고 있는 거대한 우주요새에서는, 모처럼 물질계에서 올라온 손님들로 가득했다.
“때가 되었으니까.”
자신을 향해 아쉬운 표정을 짓는 아슈타르의 섭정, 베티를 향해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연합공국의 여섯 공작과 마르센 제국의 황제가 된 알론소, 봉인에서 풀려나자마자 용들의 수장이 된 메이라우스와 황금모루부족의 족장인 바몬트.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있었다.
“제국은 그대가 물질계를 위해 일해온 것을 잊지 않을 걸세.”
“그건 난쟁이들 역시 마찬가지지!”
“용들 역시, 그대가 용들을 수호해온 것을 잊지 않을 거야. 그대가 아니었다면, 용들은 진작 멸망해버렸겠지.”
이안이 지금껏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리고 자신들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은 떠나려는 이안을 향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
“이안.”
“음?”
알론소의 부름에, 이안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알론소가 입을 열었다.
“언젠간, 다시 물질계로 돌아올 겐가?”
“그건… 모르겠는데. 아직 어디로 갈지 몰라서 말이야.”
몇 군데 점 찍어둔 행성의 좌표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내 살아생전에는 못 볼 수도 있을 거란 말이군.”
“아마도, 그렇겠지.”
우주는 넓고 광활한 곳이다.
이안이 물질계로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게 언제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네. 그동안 함께해서 고마웠어, 모두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알론소를 향해, 이안은 담담히 작별을 선언했다.
“나 역시, 그대와 함께 싸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나도….”
그 말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안을 향해 마지막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멈춰있던 이안은, 이내 생긋, 미소 짓고는 몸을 돌렸다.
[결국, 진짜로 떠나게 되는군.]
“그러게. 생각보단 빨리 가게 됐지만 말야.”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저 바깥으로 나가는 게 무섭네. 그렇게 넓은 공간을 방황해야 한다니….]
“그래서, 안 갈 거야?”
[물론, 그건 아니지! 조금 무서운 것 때문에 주인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주인도, 내가 없으면 심심할 거고 말이야.]
“그럼, 됐군.”
말을 마친 미미르가 어깨를 꽉 붙드는 것을 느낀 이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위를 올려다봤다.
공기 하나 없는 요새의 바깥으로 나온 이안의 머리 위로 보이는 것은, 우주의 캄캄한 암흑뿐.
하지만, 저 암흑 너머에 그가 원하는 것이 존재했다.
‘자유.’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콰앙!
이안은 힘껏 발을 굴렀다.
파아앗!
그의 몸뚱이가 하늘 위로 힘껏 솟구침과 동시에, 이안의 몸 전체가 빛에 둘러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은 조그마한 우주선의 조종석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자신이 제작자의 지식으로 직접 설계한, 초광속엔진을 탑재한 개인 우주선.
“자, 그럼 가볼까.”
자유를 향해서.
초광속 엔진의 시동버튼에 손을 올린 채, 이안은 진정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Fin.